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부터 아이들이 방학이다. 뜬금없이 왜 방학이냐고? 우리가 학교가 원래 좀 그렇다. 두 달 공부하고, 2주 쉬고, 또 두 달 공부하고 2주 쉬고.... 그때마다 다른 가족들은 여행을 가지만, 우리는 한국 회사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므로, 이번에도 집콕을 선택했다.
일주일 내내 비가 온다. 그러다 갑자기 쨍~하고 해가 난다. 저 멀리 알프스 설산이 보인다. 차가운 바람과 온화한 햇살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잠시 눈을 감고 이 시간을 마음에 새긴다. 다시 비가 부슬거리며 내리기 시작한다. 머리와 어깨에 내려앉은 부슬비를 가볍게 털어낸다. 그 손길이 마치 나를 토닥이는 것 같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중에 비가 갑자기 많이 내리기 시작했다. 베란다에 널어 둔 빨래가 생각이 났다. 집에서 뒹굴거리고 있을 아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지안아, 비가 많이 오네. 빨래 좀 거실로 들여놔 줘."
"이미 했어."
"잘했네."
아이가 언제 이렇게 커버린 거지? 시키지도 않은 집안일을 알아서 판단하고 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이렇게 스스로 잘하는 아이에게 학교 숙제 좀 미리미리 하라고 잔소리를 했으니....
오전에 일을 끝내고 밀라노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사무실을 나왔다. 비가 아직도 많이 내리고 있었다. 그때 남편이 버스 정류장까지 태워주겠다고 따라 나섰다. 나를 배려하는 그의 행동을 거절하지 않았다. 비가 내려서인지 기분까지 차분하게 가라 앉았다. 버스정류장까지 가는 내내 침묵을 지키며 그가 하는 말을 흘려 들었다.
정류장에 내려 밀라노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차가운 바람이 휭~하고 불어와 내 옷깃을 흔들었다. 아직 가을 같았는데, 바람 하나로 겨울을 느꼈다. 남편이 군밤 장수 같다고 놀린 하늘색 비니를 가방에서 꺼내 푹 눌러 썼다. 밀라노에서 사는 것 중에 가장 좋은 점은 바로, 남들 눈치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내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모자를 쓰고, 어떤 신발을 신든 아무도 관심 보이지 않는다. 난 이런 무관심이 좋다.
프랑스 사람들처럼 보이는 가족이 정류장 앞을 지나간다. 엄마와 아빠가 한 손에 우산을 꼭 쥐고, 두 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간다. 5살즘 돼 보이는 아이가 지나가다 말고 날 쳐다본다. 그 아이는 날 왜 쳐다봤을까? 군밤 장수 같은 모자 때문에? 아니면 동양인을 여기서 처음 봐서?
나는 지나가는 아이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건 '어쩌라고' 표정과도 조금 닮은 미소였다.
내가 타야 할 버스가 도착했다. 사무실이 있는 레냐노(Legnano)에서 밀라노로 가는 시외버스는 꽤 깨끗하다. 승객도 많지 않아서 널널하다.
처음에 그 버스를 탔을 때, 버스 카드를 어떻게 태그해야 하는지 몰라 한참을 맸다. 밀라노의 버스와는 조금 달랐기 때문이었다.
처음은 언제나 이렇다. 헤매고, 당황하고, 고민하다 보면 어느새 처음을 지나 경험으로 향한다.
자연스럽게 버스를 타고, 나른하게 졸다가 내가 내려야 할 곳에 도착하면 버튼을 누른다. 버스에서 내려 신호등을 건너고, 건널목을 건너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사람들의 뒤를 따라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철을 탄다. 다시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버스를 한 번 더 타고 내린다.
집 근처 마트에 들려 아이들 간식과 저녁거리를 산다. 거기에 내가 마실 와인도 한 병 샀다. 두 손 무겁게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배시시 웃음이 난다.
내가 이곳에 물든 지도 모르게 스며들었다.
가을이 온 지도 모르게 가고 있다.
이러다 온 지도 모르게 겨울이 올 것만 같다. 하지만 난 반전이 있는 밀라노를 믿는다. 다음주엔 아이들이 개학을 하니, 부디 날이 좋아지기를.
햇살 아래에서 낙엽을 머리 위로 힘껏 던지며 지나가는 가을을 붙잡을 수 있기를 바랐다.
가을과 겨울의 경계에서 나는 여전히 글을 쓰고 있다.
둘째 아이의 영어 숙제는 바로, "방학 동안 어디에 다녀왔는지 소개하는 것"이었다. '방학 동안엔 모두 여행을 간다'는 걸 전제하고 있는 숙제라서 조금 기분이 나빴다.
우리는 안 가는데? 아니, 못 가는데? 여행 못 가는 사람은 어떻게 숙제를 하라는 말인 거야?
결국, 방학하기 전에 다녀왔던 돌로미티에 대해 쓰라고 말해주었다. 아이의 입이 댓발 나왔지만, 어쩔 수 있나.... 엄마 아빠는 방학이 아닌걸???
밀라노에 인생네컷이 생겼다는 말을 들은 딸아이는 이번 방학 때 거길 꼭 다녀와야겠다고 선언했다. 여행은 못 가더라도 거긴 꼭 가야겠다는 것이었다.
밀라노에 생긴 인생네컷 이름은 'Life 4 cuts'.
이걸 듣자마자 남편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인생네컷을 그대로 옮겨놓음 직한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Life 4 cuts"을 보며 얼마 전에 읽은 김영하 작가님의 시칠리아 여행기를 담은 책, '오래 준비해 온 대답"이 떠올랐다.
작가님이 이탈리아의 바리에서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로 가는 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배를 타기 전, 입구의 전광판에 "Memory Lost"라는 문구가 점멸하고 있었다고 한다. "잃어버린 물건이 없나 잘 기억해 보세요"라는 의미로 쓴 문구지만, 작가님은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는 의미로 해석했다.
네가 잃어버린 것에는 수많은 추억이 담겨있다. 어린 시절 상큼했던 기억부터 햇볕을 보지 못하고 살았던 수험생에 대한 기억, 취업 준비를 하며 스트레스받았던 기억, 병원에서 처음으로 정맥주사를 놓았던 기억, 병원을 그만두었을 때의 해방감, 혼자 여행을 떠나던 때의 자유함....
나는 지금 현재가 가장 중요하다는 이유로 과거의 기억들을 잊거나 망각하며 살고 있었다. 그 사소한 기억들을 모두 안고 살기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고르고 골라서 나에게 가장 좋은 것들만 남기고 모두 '망각'해 버리는 것이 지금을 살고, 미래를 살아내기 위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Memory lost"를 통해 내가 가슴에 남겨두고 잊지 않는 것들을 떠올렸다.
"메멘토 모리"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네 죽음을 기억하라"라고 해석되는 메멘토 모리는 '죽음'이 아닌 '삶'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Life 4 cuts"로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이슈가 될 만한 네 가지를 떠올렸다.
시골에서 도시로 전학을 간 것,
28살에 한국을 떠나 네팔에 간 것,
남편과 결혼을 한 것,
그리고 지금 여기, 밀라노에 온 것.
며칠 전, 이탈리아의 휴일이 있었다. 얼마 전부터 연어초밥이 먹고 싶다는 아들을 위해 우리 네 식구는 일식부페집으로 향했다. 밀라노엔 중국인이 운영하는 일식 부페집이 많다. 점심때는 1인당 20유로 정도의 가격으로 무한으로 시켜 먹을 수 있다. 우리는 초밥과 회, 새우튀김 등등 먹고 먹고 또 먹으며 배를 채웠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우리는 나빌리(Navigli)로 향했다. 바로 인생네컷이 있는 곳이었다. 나빌리는 밀라노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있는 동네로, 하천 양쪽으로 멋진 가게와 바가 즐비하게 들어서 있어서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그리 크진 않지만 유럽의 아기자기함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인생네컷 가게에서 꽃 머리띠를 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나빌리 하천을 걸으며 또 사진을 찍었다. 마치 밀라노에 여행 온 사람들처럼 거리를 걸었다. 바에 들러서 에스프레소와 브리오슈, 와플을 시켜 먹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큰아이의 겨울 잠바를 사러 쇼핑몰에 들렀다. 여기저기 옷가게에 들러 아이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잠바를 하나 사고, 딸아이가 고른 니트도 하나 샀다. 그 사이에 남편도 겨울 잠바 하나를 샀다.
이렇게 돈을 쓰고 나니, 지갑은 텅 비었다.
괜찮다. 다음 주가 월급날이니까.....
멀리 여행은 가지 못했지만, 여행 같은 일상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 나는 내 인생의 네 번째 컷을 찍고 있는 중이다.
요즘 저는 스텔라 장의 "L'amour, Les Baguettes, Paris"에 빠져있습니다. 이 가을과 너무 어울리는 멜로디와 감미로운 프랑스어 가사에 푹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아이들 말로는 가사는 특별할 게 없다고 해요. 그저 평범한 가사이지만, 그게 프렌치로 들으니 왜 이렇게 멋질까요?
내친김에 아이들에게 노래를 배우고 있습니다.
C'est drôle, je ne sais pourquoi (참 재밌어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Ca me fait toujours penser à toi (항상 네 생각이 나네)
Pour plein d'aut' gens, c'est la magie (다른 많은 사람들에겐 마법이고)
L'amour, les baguettes, Paris. (사랑이고 바게트겠지, 파리)
Toujours au même endroit (항상 같은 자리에서)
Comme si c'était hier, j'te vois (마치 어제인 것처럼 네가 보여)
Pour plein d'aut' gens, c'est la magie (다른 많은 사람들에겐 마법이고)
L'amour, les baguettes, Paris. (사랑이고 바게트겠지, 파리)
Eux voient les lumières, les paillettes (그들은 불빛과 반짝임을 보고)
La tour eiffel, la Seine, les fêtes (에펠탑, 센 강, 축제들을 보지만)
Mais moi quand j'arrive sur cette rue (나는 이 거리에 도착하면)
j'pense à toi qui ne réponds plus (대답 없는 너를 떠올리게 돼)
Même si je ne te revois pas (널 다시 볼 수 없더라도)
Tu seras toujours une partie de moi (넌 항상 나의 일부일 거야)
Pour plein d'aut' gens, c'est la magie (다른 많은 사람들에겐 마법이고)
L'amour, les baguettes, Paris. (사랑이고 바게트겠지, 파리)
Les fous rires sur ces marches (이 계단 위에서 미친 듯 웃던 소리가)
Résonnent dans ma mémoire (기억 속에 울려)
je les emporte là où je pars (어딜 가든 간직할게)
Eux voient les lumières, les paillettes (그들은 불빛과 반짝임을 보고)
La tour eiffel, la Seine, les fêtes (에펠탑, 센 강, 축제들을 보지만)
Mais moi quand j'arrive sur cette rue (나는 이 거리에 도착하면)
j'pense à toi qui ne réponds plus (대답 없는 너를 떠올리게 돼)
Pour moi ce n'est pas juste une ville (내겐 그저 한 도시가 아니야)
C'est l'histoire de nos passions juvéniles (우리 젊은 날의 열정의 기록이야)
Pour plein d'aut' gens, c'est la magie (다른 많은 사람들에겐 마법이고)
L'amour, les baguettes, Paris. (사랑이고 바게트겠지, 파리)
가사를 음미하다 보면 지금의 우리를 돌아보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에겐 두오모, 나빌리 , 패션의 도시겠지만 우리에게는 일상이고, 삶이고 가족인 밀라노입니다.
이 노래를 열심히 연습해서 나중에 짠~하고 보여드리겠습니다. ^^
구독자의 가을과 함께 다정함도 무르익길 바랍니다.
밀라노에서,
선량 작가.
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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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nctum
여기도 어느새 겨울의 문턱이네요. 작가님의 긍정열정에너지에 오늘 오전 전이감을 느낍니다. 항상 응원합니다. 아이들도 여전히 예쁘고 건강해 보여서 반갑네요. 매일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누군들 얼마나 다를까요? 그러나 또 얼마나 겹칠까요? 자신의 삶속에서 최선을 다하고, 최대를 끌어내는 작가님께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닫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이름처럼 "선량"에 많은 비중을 두고 살아가려고 하고 살아 온 늙은이여서..더 작가님께 끌리는 모양입니다. 쫀쫀한 매일의 삶으로 레이어를 쌓아가는 작가님의 작품과 일상에 응원을 보냅니다. 건강하세요.
zzumma in Milan (118)
작가님의 한땀 한땀 정성드려 그린 그림 잘 보고 있어요. 우리의 일상은 다른 듯 닮았지요 ^^ 작가님의 이 응원으로 저는 또 열심히 쓰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정말 감사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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