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페퍼노트에서 우주 방사선이 데이터를 1비트 건드리는 바람에 마리오가 순간이동을 해버렸던 사건을 소개드렸었습니다. 이게 그나마 게임에서 일어난 사건이라 다행일지도 모르겠습니다.
2003년 벨기에 연방 총선에서는 마리아 빈데보헐이라는 후보가 전체 표 수보다 더 많은 표를 득표한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다시 세어 보니 이 후보가 실제로 받은 표는 처음 집계됐던 값보다 4,096표 적었는데요, 4,096이라는 수는 2의 12승입니다. 즉, 컴퓨터가 이진수로 저장하고 있던 값에서 한 비트가 0에서 1로 뒤집혔던 것입니다. 조사팀은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전부 뜯어보았지만 아무 결함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마리오 때처럼 우주 방사선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이 사건들을 통해 제가 오늘 하고 싶은 말은, 데이터에도 다 물리적 실체가 있다는 것입니다. 데이터도 우주 방사선이든 뭐든 무언가에 물리적으로 맞을 수 있는 물건입니다. 인터넷, 클라우드, 가상공간, 온라인... 깊게 생각해 보신 적 없다면 이들이 실체가 없는 추상적인 존재로만 느껴지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데이터는 언제나 어딘가에 물리적으로 놓여 있기 마련입니다.
이 때문에 컴퓨터 네트워크 교과서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테이프를 가득 실은 스테이션왜건의 대역폭을 절대 과소평가하지 마라.'
만화 xkcd의 작가 랜들 먼로가 2013년에 이걸 진지하게 계산해 봤습니다. 당시 페덱스는 항공기 654대로 하루 약 1만 2천 톤을 실어 나를 수 있었고, 1테라바이트짜리 SSD 한 개의 무게는 78그램이었습니다. 페덱스 항공기를 전부 SSD로 채워 나르면, 당시 전 세계 인터넷 트래픽 총합의 약 100배를 옮길 수 있었습니다.
아마존은 실제로 이 아이디어를 가지고 상품을 팔았습니다. 2016년에 선보인 '스노모빌'이라는 서비스는, 트럭이 고객사 주차장까지 찾아가서 데이터 100페타바이트를 싣고 데이터센터로 돌아오는 서비스였습니다. 1기가비트 회선으로 꽉꽉 채워 데이터를 전송한다면 25년 정도 걸릴 수 있는 크기의 데이터를, 트럭으로 한 방에 옮겨줬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인터넷으로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동안, 여러분이 읽고 쓰는 데이터가 스테이션왜건이나 페덱스 항공기 혹은 트럭에 실려 이동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물리적으로 바다 밑을 지나갑니다. 이 얘기도 이전 페퍼노트에서 소개드린 바 있었죠. 전 세계 바다 밑에는 지구를 서른 바퀴 넘게 감을 수 있는 케이블이 깔려 있습니다. 어업 장비나 선박의 닻에 부딪혀서 문제가 생기기도 하고, 드문 경우지만 상어의 공격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바다가 없는 나라, '아르메니아'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의 인터넷은 닻도 상어도 아니고 한 할머니가 삽으로 마비시킨 바 있습니다.
아르메니아는 바다가 없는 내륙국입니다. 국경을 맞댄 네 나라 중 터키와의 국경은 1993년부터, 아제르바이잔과의 국경은 1989년부터 닫혀 있습니다. 이란 쪽 연결은 빈약했습니다. 그래서 아르메니아가 바깥 인터넷에 닿는 경로는 사실상 조지아 하나뿐이었습니다. 조지아를 가로지르는 육상 케이블이 흑해로 이어지고, 거기서 해저케이블로 불가리아에 닿습니다. 당시 여러 매체는 아르메니아 인터넷의 90%가 조지아를 거쳤다고 전했습니다.
2011년, 조지아의 시골 마을에 75세 하야스탄 샤카리안 할머니가 땅을 파고 있었습니다. 구리 등 폐금속을 모으려고(혹은 훔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별로 깊지 않은 곳에, 조지아 철도 통신사의 광케이블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하야스탄 샤카리안 할머니의 삽에 광케이블이 걸렸고, 이 케이블이 끊어지자 아르메니아의 인터넷은 "우주가 잠시 꺼졌다" 상황에 놓입니다. 자료에 따라 짧게는 5시간, 길게는 12시간동안, 아르메니아 인터넷의 90%가 마비되어버린 것입니다.
언론은 할머니에게 '삽 해커(Spade hacker)'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한 나라의 인터넷 90%를 마비시킨다는 전대미문의 업적을 삽 한 자루로 달성했으니 아주 멋진 별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할머니 본인은 멋지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할머니의 얘기를 같이 싣는 게 공평하겠죠? 체포된 뒤 할머니는 한 인터뷰에서 울면서 말했습니다. 나는 그저 장작을 줍고 있었을 뿐이다, 그 케이블을 자르는 건 자기 힘으로는 불가능하며, 나는 인터넷이라는 게 뭔지도 모른다.
페퍼노트는 삽질 한 번에 사라지는 일이 없도록 여기저기 백업본을 두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정말 중요한 자료는 항상 백업하시고, 늘 삽을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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