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취미가 많습니다. 그 중 제가 상당히 열심히 임한 게 체스입니다. 제가 주로 체스를 두는 앱에서 통계를 확인해 보니 지금껏 이 앱에서만 4,000 게임 넘게 체스를 뒀다고 합니다. 한 판에 10분씩만 잡아도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꼬박 한 달을 체스만 둔 것과 맞먹는 시간이니 조금 무섭기도 합니다. 지난 메일에서'터키인 체스 기계' 이야기를 다뤘는데, 이것도 제 취미를 즐기다 얻게 된 지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체스를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불행하게도, 체스에는 절대로 지지 않는 방법이 존재합니다. 이것은 수학적으로 깔끔하게 증명까지 되어 있고 '체르멜로 정리'라는 이름도 붙어 있습니다.
체르멜로 정리는 다음 조건을 만족하는 게임들에는 절대로 지지 않는 방법이 존재한다는 정리입니다. 만약 이 조건들에 더해 무승부가 없는 게임이라면 반드시 이기는 방법이 존재합니다.
- 둘이서 경쟁하는 게임이어야 합니다.
- 차례를 번갈아가면서 진행하는 게임이어야 합니다.
- 게임에서 가능한 상태의 수가 유한해야 합니다.
- 행동하는 것에 따른 결과가 결정적이어야 합니다. (예컨대 A라는 행동을 하기로 했을 때 주사위를 던져서 6이 나왔을 때에만 A가 적용된다거나 하는 규칙이 있으면 안 됩니다.)
- 게임의 모든 상태가 양쪽 플레이어에게 공개되어야 합니다. (즉, 카드를 뒷면으로 놓는 행위 등이 없는 게임이어야 합니다.)
증명은 매우 간단합니다. 만약 선공에게 반드시 이기거나 비길 수 있는 전략이 존재한다면 그 자체로 증명 완료입니다. 만약 선공에게 그런 전략이 없다면, 그 말은 곧 선공이 무슨 전략을 쓰든 후공에게 이기거나 비길 수 있는 전략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선공 또는 후공,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이기거나 비길 수 있는 전략을 갖습니다.
이 정리가 적용되는 게임의 예로는 바둑, 장기, 체스, 오목, 고누, 틱택토, 오델로, 젓가락 게임 등이 있습니다. 실제로 오목의 경우 '무적수'라는 것이 많이 연구되어 보편적인 룰을 사용할 때에는 선공이 항상 이길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국제적인 대회(정말로 있습니다)에서는 선공과 후공 간의 밸런스를 맞춘 다른 룰로 경기를 진행합니다. 물론 룰을 변형한다고 하더라도 오목에 운적 요소를 더한다든지 특정 수를 상대에게 숨길 수 있다든지 (과거 바둑을 변형한 온라인 게임 '바투'에서 이런 룰을 넣었습니다.) 하지 않으면 체르멜로 정리가 적용되기 때문에, 지지 않을 방법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어떤 게임에 지지 않을 전략이 존재한다는 말을 들으면 어쩐지 허무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바둑, 체스 같은 게임에 인생을 걸고 진지하게 임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체르멜로 정리는 그런 방법이 존재한다는 사실만 알려줄 뿐 그 방법이 뭔지는 알려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한 무적수 같은 것이 바둑이나 체스에서는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물론 바둑이나 체스에서도 같은 실력일 때에는 선공이 유리하기 때문에 부가적인 규칙으로 밸런스를 맞춥니다. 바둑의 경우 후공에게 덤을 주고 체스의 경우 비긴 것도 후공의 승리로 처리하는 대신 후공에게 제한 시간을 적게 주는 등(아마겟돈 룰)의 방법을 사용합니다.
두번째로 설령 그런 방법이 연구된다고 해도 경우의 수가 너무 많습니다. 바둑의 경우 첫 수로 둘 수 있는 수가 361수이고 한 수를 두면 그 자리에 돌을 못 놓으니 가능한 첫 백 수의 경우의 수는 361!/(361-100)!입니다. 이를 계산해 보니 1438381930577726805287825103464875103959051067281390788873617045574927177099449912306370345716765944146665671033721067165120697664692968263027561999384312106141404923993781234087301324205983925665302807986240712253690278313984000000000000000000000000가지입니다. 이 정도면 우주에 존재하는 원자의 개수 정도는 가뿐히 넘습니다. 체스의 경우에도 매 수마다 괜찮은 옵션이 3가지씩 있고, 양쪽 모두 15번씩 수를 진행했다고 생각하면 3^30, 즉 205891132094649개의 경우가 나옵니다. 이걸 외워서 경기할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아직 체스에 시간을 더 써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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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a
"첫째로 체르멜로 정리는 그런 방법이 존재한다는 사실만 알려줄 뿐 그 방법이 뭔지는 알려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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