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너만 있으면 돼...

but 넌 날 비참하게 해

2024.08.01 | 조회 1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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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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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구독자, L 오랜만이야.

어디부터 업데이트를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혀. 이름 따라간다더니 일시정지 버튼을 참 오래도 누르고 있었다. 갑자기 도착한 메일에 놀라지 않았길. 우리가 너무 늦지 않았길 바라. 

소희와 진성
소희와 진성

그나저나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 20년 전 여고괴담3 : 여우계단이 개봉한 날이야. 이 특집을 하기 위해 오늘까지 기다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야. 유독 축축하고 간혹 서늘한 여름의 한가운데서 생각나는 영화야. 그 많은 시리즈 중에 왜 하필 "여우계단"일까 생각해 봤는데, 언제나 그렇듯 '내 모습이 겹쳐 보여서'라는 결론에 도달했어. 우리 학교에 여우계단은 없었지만, 영화 속 애들처럼 소원은 많았거든. 

혜주의 다이어리
혜주의 다이어리

학교에는 원이 있다

종종 점심시간 운동장을 내려다보면 '이보다 더 양기로 충만할 수는 없다'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학교는 어쩌다 공포 영화의 주 배경이 된 걸까?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이 장소에 뭉쳐있는 수백 명의  때문인 것 같아.

 바라다, 빌다, 사모하다, 부러워하다 
 원망하다, 미워하다, 슬퍼하다

성적, 교우 관계, 복장 등등. 학창 시절 내내 무언가를 바라고, 욕망이 꺾여서 슬퍼하고, 또 원망하고, 부러워했던 것 같아.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가까이 있는 친구마저 순수한 마음으로 좋아하지 못했던 순간들이 있었어. 

특히 나는 고등학교 3년 내내 학급 회장을 하며 본의 아니게 친구들의 수치를 봐야 했던 경험이 많거든. 그 이유도 가지각색이야. 신체검사 시간엔 체육 선생님이 나에게 기록을 맡겼고, 담임 선생님은 번거로움을 이유로 나에게 6월 모의고사 성적을 엑셀에 정리하게 했어. 기록하는 내내 의문이 가득했어. 이래도 되는 걸까? 이후 한동안 친구들을 똑바로 보지 못했어. 좋아하는 친구들 얼굴 옆에 수치가 함께 보였거든. 누가 내 기억을 똑 떼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지. 

체육시간의 혜주
체육시간의 혜주

지금 되돌아보니 모두에게 폭력적인 상황인 것 같아. 학교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것도 많지만, 어쩌면 우린 배우지 않아도 될 상처까지 경험했을지 몰라. 아마 예술 고등학교 특성상 진성, 소희, 혜주는 더 가혹한 환경에 처했겠지. 타고난 재능에 대한 욕망이 더없이 커질 수밖에. 이런 원망과 욕망이 모여서 학교 구석의 서늘함이 탄생했나 봐. 괜히 괴담이 나오는 게 아니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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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햇살캐 소희
유일한 햇살캐 소희

♬ 우린 아름답고 참 슬픈 사이야

영화 보는 내내 레드벨벳 노래가 맴돌았어. 진성-소희 둘은 전형적인 love-hate 관계 같달까? 다시 안 볼 듯 싸우다가도 붙어 다니니 말야... 결국 평생을 함께하게 된 (?) 이들에게 어울리는 노래라고 생각해. 매사 해맑은 소희와 온종일 붙어 다니는 비교적 차분한 진성이. 겉으로 보기엔 둘도 없는 단짝 친구지만, 진성이 마음에는 조금씩 균열이 생겼어. 소희가 존재하는 한 진성이는 지젤이 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거든. 매일 보는 친구로부터 열등감을 느끼기 시작하니 진성이의 눈빛도 점점 굳어가. 

굳어가는 진성
굳어가는 진성

확연히 보이지?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친구의 성공/행복을 온전히 기뻐해 주지 못할 때가 있었어. 내가 가지지 못한 걸 가진 친구가 부러웠고, 내 처지를 끝없이 비관했던 것 같아. 무엇보다도 친구에 대해 이런 마음을 품고 있는 내가 너무 싫어서 더 괴로웠어. 

비로소 제삼자의 입장으로 진성의 표정을 보니, 그때의 내가 부끄럽고 한편으로 불쌍하기도 해. 참 미성숙했다는 생각과 동시에 지금은 어떤지 생각해 보게 된다. 나도 친구 앞에서 저런 표정이었을까? 친구도 내 감정을 느꼈을까? 속부터 좀먹는 마음은 결국 겉으로 티 나기 마련이라는 걸 그땐 잘 몰랐던 것 같아. 

여우계단 다녀온 뒤, 진성과 혜주
여우계단 다녀온 뒤, 진성과 혜주

영화 보는 내내 '나라면 여우 계단을 올랐을까 - 소원이 이뤄지고 온전히 행복했을까'를 고민해 보았는데, 아닐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어. 살이 빠진 혜주도 콩쿨에 나간 진성이도 비로소 웃음을 찾았지만 과연 그 비참한 마음까지 치유됐을까. 난 아이들이 금방 또 다른 원과 욕망으로 괴로워졌을 것이라 생각해. 너무 부정적인가 싶지만 그냥 소희, 진성, 혜주 모두가 안타까웠어.

맨 끝에 놓인 갈림길에선 개인의 선택이 결과를 가르지만, 그곳까지 가는 길에 있어선 어른들의 영향이 컸을 거야. 공개적으로 신체를 측정하고 훈계라는 이름 아래 모욕을 주지 않았다면 아이들이 여우 계단을 올랐을까? 

이쯤에서 여고괴담은 비단 학생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아마 실제로 여우계단이 있다면 학생보다도 어른들의 웨이팅 명소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 원의 결과가 참혹하대도 뛰어들만한 사람이 많아 보여. 

갑자기 서글프지만... 이게 여고괴담 시리즈의 배경 정서인 것 같아. 아름다운 시절이지만 동시에 슬픔이 가득한!

비슷한 유년기를 보냈을 L과 구독자의 감상이 궁금해진다. 

추신. 네 눈앞에 여우계단이 있다면 무슨 소원을 빌고 싶어? (저주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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