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콩의 조금 느린 서른 즈음의 일기
나의 초보운전 극복기
“멈추면 안 돼!”
면허 딴 지는 10년 차가 되어가지만 막상 운전은 많이 안 해서 여전히 초보운전인 나는, 종종 나의 운전 스승님인 아빠(운전 경력 n십 년, (내가 알기론 아마도) 무사고) 와 연습을 핑계로 주말에 차를 타고 나가곤 한다. 겁이 많아서 용기 있게 자주 끌고 나가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젠 혼자서 시내 운전도 조금씩은 하고, 고속도로나 주차도 잘은 아니더라도 기능은 하고 있어서 이제쯤은 하산해도 되려나, 했는데, 그날도 역시 작은 디테일들에 대한 지적이 이어졌다. (듣다 보면 주눅들긴 하지만 초보라서 디테일이 어설픈 건 사실인지라 어쨌든 감사한 수업이긴 하다)
그중 하나는 ‘너무 자주 브레이크를 밟는다'라는 것이었는데, 예를 들어 내가 가는 차선이 쭉 비어 있고 바로 옆 차선이 도로를 빠져나가려는 대기줄인 경우, 꼭 갑자기 튀어나오려는(잘못 대기줄로 들어왔거나 또는 기다리다가 그냥 다른 길로 가기 위해) 돌발 차량이 있곤 하다. 물론 정말로 튀어나와서 부딪힐 상황이라면 멈춰야겠지만, 그럴 낌새만 보여도(깜빡이를 켠다던가, 움찔한다던가) 아직 거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너무 쉽게 브레이크로 멈춰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미리미리 방어해야 안전한 거 아니냐 되물었더니, 아빠는 가고 있는 도로에서 갑자기 설 경우 뒤차도 놀라서 급정지해야 하고, 그건 그 자체로도 위험할뿐더러 결국 도로 전체에 정체를 만들 수 있다고 하셨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서는 대신, 처음부터 속도를 줄여서 천천히 가야 한다. 내가 미리 천천히 가기 시작하면 뒤차도 거기에 맞춰 속도를 줄일 것이고, 갑자기 튀어나오는 차량에 대해 안전하게 방어 운전을 하면서도 뒤쪽 정체를 만들지 않을 수 있다. 거기다 급정지로 인한 사고 위험도 줄일 수 있으니 모두가 안전해진다. 이 방법이 필요한 상황은 이 외에도 많다.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나와 도로가 합쳐질 때(차선이 합쳐지면서 옆 차와 순서 조율이 필요하다), 골목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초행길이라 어느 골목인지 정확히 모를 때(천천히 서행하면서 길을 찾아 들어가야 한다), 내가 제일 자신 없어 하는 바로 그 주차를 할 때(위치를 모르겠다며 서버리는 대신 천천히 밟으며 핸들을 부드럽게 돌려 조정해야 한다) 등등. 차를 운전할 땐 액셀(전진)과 브레이크(멈춤)만 있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그사이 하나가 더 있었던 것이다. 바로 ‘천천히 전진’이라는.
요즘엔 이 방법을 일상에서도 실천해 보고 있다. 특히 류마티스가 있는 내 경우 시기에 따라 무작위로 컨디션 차이가 큰 편인데, 체력이 좋을 땐 마구 달리다가 좋지 않을 땐 좌절하는 일이 많았다. 운전으로 보자면 뻥 뚫린 도로라며 액셀을 맘껏 밟다가 무언가 튀어나오면 급정거를 해버리는 식이다. 그렇다 보니 차, 즉 내 몸에도 충격과 무리가 갔고 그때마다 일상은 크게 흔들려 다시 회복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그나마 급정거라도 성공했으면 다행이지만, 해야 할 일들이 많아 바로 멈출 수 없는 경우엔 그야말로 연쇄 추돌 같은 큰 사고가 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전에 미리 서행을 준비하면 어떨까. 지금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다음 달 계획을 짤 때 100% 일정을 채우지 않고, 무리해서 내 능력 이상 일을 늘리지 않는다면. 물론 이렇게 하다 보면 너 그러다 뒤처져 굶어 죽을 거라고 내 또 다른 자아가 옆에서 통곡을 할 것이다. 하지만 대신, 아예 멈추지도 않으면 된다. 아무리 아프고 힘든 날이라 하더라도, 하루 24시간 중 활동하는 16~17시간을 몇 단위로 쪼개(나는 보통 3~4단위로 나눈다) 단 한 분위라도 생산성 있게 보내려 노력한다. 이렇게 하면 일상의 흐름을 깨지 않고 이어 나갈 수 있기 때문에 몸이 회복된 후 다시 돌아오기가 훨씬 수월해진다. 이게 바로 멈추지도, 과속하지도 않는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살아 나가는 삶의 방법이다.
20대에는 액셀과 브레이크를 배웠던 시기였다. 욕심껏 마구 달려보며 내가 어디까지 해낼 수 있나 시험해 보기도 하고, 그러다 어딘가 박고 다치고 나서야 멈춤의 중요성을 깨닫기도 했다. 30대가 된 지금은 그사이 어디쯤 천천히 달리기를 배우고 있다. 어느 날은 100M 달리기처럼 달리다가 또 갑자기 어느 날은 다 싫다며 때려치우는 것보단, 그냥 매일 천천히 조금씩이라도 나아가는 것이 길게 보았을 땐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빠는 늘 운전할 땐 멀리 보라고 하셨다. 평온하고 순탄해 보이는 도로라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위험 요소가 튀어나올지 모른다고. 그러려면 멀리서 공사를 하고 있다는 작은 표지판도 쉽게 넘기지 말고, 옆 차선 차량은 어떻게 달리고 있는지 관심 갖고 확인해야 한다. 목적지에는 빨리 도착하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그보단 애초에 ‘도착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중간에 사고가 나서 나 자신이 깨져버리고 나면, 도착지는 내가 가려던 그곳이 아니라 폐차장일 테니까. 그렇게 끊임없이 나와 내 주변을 살피며 때에 맞게 속도를 조절해 간다면, 1등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삶에 태운 나와 내 소중한 사람들을 안전하게 지켜내는 좋은 운전사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지금도 안전 운전을 늘 자부심처럼 여기시는- 우리 아빠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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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누나
작은콩님^^ 왜 이렇게 오랜만에 글을 만나는 기분일까요?ㅎㅎㅎㅎ 반가운 마음에 글도 휘리릭 읽어 내려갔네요^^ 마침 오늘 친구들과 우회전 시 보행 신호가 끝날 때 까지 정지했다가 지나가야 하는지? 아니면 보행자가 없다면 지나가도 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서 교통 흐름을 깨지 않는 선에서 '안전운전'하면 된다! 라고 말했었는데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를 우리의 인생과 연결해서 이야기해주셔서 더 공감됐어요😊 엑셀과 브레이크를 적당히 잘 조절하며 인생 운전을 잘 해나가 볼께요 오늘도 인생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를 던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작은콩
그러게요 사랑님! 오랜만인 것 같아요. ㅎㅎ 우회전 헷갈리죠 ㅜㅜ!! 저도 맨날 헷갈려서 핸드폰에 바뀐 법 저장해놓고 간간히 꺼내보곤 해요. ㅋㅋ항상 공감해주고 댓글도 정성스레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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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중요한건 도착하는거야'에 깊이 공감합니다. 지금 천천히 가더라도 난 완주가 목적이니깐의 마음으로 오늘도 살포시 한 걸음 내딛어봅니다. 저는 왕초보+운전트라우마+겁쟁이라서 그냥 운전 안하고 있는데 언젠가는 멋지게 운전하는게 목표랍니다. 그런 날이 꼭 올거라고 믿으며 심호흡하면서 때를 기다리고 있어요. 작은콩님 운전극복기 화이팅입니다!
작은콩
도로시님! 트라우마가 있으시다면 억지로 무리해서 할 필욘 없지요. 특히나 서울 같은 큰 도시에 사신다면 대중교통이 잘 되어 있기도 하고요. 운전은 잘못하면 나 포함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무서운 일이라고 늘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다만 인생 운전은 안한다는 선택지가 없으니^^ 같이 잘 배워보자구요.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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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나
아주 멈추거나, 아예 달리거나 그러다가 자주 탈이나곤 했는데... 오늘 작은콩님 글도 너무 좋아요. 천천히 전진이라는 마음으로 서행해야겠어요. 운전은 아직 못하지만 언젠가 운전하면 그렇게 조금씩 달려보고 싶네요ㅎㅎ 그리고 글을 읽다보니 예전에 베트남 갔을 때 길을 무서워서 못 건넜던 기억도 나요. 현지인 분들은 제 속도에 맞게 걸어가면 다가오는 오토바이, 차들도 알아서 피해가더라고요. 나만의 리듬은 어디서나 중요한가봐요.
작은콩
요즘 제 생각 멈춤기 같은 말이랍니다. 생각이 너무 많아지거나 불안해져서 막 뭐라도 해야겠다 다급해질 때, '천천히 전진'을 떠올리고 숨을 크게 쉬곤 합니다. 한나 님도 불안해질 때 한번 생각해보세요. 효과가 좋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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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나
아주 멈추거나, 아예 달리거나 그러다가 자주 탈이나곤 했는데... 오늘 작은콩님 글도 너무 좋아요. 천천히 전진이라는 마음으로 서행해야겠어요. 운전은 아직 못하지만 언젠가 운전하면 그렇게 조금씩 달려보고 싶네요ㅎㅎ 그리고 글을 읽다보니 예전에 베트남 갔을 때 길을 무서워서 못 건넜던 기억도 나요. 현지인 분들은 제 속도에 맞게 걸어가면 다가오는 오토바이, 차들도 알아서 피해가더라고요. 나만의 리듬은 어디서나 중요한가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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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캔두잇
가족 사이에서 운전 교육이 쉽지 않던데 ㅎㅎ 대단하신데요? 훈훈합니다. :)
작은콩
저는 대단할 게 없지만 ㅎㅎ 아빠가 많이 참아주셨던 것 같습니다.(저는 못할 것 같아요...) 훈훈하게 보아 주셔서 감사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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