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Ohin mos diak ona ~
어느새 새로운 것들보다는 익숙한 것들이 보이는 동티모르에서 스물 세번째 조각을 보내요.
아이들의 천사같은 목소리로 옥상달빛의 "수고했어 오늘도"라는 노래를 듣던 시간 속, "수고했어 오늘도"라는 문장을 번역한 "Ohin mos diak ona~" 한마디에 묘한 위로가 스며드는 날입니다. 딜리의 거친 햇살 아래서 저마다의 속도로 치열하게 하루를 버텨낸 서로에게, 그리고 분주한 발걸음으로 이 땅을 누비는 나 자신에게 가장 건네고 싶었던 말이지요.
이번 주는 참 신기하게도, 그 다정한 위로의 모습처럼 온전한 '사랑'들을 돌려받는 시간들이었어요. 초등학교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마다 손바닥을 마주하며 환하게 웃어주는 아이들의 무조건적인 눈빛 속에서, 모비씨의 푸른 숲길을 걸으며 이 따스한 마음을 세상에 더 널리 나누며 살아가겠다고 묵묵히 다짐했던 순간 속에서. 그리고 어쩌다 마주한 영화 한 편을 통해 타인을 향한 사랑의 결을 더듬어가다, 문득 오래전 상처받고 서툴렀던 어린 시절의 나 자신까지 가만히 토닥여주게 되던 기적 같은 시간까지요.
이해를 지나 마침내 도달한 이 계절의 끝에서, 마음의 방 한쪽을 온통 사랑으로 가득 채워주던 일상의 조각들을 조용히 꺼내어 봅니다. 제가 찾은 이 사랑의 조각들을, 함께 사랑해보시겠어요?
🚸 아이들의 품에서 배우는 사랑 : 바라고 재지 않는 온기
동티모르에서 보낸 시간이 저와 비슷한, 동기 같은 봉사단원 선생님이 근무하시는 초등학교의 동아리 활동에 가게 되었어요. 함께 학교로 걸어가는 길, 머릿속에는 질문 하나뿐이었지요. '오늘은 이 아이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그렇지만, 학교 교문을 들어서기 전부터 잔뜩 모인 아이들 사이로 지나갈 때 작은 손바닥들이 먼저 날아왔어요. 마주치는 손바닥들 틈으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는 아이들의 미소와 함께 제 손은 꼭 쥐어지는 기분이 들었고요. 서툰 테툼어 발음으로 인사를 건네는 한국인 선생님과, 서툰 발음의 한국어로 인사를 건네는 티모르 아이들. 이보다 더 따스하고 재미있는 광경이 있을까요.
수줍어하는 아이들은 저와 눈이 마주치면 활짝 웃고는 고개를 푹 숙였지만, 그러고도 제 곁을 떠나지 않았어요. 의자를 끌어다 앉을 자리를 마련해주거나, 교실에 놓을 책장을 위해 치수를 재고 있는 저를 도와주는 따스한 행동들에서 사랑을 느낄 수 있었어요. 말수는 적어도, 가까이 있는 것으로 챙기는 아이들이었어요. 심지어 그날 저는 선크림만 바른 화장기 없는 얼굴이었는데요. 그런데 아이들은 다가와 저를 보더니 "선생님, Bonita loos! (예쁘다)" 하고 말했어요. 이 칭찬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어요. 활동하다 말고 하나둘 다가와서 또 말해 주었고, 맨얼굴로 받은 평가치고는 너무 후한 하루였지요. 속으로는 이렇게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아도 될까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아이들은 제가 무엇을 가져왔는지 묻지 않았어요. 줄 수 있는 사람인지 재어 보지도 않았고요. 재고 있었던 건 오히려 저였습니다. 어떻게 보일지, 무엇을 건넬 수 있을지를 셈하며 들어간 교실에서 저는, 꾸미지 않은 얼굴에도, 아직 아무것도 건네지 않은 손에도 먼저 사랑이 도착할 수 있다는 걸 아이들의 작은 사랑을 통해 배웠어요.
🥦 음식을 통해, 사람을 통해, 자연을 통해
주말 아침,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3시간쯤 차로 올라 모비씨에 도착했어요. 함께 간 사람들이 모두 둘러앉아 도시락 뚜껑을 열었지요. 각 집에서 싸 오신 김밥들과 맛있는 김치전, 치킨 너겟과 달콤한 치즈케이크까지. 추석이 없는 티모르에서 명절 분위기를 내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함께 모여 나누는 음식과 이야기는 명절의 가족 분위기를 충분히 느끼게 해 주었어요. 서로에게 김밥을 나누어주고, 각자가 싸온 디저트와 과일까지 풍성하게 나누는 모습에서 가족의 사랑을 느끼기도 했답니다. 가족과 떨어져 있는 이 머나먼 땅에서, 마치 하나의 가족이 더 생긴 것 같아요.
그 자리의 얼굴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어요. 굽이진 산길 3시간을 내내 운전해 주신 사랑과, 모임에서 친해져 명절 음식을 함께 나눈 UN 선생님들의 사랑. 그리고 저녁이면 한집에 모여 춤 연습을 하는 사랑스러운 사람들. 만나기만해도 웃음이 절로 지어지고 조금은 외로운 타지에서 외로움을 느끼지 않도록 해준 소중한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생각보다 훨씬 많은 좋은 사람들 곁에서 살고 있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모비씨의 숲길에서는 "이 티모르에 이런 꽃과 식물들이 있었어?" 싶을 만큼 다양한 초록이 이어졌어요. 데이지부터 예쁜 등나무처럼 생긴 꽃까지. 정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다채로운 자연들에 저절로 행복해졌어요. 또 높은 해발고도에서 불어오는, 오랜만에 만나는 시원한 바람도 있었는데요. 티모르에서 느끼기 정말 어려운 이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얼마나 커다란 여유가 되어주는지 몰라요. 바람은 누가 왔는지도, 얼마나 머물지도 재지 않고 그저 불어왔어요. 이렇게나 대가 없는 사랑이 또 있을까 싶었지요. 그렇게 받은 만큼, 아니 받은 것보다 조금 더 널리 나누며 살고 싶어졌어요.
🎬 조금 더 뻔뻔하게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 : 서툴러도 괜찮아
딜리 국제 영화제가 열려, 친한 한인 선생님들과 함께 일본 다큐멘터리 "BEYOND"를 보러 갔어요. 동티모르 청각장애인 배드민턴 선수들이 일본의 도움을 받아 작년 도쿄 데플림픽에 나가기까지의 이야기였지요. 결국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한 선수들이 응원해준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볼 때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요.
그 장면을 보며 어린날의 제가 떠올랐어요. 배드민턴을 했던 중학교 시절, 그 이후로 공부를 해왔던 날들과, 어쩔 수 없이 나의 무언가가 재단되고 평가받는 것처럼 느껴졌던 그 날들이요. 잘해야 한다는 마음,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 그게 너무 오랫동안 어린 제게 사랑이 오가는 길목을 막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었어요. 조금만 더 당당하고 뻔뻔하게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더 많은 사랑을 바라볼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하며 말이에요.
"뻔뻔한 사랑"이라는 단어에 길을 터 준 건 이번 주에 만난 두 장면이었어요. "사랑"이라는 뜻의 HADOMI를 적어 놓았던 선생님의 생일파티에서는 복작복작한 사랑을 발견했고요. 퇴근 후 혼자 바닷가에 앉아 마신 백차 한 잔은 재지도 않고 미지근한 물로 얼렁뚱땅 우린 차였지만, 거기서 저는 스스로를 향한 사랑을 느꼈어요.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일이 아니라 그저 주어지는 사랑을 뻔뻔하게 잘 받아내는 자세가 아닐까요?
처음에 "함께 사랑해 보시겠어요?" 하고 물어보았지요. 이번 주를 지나고 보니, 사랑하는 일의 첫걸음은 건네는 쪽이 아니라 받는 쪽에 있었어요. 무엇을 줄 수 있을지 셈하며 들어선 교실에서, 저는 먼저 날아온 작은 손바닥들 앞에서 아무것도 건네지 못했는데도 이미 가득 받고 있었으니까요.
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날을 기다리지 않아도 괜찮았어요. 잘하지 못한 날에도, 맨얼굴인 날에도, 미지근한 물로 얼렁뚱땅 차를 우린 날에도 사랑은 이미 도착해 있었으니까요. 우리가 할 일은 어쩌면 그 앞에서 손바닥을 한 번 활짝 펴 보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혹시 오늘 하루가 유난히 길었다면, 잘해내야 한다는 마음은 잠깐 내려놓고 쉬어 가요. 손 닿는 곳의 미지근한 물 한 잔이어도, 누군가 건넨 인사 한마디여도 좋아요. 그걸 그냥, 받아 주세요. 그리고 오늘도 저마다의 자리에서 사랑을 건네온 여러분께, 오프닝에서 들려드렸던 그 말을 다시 건넬게요.
Ohin mos diak ona~ (수고했어, 오늘도 ~)
받는 일도 건네는 일도 서툴러도 괜찮다고, 이번 호가 사랑으로 여러분의 마음 한구석에 가만히 놓이길 바라며 진심으로 응원해요!
서툴게 건네고 뻔뻔하게 받아내는 동티모르의 사랑을 담아, 하영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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