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편지
이불 속에서 나오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을 보니 겨울이 깊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뾰족한 바람에 코끝이 찡하고 눈물도 고이는 날들입니다. 구독자님도 이 겨울, 별일 없이 잘 지내고 계시지요? 아침에 몸을 움직이는 속도가 조금 느려지고, 따뜻한 음료를 찾는 횟수가 잦아졌습니다. 하루를 빽빽하게 쓰기보다는 조금 느슨하게 두고 지내고 있기도 하고요. 구독자님은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겨울의 한가운데에서, 무탈하시기를 바랍니다.

안단테의 그럴 수도 있는 생각 일기
기억과 추억의 경계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흐려집니다. 하지만 어떤 순간들은 이유 없이 남아 있기도 합니다. 무엇이었는지는 잘 떠오르지 않아도, 어떤 공기나 분위기만은 분명하게 남아 있는 것처럼요.
오래된 광고 카피 중에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는 문장이 있습니다. 2000년대 초반 카메라 브랜드의 광고였어요. 대학생 시기에 마주한 저 문장은 그때는 어쩐지 오글거리고 과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는 그 의미에 적잖이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았습니다. 기억이 기록에 의해 지배당한다기보다는, 기록은 기억의 정확성과 신뢰도를 높여주는 조건에 가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운동어플이나 휴대전화의 사진첩, SNS 같은 일상 기록부터 과제나 업무를 위한 메모, 각종 회의록 같은 업무 기록까지, 우리 일상에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기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록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기능합니다. 어떤 기록은 하루의 흐름을 정리해 주고, 어떤 기록은 사실을 정확히 남기며, 또 어떤 기록은 나중에 다시 꺼내보기 위한 단서로 존재합니다.
그런 면에서 기억은 ‘객관적으로 중요한 정보’에 가깝습니다. 언제였는지, 누구와 있었는지, 무엇을 했는지 같은 사실들은 지난 시간을 정리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때 기록은 기억이 흐려지지 않도록 곁에서 받쳐 줍니다.하지만 기억의 장면 안에는 ‘객관적 사실’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날의 온도와 습도, 창으로 스며들던 햇살, 순간적으로 감돌던 공기, 무심히 스친 향기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요소들은 사실 위에 자연스럽게 겹쳐지며, 하나의 순간에 또 다른 결을 더합니다.
그래서 어떤 시간은 정보로 기억되는 동시에, 온도를 지닌 추억으로 남기도 합니다. 기억과 추억의 경계는 짐짓 모호할지도 모르지만, 하나는 삶을 이해하게 하는 사실로, 다른 하나는 문득 마음을 움직이는 감각으로 머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추억을 불러오는 다양하고 소소한 요소들
추억은 사진이나 글처럼 남겨 둔 기록을 통해 떠오르기도 하지만, 다른 요소에서 불려 나오기도 합니다. 햇살의 각도나 피부에 닿는 공기의 온도와 습도, 오래전 즐겨 듣던 노래 한 소절이나 어떤 말투, 문득 스친 향기 같은 것들에서 말이지요. 이런 요소들은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추억으로 남아 있던 오래된 시간을 한순간에 데려옵니다.
첫 키스의 순간을 기억하시나요. 비슷한 계절의 공기나 장소를 만났을 때, 그때의 분위기가 수면 위로 떠오릅니다. 이런 기억은 기록으로 정리되기보다는 감각의 형태로 보관되어 있다가, 문득 다시 살아날 때 추억이 되는 것 같습니다.

처음 혼자 떠났던 여행의 밤도 그렇습니다. 어디에 갔는지 보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털썩 침대에 걸터앉던 순간, 창문을 열었을 때 느껴지던 공기, 낯선 풍경과 소음이 주던 간질 한 감각이 오래 남습니다. 그리고 종종 특별할 것 없는 순간도 추억이 됩니다. 햇살과 바람이 좋아하는 노래와 기막히게 어울리던 주말 오후, 우연히 들어간 카페에서 마신 커피의 향기 같은, 대단할 것 없는 일상의 조각들 말입니다.
이렇게 추억이 된 기억들에는 나만 아는 감각이 버무려져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사소한 장면일 수 있지만, 감각이 더해져 남을 때 그 기억은 추억이 되고, 언제든 다시 떠오를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추억은 찾는 것이 아니라 불려 나오는 것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애써 떠올리려 하지 않아도, 기록을 꺼내보지 않아도, 어떤 조건이 맞아떨어지는 순간 스스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예고 없이 나타나는 것처럼 말이지요.
일상이 넓혀주는 추억의 가능성
일상이 단출해진 것은 최근의 일은 아닙니다. 몇 해 전부터 적지 않은 것들을 비워왔고, 비워진 자리를 굳이 채우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 많은 일정이나 관계로 일상을 채우기보다, 지금의 크기를 유지하는 쪽을 선택해 왔다고 할까요?
이 선택은 삶을 줄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감당하고 소화할 수 있는 양이 달라졌다는 자각에 가깝습니다. 하루에 받아들일 수 있는 정보와 감정, 몸의 리듬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에 맞는 크기로 일상을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보니 비워진 자리는 의도적으로 남겨 두게 되더군요.
비슷한 결에서 건강에 대한 생각도 조금 달라졌습니다. 이제 건강은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체력이나 더 잘해내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다정함을 가능하게 하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몸이 무탈해야 주변을 살필 수 있고, 말 한마디를 고르는 여유도 생깁니다. 건강은 수단이 아니라, 관계와 감각을 지켜가는 균형이 되었습니다.

감당할 수 있는 양이 줄어들수록, 이미 쌓여 있는 것들에 대한 생각도 달라지더군요. 매일 더 새로운 것들이 들어와야 하니 오래된 것들은 당연히 비워줘야 한다고 여겼던 시기도 있었는데요. 새로운 기억을 계속해서 더하기보다, 지나온 시간 속에 남아 있는 추억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모든 것을 또렷하게 기억하지는 못해도, 그 시간들이 있었음을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로나 위안이 되는 일들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제는 기억보다 추억을 만들며 살고 싶어집니다. 무언가를 많이 남기기보다 나중에 떠올릴 수 있는 온도를 하나 더 얹는 삶입니다. 더 많은 것을 감당하려 애쓰지 않고 이미 지나온 시간에 감사할 수 있는 크기로 하루를 살아가는 일. 단출해진 일상은 그렇게 삶의 방향을 가만히 바꾸어 놓은 것 같습니다.
많이 기억하는 삶에서, 자주 미소 짓는 삶으로
더 많은 기억을 남기는 삶도 충분히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경험을 하고, 더 많은 것을 이루고 정리하며 쌓아나가는 삶. 아무나 할 수 없는 대단하고 멋진 일입니다. 다만 지금의 저는, 그보다 미소를 짓는 순간이 더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얼마나 이루었는지 보다, 하루를 지나며 몇 번쯤 웃게 되었는지가 더 오래 남습니다.
추억에 대한 기준도 비슷하게 달라졌습니다. 강렬한 순간이나 짜릿한 사건보다, 떠올렸을 때 마음이 편안해지는 장면이 좋습니다. 괜히 표정이 풀어지고, 다시 한번 그때로 돌아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기억을 모으기보다 추억을 만들며 살고 싶어집니다. 더 많은 기억을 쌓는 삶에서, 자주 미소 짓는 삶 쪽으로 방향을 잡고 걸어가려 합니다. 속없이 웃고만 있는 사람처럼 보일지라도, 그 정도면 충분히 괜찮은 삶일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요.
기억도 기록도 내내 필요하겠지만 미소 짓는 순간을 조금 더 중심에 두는 삶. 그게 인생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방향을 정하는 기준이 되어줄 거라고 믿어봅니다. 구독자님도 원하는 방향과 맞는 기준을 편안한 마음으로 찾아나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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