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vita e bella!

아는 사람 <from 쭘마인밀란>

11월 둘째 주 금요일, 밀라노에서 보내는 편지

2023.11.10 | 조회 2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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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zumma in Milan

밀라노에 입성한 한국 아줌마의 유쾌한 생활밀착형 밀라노 이야기

2023. 11. 10
2023. 11. 10

갑자기 비가 내렸습니다. 우산이 없었어요. 고민하다 그냥 비를 맞고 걸었습니다. 학교에서 나온 아이들에게도 우산이 없었어요. 우리는 그냥 비를 맞으며 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별로 걱정되거나 슬프지 않았어요. 

아이들을 먼저 집으로 보내고, 저는 집 근처 마트에 갔습니다. 과일과 과자, 소고기와 달걀 그리고 맥주를 바구니에 담았습니다. 

한쪽에 우산이 진열되어 있었어요. 집에 있는 고장 난 우산들이 떠올랐어요. 아이들이 좋아하는 색깔로, 보라색과 검정색 우산으로 골라 담았어요. 

계산을 하는데 아저씨가 갑자기 컴퓨터 화면을 가리킵니다. 우산 하나에 15유로.... 이거 진짜 살 거냐고 묻는 것 같았어요. 저는 너무 놀라서, 아니라고 안 사겠다고 했어요. 

아저씨가 갑자기 자기를 따라 오래요. 계산을 하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 우산 코너로 가더니 우산을 막 고릅니다. 그리곤 더 저렴한 우산을 보여주었어요. 저건 프리미엄이라 비싸고, 이게 평범한 우산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아저씨에게 너무 고맙다고 말하며 저렴한 우산 2개를 짚어들었습니다. 

생각보다 장바구니가 너무 무거워서 우산을 펼 수가 없었어요. 

저는 새로 산 우산을 바구니에 넣고 비를 맞으며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11월의 어느 날, 밀라노에서. 

 

일을 끝내고 사무실에서 나오는데 가을의 햇살이 눈부셨다. 차가운 바람과 다르게 내려앉은 따뜻한 햇살에 문득 언니가 생각났다. 나는 보이스 톡으로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밀라노는 점심시간이었지만, 한국은 저녁 시간이었다. 아마도 저녁을 먹고 한숨 돌리는 시간일 것이다. 

"량아, 웬일이야?"

언니는 언제나 나를 량이라고 부른다. 20년 전에도 그랬고, 아줌마가 된 지금도 그렇다. 언니가 "량아~"라고 나를 부르면 나는 20대로 돌아가는 기분이 든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말을 나누었다. 병원에서 일하느라 햇빛을 못 보고 산다는 언니에게 지금 내리쬐는 밀라노의 햇빛을 전했다. 

"전화해 줘서 고마워~ 가까이 살아도 전화  한 번 안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넌 제일 멀리 사는데 제일 연락을 자주 하네. 고맙다." 

언니의 이 말이 왜 이렇게 씁쓸한 걸까.... 

 

내 카톡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그중 절반은 해외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네팔에서 만난 사람, 치타공에서 만난 사람, 다카에서 만난 사람, 뭄바이에서 만난 사람, 뉴델리에서 만난 사람, 밀라노에서 만난 사람. 

하지만 여전히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들은 얼마 없다. 

가까이 살 때는 자주 연락을 하고, 만났을지라도 나라가 바뀌고 멀어지면 연락도 뜸해진다. 그나마 sns를 한다면 서로의 일상을 엿볼 수 있긴 하지만. 

 

만나거나 연락을 주고받진 않지만, 내 카톡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삭제하기엔 왠지 내 자신이 매정하게 느껴져서 그냥 남겨두는 사람들. 

"아는 사람"이다. 

한때는 아는 사람이 참 많았다. 한번 본 사람의 얼굴을 잘 기억했고, 사람들의 이름도 잘 기억했다. 이렇게 저렇게 아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별로 없다. 얼굴도 잘 기억하지 못하고, 이름도 모른다. 교회에서 만난 사람들 중 이름을 아는 사람도 얼마 안 된다. 나는 점점 더 무시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사실 나는 원래부터 무심한 성격이다. 살갑지도 않고, 애교도 없다. 엄마에게도 잘 전화하지 않고, 가족들에게 자주 안부를 묻지도 않는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일을 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아는 사람이 한 명 두 명 모르는 사람으로 되어가는 걸 목도한다.

 

"오늘 아침 커피 마실 사람?"

아시아 엄마들 그룹 채팅 창에 메시지가 떴다. 언제나 활발하고 유쾌한 멘디다. 

"나 갈 수 있어."

"나도 갈게. 이따 봐."

다른 친구들이 하나, 둘 합류하겠다고 메시지를 보낸다. 

"미안해. 난 오늘 사무실에 가는 날이야. 근데 8시부터 20분까지 커피 마실 수 있어."

큰아이는 7시 50분에, 둘째는 8시 20분에 학교에 간다. 큰아이가 학교에 가고 나면 나와 남편은 학교 앞에서 교문이 열릴 때까지 둘째와 함께 차에서 기다린다. 

"나도 그 시간에 가능해. 우리 큰애도 8시까지 가니까."

"나도 8시에 갈게. 그때 만나." 

멘디와 나오꼬가 메시지를 보냈다. 

8시에 학교에 가니 호아도 나와 있다. 다들 일찍 학교에 가는 중학생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다. 우리는 바에 가서 카푸치노를 주문했다. 

"내가 사줄게. 그동안 내가 계속 못 나왔잖아."

나오꼬가 커피값을 계산하며 말했다. 

"어머, 고마워. 다음엔 내가 살게."

나는 나오꼬의 배려를 마다하지 않고 낼름 카푸치노를 얻어 마셨다. 

테이블에 앉아 아이들 이야기와 학교 이야기, 방학 동안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 먼저 일어날게. 남편이 기다려서."

나는 그녀들을 남겨두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쏘냐, 오랜만에 커피 함께 마셔서 너무 좋았어. 다음에도 우리 일찍 만나자."

멘디가 진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그녀들에게 손을 크게 흔들면서 자리를 떴다. 

 

아는 사람이란 뭘까? 

안부를 묻지 않아도 서운하지 않고, 어쩌다 안부를 물으면 반갑게 인사 나눌 수 있는 사람.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사람. 

나에겐 이런 아는 사람들이 있다. 

 

1년 넘게 연락하지 않았지만, 카카오톡에서 삭제를 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아이들 옷을 사러 갔다가 큰 아이의 콤파스를 사려고 바로 옆에 있는 문구점에 들렀다. 그런데 콤파스가 없어서 내가 쓸 다이어리를 샀다. 밀라노에서 두 번째로 사는 다이어리였다. 

쇼핑몰을 나오니 아저씨들이 크리스마스 마켓 준비를 하고 있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공간에 작은 나무집들을 설치하고, 천장엔 반짝이는 전구를 달고 있었다. 아직 12월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연말을 준비하고 있었다.

올해가 정말 빨리 지나가 버렸다. 쏜살같다고 해야 하나? 

그 나이의 속도로 시간이 흐른다고 하던데, 그 말을 실감한다. 요즘 나의 시간이 시속 44로 달려가고 있다. 

연말이 다가오니, 그동안 무얼 했는지 나를 되돌아본다. 바쁘긴 했는데 딱히 해 놓은 건 없는 것 같은 느낌. 너무 분주해서 진짜 해야 할 것은 놓쳐버린 것 같은 느낌. 

작년 11월에 책이 출간되었고, 출간과 함께 열심히 홍보와 마케팅을 했고, 글쓰기 모임을 하고, 독서 모임을 하다 보니 1년이 지나버렸다. 

나는 다시 책이 쓰고 싶어서 샤브작 거린다. 책을 먼저 써달라는 곳이 없어서 이번에도  "내 글로 책을 좀 만들어 보시죠" 하고 구걸을 해야 하는 입장이지만. 

괜찮다. 언젠간 나도 좀 더 잘 나가는 작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보다 좀 더 잘 나가는 작가가 되려면, 진짜 지금보다 더 더 열심히 써야겠다. 

 

샤워를 하며 나의 맨몸을 보다가 언젠가 유명해져 있을 나를 상상했다. 

내 얼굴이 붙은 신간이 교보문고 전광판에 떡하니 붙어있는 상상. 사인회를 하는 상상, 인터뷰를 하는 상상. 

섹시한 내 몸을 상상하다 흐르는 물에 씻겨 드러난 나의 맨몸을 바라보며,

잘나가는 작가에서 무명의 작가로 돌아왔다. 

몸의 물기를 닦다가 욕실 바닥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발견했다. 옷도 입지 않고 걸레로 바닥을 닦으며 나의 현실을 자각했다. 

 

나의 연말은 행복해야 한다. 행복할 것이다. 부디 행복하기를.... 

새로 산 다이어리에 주문 같은 기도를 쓰며 나의 연말을 기대했다. 

 

곧 있으면 마흔다섯이 된다. 마흔다섯엔 마흔넷보다 더 잘 쓰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9월에 시작했던 나만시 인생그림책에세이 세 번째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나만시 인생그림책에세이는 그림책 스토리텔러들의 인생 그림책 4개를 자신의 삶에 빗대어 쓴 에세이에요. 저는 이들에게 강의도 하고, 피드백도 하고, 편집도 하면서 책을 만듭니다. 

책의 표지는 일본에 계신 정아 작가님께서 만들어주셨어요. 

 

책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처음엔 다들 내 이름이 쓰여진 책을 만들고 싶다는 소망으로 시작해요. 하지만 책을 출간하기 직전, 두려움을 느낍니다. 독자들이 내 이야기를 읽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내 이야기가 과연 재미 있을지 걱정을 하는 것이죠. 그 두려움을 이겨내야 내 글이 책이 될 수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여러 번 내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었는데요, 그 경험들 덕분에 마음이 더욱 단단해진 것 같아요. 

 

이번 책에도 제 편집후기를 삽입했습니다. 

쭘마인밀란 독자님들께 편집 후기 내용을 살짝 공개합니다. 

감사합니다. 


인생그림책에세이의 의미

 

봄부터 시작한 인생그림책에세이와의 인연이 가을까지 이어졌다. 올해의 시작과 끝을 작가님들의 감동적인 인생 이야기와 함께 할 수 있어서 참 감사하다. 내 인생만 살고, 내 글만 쓰던, 그냥 작가이기만 했던 내가 작가님들의 인생을 들여다보며 편집하다 보니, 어느새 편집자가 되어 있었다.

나는 두 아이의 엄마이다. 모든 엄마들의 일이 그렇듯, 티 나지 않지만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다. 겹겹이 쌓인 엄마와 아내의 일상 틈틈이 편집자로서의 일을 한다. 안방 문을 굳게 닫고, 노트북 앞에 앉아 아홉 개의 이야기를 다듬었다. 엄마와 아내, 작가와 편집자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책을 만들었다.

이제 일해야지~~ ~ 신난다~”

집안일을 마치고 소리를 지르며 안방으로 들어가는 나를 아이들이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엄마, 일하러 가는데 왜 좋아해? 싫어해야 하는 거 아니야? 엄마 이상해.”

이 일은 엄마가 좋아서 하는 일이거든.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니까.”

좋아서 하는 일은, 그게 무엇이든지 신나는 일이 아닐까?

 

인생그림책에세이 과정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처음 써보는 분들은 많이 힘들어한다. 어디서부터 써야 할지 난감해하고, 어디까지 써야 할지 고민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은 바로, ‘나의 이야기가 과연 읽을 만한 책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자기 의심이다. 이때 필요한 건, “가장 평범한 이야기가 가장 공감 가는 이야기라는 에세이의 의미를 알려드리는 것이었다.

책을 기획하고, 강의를 하고, 편집을 하지만 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작가님들의 마음에 자기 의심을 거두고 자기 확신을 심어주는 일이었다.

 

인생그림책에세이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림책이 좋아서 시작했지만 결국 여기까지 오신 작가님들 각자가 찾아내야 할 숙제인 것 같다.

나만시 인생그림책에세이의 첫 독자인 나는 이미 그 의미를 알 것 같다. 나는 이 책을 만들며 반짝이는 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선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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