오늘의 편지

안녕하세요. 에디터 민정입니다.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1월이네요. 새해를 맞이하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다짐들, 올해는 꼭 지켜야겠다는 결심들, 그리고 여전히 정리되지 못한 감정들까지. 1월은 마치 희망과 미련이 뒤섞인 채 조금은 서툴게 걸음을 떼는 시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달의 키워드는 지나온 시간을 떠올리기 딱 좋은 달인만큼 '추억'입니다. 어떤 추억은 오래도록 꺼내어 간직하고 싶고, 또 어떤 추억은 조용히 덮어두고 싶은 순간으로 남기도 하는 것 같아요. 지금 여러분의 마음엔 어떤 추억들이 머물고 있나요? 오늘의 레터를 천천히 읽으며, 한번 떠올려봐주세요.
민정의 가장 충만하고도 불완전한 이야기

저는 매년 연말이면 꼭 하는 일이 있습니다. 바로 '사진 정리'에요. 한 해 동안 찍은 사진들을 하나하나 꺼내보며, 제가 정해놓은 폴더 기준에 따라 클라우드에 업로드하고, 휴대폰 앨범은 말끔히 비워버리는 거죠. 이 습관은 꽤 오래됐습니다. 덕분에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는 게 익숙해지기 시작했던 중학생 무렵부터 지금까지의 제 일상들이 클라우드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어요.
가끔은 클라우드에 접속해 지난 시절의 사진들을 다시금 꺼내어보곤 합니다. 그럴 때면 바쁜 일상 속에서 잊고 지내던 추억들이 선명해지면서 마음이 몽글몽글해져요. 제 사진은 물론 신랑과 자루 사진은 연도별로 정리해둔 덕분에 나의 23살이, 우리의 5주년이, 자루가 처음 우리 부부에게 왔을 때 등등 문득 떠오르는 특정 시절이 있을 땐 폴더에 들어가 바로 원하는 사진을 찾을 수 있어요. 친구들 사진도 제가 분류해둔 그룹별로 나누어져 있어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들은 물론이고 가장 친한 단짝 친구와 찍은 사진은 너무 많아서 그 아이의 단독 폴더가 있을 정도랍니다. 사회에서 만나 친해진 지인들의 폴더도 따로 있어요. 이 정도면 저 정말 정리의 달인 아닌가요?
그렇게 빼곡히 정리해둔 수많은 폴더 속에서도 유일하게 없는 게 있어요. 바로 '가족'과 관련된 폴더입니다. 어릴 적 친구들 집에 놀러 가면, 꼭 커다란 가족사진 액자가 잘 보이게 걸려있잖아요? 그 당시 저에게는 그 액자 하나가 꼭 '정상적인 가족의 상징'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저희 집에는 단 한 번도 거실 벽에 가족사진이 걸려있던 적이 없었거든요. 부모님이 일찍 이혼을 하시기도 했고, 생계를 책임지느라 늘 바빴던 엄마에게는 사진을 찍을 여유가 없었을 거예요. 사진관은커녕 함께 어딘가 놀러 간 기억도 거의 없으니, 클라우드 속에 '가족'과 관련된 폴더가 없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남겨진 기억도, 꺼내 볼 추억도 없는 거죠.
그러다 작년 말, 엄마와의 여행을 결심했습니다. 좋은 음식을 먹고, 새로운 여행지에 갈 때마다 '우리 엄마는 이런 거 한 번도 못 해봤겠지?'라는 은근한 미안함이 제 발목을 붙잡았거든요. 사실 엄마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 일이 저에게는 참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저에겐 든든한 지원군들이 있어요. 세상에서 저를 가장 아껴주는 남편과, 저를 누구보다 존중해 주는 시엄마. 넷이 함께 하는 여행이라면 해볼 수 있겠다는 용기가 생겼고, 그렇게 저는 엄마와 함께 사이판에 다녀왔답니다.
엄마와의 여행은 예상 그대로였어요. 60년 만에 처음 밟아본 다른 나라 땅, 아이를 낳은 후 처음 가져보는 며칠간의 휴가, 딸과 함께하는 첫 여행. 모든 것이 처음인 엄마는 뭘 해도, 뭘 먹어도 누구보다 행복해했습니다. 엄마 성격상 딸과 사위가 해외여행을 데리고 가줬다며 적어도 몇 년은 자랑할게 뻔해서 예쁜 풍경이 펼쳐질 때마다 사진도 정말 많이 찍었죠.
그리고 어김없이 찾아왔던 2025년의 마지막 날, 저는 늘 그랬듯 휴대폰 앨범에 쌓인 사진들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이판에서 엄마와 찍은 사진들을 마주했죠. 빼곡하게 쌓인 우리의 5박 6일 치 추억을 넘겨보는데 그동안 묵혀있었던 엄마를 향한 정체 모를 죄책감, 아쉬움, 그리고 갑갑함까지 수많은 감정들이 개운하게 해소되더라고요.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제가 엄마에게 느꼈던 미안함은 '우리에게 서로를 제대로 추억할 수 있는 장면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는 결핍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요. 헤어진 연인도, 이해관계가 맞지 않아 멀어진 옛 친구도 가만히 생각하다 보면 떠오르는 소소한 추억 하나 정도는 있기 마련인데, 나는 엄마와 그 정도 추억도 없는 것 같아서 이렇게 마음이 쓰였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솔직히 여행을 다녀온 후 엄마와의 관계가 나아진 건 아닙니다. 저는 여전히 엄마의 존재가 힘들고, 괴로워요. 어떤 날은 자려고 누웠다가도 불쑥불쑥 지난날의 상처가 올라와 눈물로 베개를 적시기도 합니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제가 제일 싫어하는 행동을 하는 바람에 다시 연락을 끊고 거리를 두기 시작했지 뭐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가볍습니다. 제가 엄마에게 화가 나 도망치는 이 순간에도, 엄마가 그런 저를 멀리서 원망하고 있을 순간에도, 행여나 이러다 우리가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되는 날이 온대도, 엄마에게 '딸과 함께한 아름다운 추억' 한 조각쯤은 남겨줬다는 생각 덕분에요.
추억이라고 하면 보통은 자꾸 꺼내 보고 싶고, 생각할수록 웃음이 나는 따뜻한 장면들을 떠올리게 되잖아요?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알았어요. 세상엔 꼭 그런 추억만 있는 건 아니더라고요. 더 건강하게 멀어지기 위해, 더 좋은 이별을 맞이하기 위해, 그래서 마침내 잘 놓아주기 위해 만들어야만 하는 추억도 있다는걸요.
그렇게 처음으로 '엄마'라는 단어가 들어간 폴더를 만들었습니다. 그 안에 담긴 수많은 사진들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다짐해 봅니다. 내가 사랑하고, 미워하고, 또 그리워하는 존재들을 이제는 조금 더 편안하게 추억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요. 여러분의 마음에는 어떤 추억들이 남아있나요? 아직은 차갑지만 포근함을 문턱에 두고 있는 지금의 이 계절처럼, 우리 모두의 추억들이 시린 겨울을 지나 따뜻한 봄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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