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ee malu ho domin.
발리에서 잔뜩 느낀 쉼의 여운을 뒤로하고, 다시 일상의 출발선에 선 한 주. 휴가의 달콤함에서 벗어나 마주한 일상은 참 신기하게도 저마다의 얼굴로 저를 반겨주었습니다. 웃기게도 이전까지 저만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 티모르라는 땅이, 어쩌면 저와 함께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시간들이었어요.
Haree(하레)는 바라본다는 테툼어입니다. 그 뒤에 malu(말루)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는 뜻이 되어요. 일방적이 아닌, 쌍방향의 소통이 되는 것입니다. ho domin(호 도민)은 with love라는 뜻이에요. 즉, 맨 위의 문장은 서로를 사랑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로맨틱한 문장입니다.
이 문장을 티모르에 오자마자 느끼게 되었어요. 아따우로섬의 뜨거운 햇살 아래서 만난 아이들의 맑고 순수한 눈동자, 둘로스호프의 공간 속에서 기분 좋은 위로를 건네던 다양한 사람들과 책들, 그리고 긴 여행 끝에 마주한 딜리의 석양에서 '아, 여기가 나의 comfort zone이구나' 하고 안도감처럼 스며들던 평안함까지.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매 순간 낯선 것들과, 또 그리웠던 것들과 다정하게 눈을 맞추는 일의 연속이 아닐까요? 피하지 않고 기꺼이 품에 안으며 마주했던 그 모든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저를 더 단단하고 따스한 사람으로 빚어내고 있나 봅니다.
이번 주에는 발걸음마다 마주쳤던 반가운 얼굴과 온기들을 여러분의 손바닥 위에도 조용히 얹어드릴게요. 지나치는 모든 장면에 마음을 다해 눈을 마주하는 이곳에서, 오늘의 조각들을 꺼내어 봅니다.
🌅 '발리'와 '딜리', 그 한 글자 차이가 건네는 안도감

발리의 푸른 바다와 이국적인 풍경 속에서 꿀 같은 쉼을 누리고 돌아온 날, 신기하게도 비행기에서 내려 딜리의 땅을 밟자마자 마음 한구석에서 거대한 숨이 탁 트이는 것을 느꼈습니다. 발리에서는 아무리 아름다운 파도가 밀려와도 문득문득 낯섦과 긴장이 발목을 잡곤 했습니다. 혹시나 의사소통이 매끄럽게 통하지 않을까 긴장하던 마음, 낯선 시선들 속에서 은근히 에너지를 소모하며 완벽한 해방감을 온전히 누리지 못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묘하게도 '발리'에서 한 글자만 바뀐 '딜리'로 돌아오는 순간, 거짓말처럼 모든 긴장이 사르르 녹아내렸습니다.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딜리의 붉은 석양을 바라보며 깨달았습니다. 언어가 조금 서툴러도 괜찮고, 거칠고 투박한 흙먼지 날리는 풍경일지라도, 이곳은 이제 저만의 호흡이 스며들어 있는 소중한 터전이자 가장 안전한 품이라는 것을요. 그렇게 느끼고 나니, 어쩌면 나만 이 딜리를 편안하게 느끼는 것이 아닌 이 딜리라는 땅도 저를 편안하게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어요. 일방적인 끈이 아닌, 서로를 엮은 끈이 느껴지는 순간이랄까요.
아무런 방어막 없이 마음을 툭 내려놓아도 누군가 나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아, 내가 진짜 집에 돌아왔구나' 하고 깊은 안도감이 밀려오던 그 저녁. 낯선 이방인임에도 온전한 '나'로서 숨 쉴 수 있는 이곳이, 저에게 얼마나 소중한 Safe zone이 되었는지 새삼 실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 우리를 기억해 주는 아이들과 눈을 맞추며

휴가가 끝나고 바로 딜리의 따스한 품을 잠시 떠나 건너간 아따우로섬. 바다를 품은 그곳에서 마주한 가장 큰 선물은, 낯선 이방인인 우리를 먼저 알아보고 와락 품에 안겨오는 아이들이었습니다. 더운 비켈리 마을에서 바닷가로 걸음을 옮기는 우리를 향해 "하바나~!" 하고 소리치며 달려오는 아이들. 지난번의 기억을 고스란히 담은 눈망울로 손을 덥석 잡고 바닷가로 이끄는 통에, 고단했던 마음의 결은 어느새 사르르 녹아내리곤 했어요.
아이들과 함께 파도가 밀려오는 모래사장 위를 뛰놀며 야외 활동을 하던 그 시간, 문득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무엇인가 대단한 것을 가르쳐주러 온 게 아니라, 거창한 언어 없이도 진심 어린 눈빛을 마주하는 법을 오히려 그 아이들에게 덤으로 배워가고 있다는 것을요. 맑고 깊은 아이들의 눈동자 속에서 저를 비춰보며, 서로의 존재를 온전히 알아보아 주는 것만으로도 삶이 얼마나 충만해지는지 실감했습니다. 특히 그저 비닐봉지에 쓰레기를 담는 플로깅 활동임에도, 공을 주고받는 활동임에도 그 작은 기쁨으로 환해지는 아이들의 표정은 마치 제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듯 했어요.
아따우로의 눈부신 햇살 아래,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깊어지던 그 다정한 마주침은 오래도록 제 마음속에 푸른 파도로 남을 것 같아요. 아이들과 눈을 마주할 수 있는 순간들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생각할 때마다 이별이 두렵기도 하지만, 남은 이 기간을 더 함께 웃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도 되어요.
📚 둘로스 호프에서 만난 책과 사람들, 그리고 기분 좋은 위로
발리에서 돌아오자마자 발걸음이 머문 또 하나의 소중한 장소는 바로 '둘로스 호프(Doulos Hope)'였습니다. 둘로스 호프는 커다란 카지노 선박을 개조해 기독교 선교사들이 배를 타고 다양한 나라를 방문하며 그 나라의 언어로 된 책과 영어원서를 판매하는 형태의 프로그램을 가진 곳인데요. 올해 초에 이어 또 동티모르를 방문했다는 소식에 바쁘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르듯 찾아간 그곳은, 저마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하는 평화로운 공간이었습니다.
책장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는 따스한 책들을 펼쳐 들고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마치 지친 마음을 다독여주는 오랜 친구의 목소리를 마주한 것처럼 기분 좋은 위로가 차올랐지요. 말 한마디 깊게 섞지 않아도 서로의 존재만으로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들, 그리고 마음을 묵직하게 두드리는 좋은 책들 속에서 저는 또 다른 형태의 '마주함'을 배웠습니다. 책이 귀한 이 나라에서 책을 구경하기 위해 배에 가득 모인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위해 묵묵히 서 있는 둘로스 호프의 봉사자들까지도. 누군가를 거창하게 가르치거나 이끌어가지 않아도, 같은 공간에서 호흡하며 서로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것. 그 조용하지만 확실한 온기 덕분에, 딜리에서의 일상이 한층 더 풍성하고 다채로운 채널로 확장되는 기분이었습니다.
특별히 영어로 된 책을 늘 읽고 싶어했던 티모르 친구와 함께 가서였을까요. 아니면 이 배를 나오며 두 손 가득 책을 들고 나와서였을까요. 더욱 즐겁게 이토록 서로 다른 얼굴과 모양으로 저를 환대해 주는 인연들을 마주할 때마다, 제가 이곳 동티모르에서 얼마나 많은 사랑을 건네받고 있는지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일상 속 마주치는 모든 낯선 결들과 따스한 눈을 맞출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가끔은 낯선 시선에 움츠러들거나, 마음의 여유가 없어 지나치는 얼굴들을 놓쳐버릴 때도 오겠지요.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내가 바라보는 것만큼, 나와 눈을 마주하고 싶어하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기로 다짐해요. 우리가 서로의 눈빛을 기꺼이 마주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볼 때, 이 거친 땅 위에서도 우리는 언제나 서로의 집이 되어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요.
여러분은 오늘, 어떤 얼굴들과 다정하게 눈을 마주하고 계신가요?
잠깐 마음을 가다듬고 다양한 마음들과 눈을 맞추어보아요. 흩어져 있던 일상의 조각들을 모아 온도를 섞어가는 그 다정한 마주침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이 커다란 세계 속에서 단단히 연결되어 있을지도 몰라요. 잠깐의 가을바람 아래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오늘을 마주해 내고 있는 여러분의 모든 순간을 진심으로 응원해요!
서로의 눈을 마주하게 되는 동티모르의 사랑을 담아, 하영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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