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편지
우리 월간 마음건강 뉴스레터 구독자분들 중에는 오늘 사연이 남 일 같지 않다고 느끼는 분들이 많을 것 같네요. 저도 오랜 시간 피부로 느끼며 고민해왔던 주제이기도 하고요. 실제로 지난달 컨트리뷰터 살롱이 끝나고도 한 독자께서 남아 계시다가 저에게 이 주제로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셨어요. 따듯한 마음을 가진 사람일수록 자주 겪게 되는 '들어주는 사람으로서의 고충'이 오늘 사연입니다. 만나볼까요?
오늘의 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보컬 트레이너로 일하고 있는 30대 후반 여성입니다. 보컬 레슨 특성상 1:1로 수업을 하다 보니 학생들의 사적인 이야기도 많이 듣게 되고, 노래라는 게 기술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 심리와도 많이 맞닿아 있다 보니 심리 상담을 하게 되는 경우도 많은데요. 저도 심리 쪽에 관심이 많아서 보컬 관련 자격증 뿐만 아니라 심리 자격증까지도 취득했습니다. 수강생들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도 하고 위로도 건네는 것까지도 자연스럽게 저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14년째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많이 버겁다는 생각과 함께 나의 마음은 누가 들어주지?라는 물음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저도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5년째 약을 먹고 있고 지금도 정신과를 다니고 있습니다. 제 주치의 선생님께 이런 부분에 대해서 상담 드리면 환자분이 사실 정신과 의사 역할을 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게 기본적으로 타고난 성향이다 보니 기대고 싶은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환자분에게 더 기대게 될 것이다. 조금은 받아들이고 사셔야 할 것 같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 학생들의 경우 정신과를 다니는 친구들이 유독 많은데요. 새벽 5시에 자해를 하고 저에게 도움 요청을 했던 학생도 있고, 자살시도를 하려고 하다가 제가 막아선 적도 있었습니다.
학생뿐만 아니라 제 주변 가족, 친구, 애인까지도 저에게 정서적으로 많은 부분을 기대고 있습니다. 항상 공감하며 받아주는 제가 그들의 눈에는 단단해 보이는 것 같아요. 가끔 제가 우울이 심해져서 도움을 요청하면 다들 당황해하는 게 보이다 보니 제 감정에 대해서는 말을 점점 더 아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너무 힘들 때는 위로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선은 긋고 싶은데 또 성격상 허용적으로 받아주는 부분이 많다 보니 어떻게 거절의 말을 건네고, 제 자신을 지켜내야 하는지 고민이 됩니다.by. 이유엔 님
* 구독자 누구나 아래의 링크를 통해 사연을 신청할 수 있습니다.
구독자의 답장
이유엔 님의 사연, 어떻게 보셨나요? 저는 정말 드리고 싶은 말씀이 한가득이었는데요. 우리 컨트리뷰터 여러분들도 비슷한 마음이셨나 봐요. 조언보다는 '저도 그런 사람인데 이번 답변 정말 기대되네요'라고 보내 주신 분들이 훨씬 많을 정도로 말이죠. 한번 살펴볼까요?
장재열의 답장
이유엔 님 사연을 보면서, 얼마 전 다녀온 베트남 여행이 떠오르네요. 어머니 암 완치 기념으로 7년 만에 함께 떠난 효도관광이었는데요. 어머니와 저, 여동생이 함께 떠났어요. 그런데 비행기를 타자마자 어머니가 뭔가 이상한 거예요. 해외여행 경험이 적지 않은 분이셨는데 갑자기 공황증상 비슷한 것을 느끼면서 '심장이 두근두근 거린다'라고 말씀하시며 안정제를 한 알 드시더라고요. 하필이면 그날따라 난기류가 심해서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렸어요. 저는 파워 N이라 원래도 비행기를 타면 도착 전까지온갖 상상을 다 하는 편인데, 그날은 긴장하는 어머니에 유독 흔들리는 기체까지... 불안감이 좀 심하더라고요. 그래서 냉큼 앞좌석에 들어있는 기내 안전 수칙리플릿을 펼쳤어요. 비행기 탈출법, 구명조끼 입는 법, 화재 시 대응법 등등을 보다가 눈에 띈 것은 바로 산소마스크 쓰는 법이었어요. 산소마스크 착용법에서 가장 강조하고 있는 중요사항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그게 뭔지 아세요? 바로 '나부터 쓰고 노약자를 씌워주기'에요.
기내 안전 수칙뿐만이 아니라, 어디에서든 산소마스크를 착용할 때 가장 강조하는 건 일단 내가 완벽하게 착용한 뒤에 노인과 아동을 씌워주는 겁니다. 아이가 걱정되어서 먼저 씌워주다가보면 나는 유독가스를 상당히 마시고 쓰러질 수 있어요. 그러면 쓰러진 나에게 아이가 마스크를 씌워줄 수 있을까요? 없지요. 그러면 둘 다 죽을 확률이 급격히 올라가게 됩니다. 하지만 내가 먼저 쓰고 나면 아이가 쓰러져있더라도 얼른 마스크를 씌워서 다른 곳으로 안아 대피시키고, 입으로 호흡을 불어넣을 수도 있고, 구조 대원에게 아이를 인계할 수도 있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핵심이에요. 내가 건강하지 않은 채로 타인을 도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미 이유엔 님은 주변 사람에게 NPC로 인식되어버린 건 아닐까 되짚어볼 필요가 있어요. 게임을 해보신 적 있다면 아실 텐데요. NPC란 게임에서 대장간 주인이나 여관 주인처럼 같은 공간에 서서 한 가지 기능만을 하는 보조캐릭터를 말합니다. 그들은 무기를 판매하거나, "여행자이시군요, 푹 쉬세요"라며 20골드를 받고 식사와 침대를 제공하지요. 오로지 게임 속에서 그 기능만을 하는 캐릭터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대장간이나 여관 밖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을 전혀 상상하지 않습니다. 밤이든 낮이든 그곳에서 비슷한 대사만을 외치고 있지요. 그런데, 이 NPC는 게임 속에만 있는 게 아니에요. 현실 세계에서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어떤 한 사람을 바라볼 때 그 사람의 '역할'을 단편적으로만 인식하고 있으면 우리는 나도 모르게 상대를 NPC처럼 인식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자주 가는 피부과의 접수 데스크 직원과 나. "장재열님 이번에 수염 제모 5회차시네요. 연고 남아있으시죠?" 이런 대화만 기계적으로 나눕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그 사람이 '사람'으로 자신의 삶이 있고, 그녀 역시 한 개인으로서 희로애락이 있다는 걸 미처 인지하지 못하게 되지요. 접수처 직원만 그럴까요? 때로는 엄마 같은 가까운 존재도 그렇습니다. "엄마는 원래 돼지고기 비계를 좋아하는 줄 알았습니다"라는 대사는 꽤 유명하지요? 늘 살코기만 주고 엄마는 비계만 먹다 보니, 철없는 자식들이 엄마 생신에 돼지비계를한 아름 사서 주었다는 일화요. 그렇게 우리는 한 사람의 호의와 선의를 '원래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하면서 서서히 상대를 NPC 화해서 인식하게 되어버리는 거예요.
저는 어떨까요? 아예 직업이 대놓고 상담가잖아요. 원래 상담가가 되기 이전부터 알던 친구들조차도어느 순간 자기들이 힘들 때만 연락해서 저를 '공짜 상담소'로 활용한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딱 두세 번 집단 상담에 왔던 참여자가 꼭 명함 한 장만받고 싶다기에 주었더니 밤 12시고 새벽 2시고 전화하는 일이 다반수였어요. 일요일에 데이트 중인데 모르는 전화가 와서 받았더니 다짜고짜 울먹이면서 "엄마가... 완전히 의절하재요... 저 어떡해요?"라고도 말합니다. 저는 상대가 누구인지조차 파악이 안됐는데요. 그걸로 헤어질 뻔한 적도 있었어요. 그런데 결정적인 깨달음을 주는 사건이 있었는데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잠들려는 12시, 전화가 걸려왔어요. 몇 번 본 적이 있는 내담자였습니다. "재열 님 안녕하세요, 전데요. 저 오늘 밤죽으려고요. 도와주러 와 주실 거죠?"라고 말했어요. 그분은 제주도에 살고 있었습니다.
느껴지세요? 사람들은 '들어주는 사람'이 늘 그 자리에있어주다 보면 "저 사람도 사람이다"라는 감각을 잊게 됩니다. 그리고 영원히 들어주는 사람이기를 바라게 되지요. 분명하게 거절하고 표현해야 합니다. 저는 점점 말하기 시작했어요. 친구들에게는 "너 지금 다짜고짜 하소연하는 거, 이연복 셰프 퇴근했는데 집에 오자마자 요리해달라고 하는 거랑똑같은 거야"라던가 "이거 나한테는 무급 야근이야"라고 직장인의 눈높이에서 이해할 수 있게 말해주었고요. 내담자들에게는 명함을 주지 않았습니다. 제가 준비되는 시간에, 답장을 드릴 수 있으니 '상담 게시판'에 글 올리시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했지요. 그리고 밤이고 주말이고 전화가 오면 받아서 "밤이라 자야 한다." "주말이라 데이트 중이고, 옆에 연인이 있다"라는 것을 분명히 말했습니다. 나는 밤에 자는 '사람'이고, 누군가와 주말에는 데이트를 하는 개인 시간이 필요한 '한 개인'라는 것을 주지시키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점차 제가 한 개인이라고 인식되기 시작하면서 가까운 친구도 지인도 서서히 이런 말을 하기 시작했어요. "전엔 몰랐는데, 생각해 보니까 너는 진짜 힘들겠다. 넌 힘들면 누구한테 이야기해?"라고요. 드디어 '상담 자판기'가 아니라 '사람'으로 인지하기 시작한 거지요. 그리고 나니, 늘 제게 도움을 받으려고만 하던 그들이 저를 도우려 손을 내밀기 시작하더라고요.
이유엔 님, 유엔님도 사람입니다. 사람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돼요. 그리고 전문가가 아닙니다. 심지어 정신의학 전문의 도 자기가 힘들면 진료를 쉬고 휴진합니다. 그러고는 치료를 받거나 약을 받아먹어요. 그런데 휴진 없이 365일 주변인을 돌보기만 하는 NPC로 인식되어 있다면, 그것을 깨야 합니다. 나는 강하지 않다. 나는 사람이다. 나는 힘들다. 나는 도움이 필요하다. 학생에게도, 주변에도, 연인에게도 전하셔야 해요. 그들이 당황하고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치더라도 꾸준히요. 우리는 그 누구도 세상에 '아낌없이 주기 위해서'태어나지 않았으니까요. 우리도, 도움이 필요한 한 개인이니까요.
다음달 사연 미리보기
:: 길어진 무기력과 고립의 늪, 벗어나고 싶어요
다음 달 사연을 선공개합니다. 아마도 리커넥트를 읽고 남겨주신 독자분인 것 같은데요. 오랜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용기 내어 사연 주셨습니다. 여러분도 일일 상담가가 되어 답변을 남겨주세요. 응원, 위로, 공감, 조언 무엇이든 좋습니다. 답변 선정되신 분들은 다음 달 집단지성 상담소에서 소개합니다.
퇴사와 이별이 한 번에 몰려와서 잠시 주변과 연락을 끊고 잠적하듯 지냈습니다. 그런데 저도 모르게 점점 가라앉으면서 그 세월이 길어졌습니다. 3년 정도가 됐어요. 주변에 조금씩 돈을 빌리며 살다가 약 800만 원 정도의 빚도 생겼습니다. 나가서 이제는 벌어야 할 때라는 걸 아는데. 너무 오래 사람들과 교류도 없었고, 계속 무기력한 상태이고 약간 기력이 생기면 그 기력을 불안한 생각과 걱정을 하는데 다 써버리고 다시 무기력해집니다. 그래서 조금만 더 방에 있자라고 합리화하고 있을 때 보다 더 괴롭습니다. 나가야지 나가야지 하는데 못 나가니까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합니다. 스펙도 없고 경력도 너무 오래 단절돼서 그냥 막연하고 계획 없이하루하루 살기만 합니다.
by.익명 요청 님
익명 요청님의 고민에 아래의 버튼을 눌러 의견을 남겨주세요. 여러분의 한마디 한마디가 모여 집단지성 상담소의 소중한 지혜가 됩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삶에 따듯한 전환점이 됩니다.
컨트리뷰터 커뮤니티에 함께 해 주세요
월간 마음건강 컨트리뷰터로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컨트리뷰터 여러분들께 빠르고 정확하게 새 소식과 혜택을 전하기 위해 <오픈 카톡방> 형태의 컨트리뷰터 커뮤니티를 만들었습니다. 내 글을 매거진에 투고하는 것도, 오프라인 살롱을 안내 받고 신청하는 것도 앞으로 차차 공지용 오픈채팅방인 컨트리뷰터 커뮤니티에서 전해드리게 됩니다. 아직 함께하지 못한 분들께서는 아래의 버튼을 통해 함께 해주세요.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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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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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마음건강 뉴스레터
나아지지 않는다기 보다는 천천히 나아지고 있는 걸지도 몰라요. 제가 지난 두 권의 책을 쓰면서 사례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들었던 것은 생각보다 나는 천천히 나아지고 있었다는 거예요. 1년이 지나도 낫지 않는 게 아니라 1년보다 조금만 더 걸리는 치유의 시간일 뿐인거죠. 내가 그만큼 힘들었구나 알아봐 주는 것도 꼭 필요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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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누나
산소마스크 나부터 쓰기! 우리나라에서는 낯설기만 한 '나부터!'라는 단어에 조금 놀랬어요 뭐든 나부터 하면 이기적인 사람, 배려 없는 사람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강하잖아요 사회인식이 점점 더 성숙해지면서 무엇이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주는지 판단하게 되고 혹은 더 나은 결과가 아니더라도 '나'라는 사람을 내가 먼저 챙기는게 1번이 되고있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재열작가님의 이야기처럼 꼭 꾸준히 이유엔님을 알리고 도움이 요청하시기를 바래봅니다
월간 마음건강 뉴스레터
정말 산소 마스크 나부터 쓴다는 거 정말 큰 사고의 전환이지 않나요? 저도 이런 생각을 요즘 자주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일단 나부터 일단 나부터 이게 이기주의가 아니라 정말 멀리 갈 수 있는 걸음이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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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의 하루
전화로 힘들다는 이야기나 아예 죽겠다는 말이 걸려오다니... 저도 모르게 헉 소리를 냈어요. 저였으면 지금쯤 쓰러졌을 거 같아요. 어떻게 그 상황에서 단단하게 자신을 붙잡을 수 있으셨는지 놀랍습니다. 항상 많이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
월간 마음건강 뉴스레터
사연 보내주신 분도 결코 약한 분은 아님이 느껴지죠? 이 댓글 하나하나도 다 힘이 되어서 전해질 거예요. 소중한 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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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나
ㅠㅠ 다짜고짜 힘든 이야기를 하는 상황이 올 때 저의 상황도 여의치 않았을 때가 생각나요. 거절하는 법이나 선을 긋는 법을 몰라서, 어쩌면 그래 들어주기만 하는건데 하며 점점 지쳐갔던 기억이 나요. 늦게라도 이 글을 봐서 다행이네요. npc라는 표현이 와닿습니다. 누군가 제게 에너지를 교류할 수 있는 사람들과 만나라고 했는데 큰 환기가 된 표현이었어요. 재열님에게도 개인적인 만남에서 상쾌한 분들의 에너지를 많이 받으시면 좋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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