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세상이 토끼다! 호주의 토끼 전쟁 이야기

2023.10.05 | 조회 8.47K |
0
|

어린 시절 삼국지연의 등 역사 소설을 읽다 보면 종종 '황충'이라는 것이 나오곤 했습니다. 누런 벌레 떼가 하늘을 뒤덮고 날아가면서 지나간 자리를 초토화하는 이미지는 역사 소설보다는 오히려 디스토피아를 그린 SF에나 어울릴 법한 무시무시한 모습이었습니다. 성경에서도 이집트를 덮친 10가지 재앙 중 하나로 메뚜기 떼가 나오는데요, 다른 재앙으로는 나일 강이 피로 변하거나 첫째들이 사망하는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재앙들과 함께 나열되는 것으로 미루어 당시 메뚜기 떼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호주에도 비슷한 재앙이 있는데, 이 재앙은 150년째 이어져 오고 있으며 현재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모습이 메뚜기보단 좀 더 귀여울 뿐입니다.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토끼로, 역병에 빗대어 'rabbit plague'라고까지 표현되곤 합니다.

호주는 다른 대륙들과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독특한 생태계가 발달했습니다. 1788년, 영국 식민지 주민들과 죄수들이 탄 11척의 배가 호주에 도착하는데 그 전까지 호주 대륙에는 토끼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태즈메이니아 섬에서 식용 토끼를 기르기 시작합니다. 호주에 외래종이 들어온 것이지만 태즈메이니아 섬의 기후와 천적인 주머니늑대의 존재 때문에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이 식용 토끼 일부가 호주 본토로 도망을 치기도 하지만 그 때까지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본격적인 사건은 1859년, 토마스 오스틴이라는 인물로 인해 시작됩니다. 오스틴은 향수병을 느꼈던 건지 "토끼 몇 마리만 있으면 해도 별로 끼치지 않고, 사냥터 같은 분위기, 집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라고 이야기하며, 영국에 있던 조카에게 사냥용 토끼를 주문합니다. 조카는 야생 회색토끼를 충분히 구할 수가 없어서 튼튼한 집토끼도 몇 마리 섞어서 호주에 보냅니다.

그렇게 오스틴은 사냥을 즐기기 위해 총 24마리의 회색토끼와 집토끼를 야생에 풉니다. 그리고 이 두 종의 토끼가 태즈메이니아 섬으로부터 온 식용 토끼들과 교배하며 슈퍼 토끼를 탄생시켰습니다.

토끼는 먹이 사슬 저 아래에 있는 약한 초식동물입니다. 거친 야생을 살아가기에 토끼는 너무 나약합니다. 그런 토끼가 아직 멸종되지 않고 살아 있는 이유는 미친 듯한 번식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토끼는 자궁이 두 갈래여서 한쪽 자궁이 임신한 동안 다른쪽 자궁에서 따로 임신이 가능합니다. 임신 기간도 한 달이 채 안 됩니다. 교미에 걸리는 시간도 몇 초 내외입니다. 엄청나게 죽는 대신 엄청나게 낳는다, 이게 토끼의 생존 전략입니다.

문제는 호주의 환경이 토끼를 엄청나게 죽일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호주는 겨울이 그리 춥지 않아서 토끼가 일 년 내내 번식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호주에 그다지 많지도 않은 육식 동물들은 토끼 사냥에 그다지 적극적이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24마리의 토끼는 수십억으로 불어났습니다.

토끼는 미친 듯이 번식하면서 눈 앞의 풀을 싹 다 뜯어 먹기 시작했습니다. 호주 대륙은 황폐해져갔습니다. 오죽했으면 토끼를 막기 위해 철조망을 세우는데, 그 철조망의 길이를 보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토끼를 막기 위한 철조망
토끼를 막기 위한 철조망

그림이 보이십니까? 토끼를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세운 셈인데요, 왜 빨간색으로 표시된 1번 철조망만 있는 게 아니라 2번, 3번도 있는 걸까요?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철조망 너머에서도 토끼가 발견되니 그 다음, 그 다음 방어선을 구축해 보았는데 모조리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토끼들은 굴을 파서 철조망 밑으로 전진을 계속했습니다.

호주 정부는 토끼를 통제하기 위해 별짓을 다했고, 모두 실패했습니다. 여우를 풀었더니 토끼보다 사냥이 쉬운 토착 종들을 잡아 먹었습니다. 독극물을 풀었더니 그 근처 토끼들은 죽었지만, 죽지 않은 토끼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번식했습니다. 토끼 바이러스를 퍼뜨려 보니 개체 수가 줄어드는 듯 싶었는데 곧 바이러스에 적응한 녀석들이 살아남아 번식을 이어 갔습니다. 군대를 투입하여 250만 마리의 토끼를 사냥해 보았으나, 이미 토끼의 수는 십억 단위였습니다.

이 때문에 호주에서는 아직도 토끼로 골치를 앓고 있습니다. 무척이나 동물을 사랑하는 나라인데, 모든 토끼 질병 치료제 수입이 금지되어 있고 다른 동물 학대와 달리 토끼 학대는 가벼운 처벌에 그치는 등 토끼만큼은 대우해 주지 않습니다.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페퍼노트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다른 뉴스레터

무단횡단은 불법이어야 할 이유가 없고, 플라스틱은 일회용이어야 할 이유가 없다

마케팅으로 바뀌어버린 사회의 기준. 저는 요즘 1899년의 미국을 배경으로 한 게임 '레드 데드 리뎀션 2'를 재밌게 하고 있습니다. 1899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보니 자동차는 보이질 않습니다. 길에는 걷는 사람

2024.10.19·조회 2.18K·댓글 4

38분 만에 끝난 전쟁

영국-잔지바르 전쟁에 대해 알아 봅니다. 한국은 여전히 전쟁 중인 국가입니다. 1953년 휴전을 하였으나 종전을 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한국전쟁은 70년이 넘게 이어지고 있는 셈입니다. 반면 역사에는 고작 38분 만에 끝

2024.11.02·조회 3.25K·댓글 2

일본 빼고 다 써서 일본을 물리친 일본의 발명품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대활약을 펼친 야기-우다 안테나에 대해 알아봅니다. 페퍼노트를 쓰며 가장 안타까웠던 소재 중 하나가 '연은분리법'에 대한 글이었습니다. 이 글은 은 생산량을 폭발적으로 늘릴 수 있는 기술을 조선에서 발견했지만, 정작 조선은 써먹지

2024.07.13·조회 2.13K

아 맞다, 전쟁 중이었지

영국과 네덜란드, 전쟁 당사자들조차 전쟁 중인 걸 까먹어버린 335년 전쟁. 30여 분 만에 끝나버린 전쟁에 대해 메일을 보내 드린 적이 있습니다. 영국-잔지바르 전쟁은 그렇게 역사상 가장 짧은 전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반대로 가장 긴 전쟁으로 눈을 돌려

2025.01.11·조회 1.47K

어쩌다 보니 바뀌어 버린 색깔들

원래 회색이었던 헐크, 실수로 탄생한 이탈리아 국기, 건반 색이 반대였던 피아노. 자몽이 붉은 빛을 띠게 된 것은 감마선 때문임을 설명드렸던 적 있습니다. 이 때 자몽을 헐크에 빗댔었습니다. 그런데 헐크의 색깔도 원래는 녹색이 아니라는 것, 알고 계셨나요? 마블

2024.07.06·조회 2.3K·댓글 4

리스본 대지진, 종교를 무너뜨리다

역사적 대지진이 도시와 함께 종교도 무너뜨린 과정. 저는 얼마 전 개봉한 영화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에 푹 빠져 있습니다. 이 영화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로, 문명이 붕괴되고 45년이 지난 시점부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2024.05.26·조회 2.18K·댓글 1
© 2026 페퍼노트

당신의 삶에 양념 같은 지식을! '그런 건 어떻게 알았어?' 할 때 '그런 것'들을 전해 드립니다.

뉴스레터 문의pppr.note@gmail.com

메일리 로고

도움말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채팅으로 문의하기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특별시 송파구 위례광장로 199, 5층 501-8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