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얼마 전 개봉한 영화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에 푹 빠져 있습니다. 이 영화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로, 문명이 붕괴되고 45년이 지난 시점부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회적 인프라는 파괴되었고 자원은 극도로 제한된 세상에서 각각의 등장인물들이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갖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도 이 장르의 매력 중 하나입니다.
현실에서도 세계대전 같은 전지구적 사건 뿐만 아니라 세월호 침몰 사고나 강남역 살인사건같이 비교적 국지적인 규모의 사건, 사고들 역시 그 사건의 직접적인 피해자들 너머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 가치관을 바꿔 놓기도 합니다. 오늘 알아볼 '리스본 대지진' 역시 리스본이라는 도시를 물리적으로 붕괴시키고 나아가 유럽인들의 가치관마저 뒤바꾸어 놓은 사건입니다.
1755년 11월 1일, 포르투갈 리스본은 가톨릭 축일 '모든성인대축일' 분위기에 들떠 있었습니다(모든성인대축일은 낯설지만, 그 전날 밤을 즐기는 데서 유래한 게 바로 '할로윈'입니다.). 그런데 오전 9시 40분부터 약 5분 간의 지진이 발생하여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도시 한복판에 균열이 생기고 리스본 건물의 85%가 무너져 내렸습니다. 아비규환 속에서 사람들은 건물이 없는 곳이 안전할 거라 생각해 해안으로 몰려 들었습니다. 하지만 지진으로 인해 해저가 드러날 정도로 바닷물이 빠져 있었고, 지진 발생 40분 뒤 쓰나미가 몰려 들었습니다. 그 후로 두 번의 쓰나미가 더 왔고, 곳곳에서 발생한 화재로 도시는 5일 간 불탔습니다. 현대 학자들은 이 지진의 규모를 8.5에서 9.0 수준으로 추정합니다. 저 멀리 핀란드까지도 지진파를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리스본 인구는 20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이 중 3만에서 4만 명이 이 때 사망했고, 모로코 해안에서도 만 명 가량이 사망했습니다.
지진 자체만 보아도 워낙 대사건이라 포르투갈 사회에 영향을 끼치지 않은 부분이 없습니다만, 종교계에 끼친 영향은 조금 독특합니다. 대재앙이 일어났을 때 종교계에서 답할 수 있는 가장 흔한 말은 '신의 심판'입니다. 그런데 리스본 대지진은 도저히 신의 심판으로 볼 수 없었습니다. 리스본은 유럽 내에서도 가톨릭 신앙이 특별히 독실한 곳입니다. 지진이 일어난 날은 가톨릭의 큰 축일인 모든성인대축일이었습니다. 지진으로 인해 큰 성당들은 모조리 무너졌습니다. 반면 모든 게 무너지는 리스본에서 유일하다시피 피해를 입지 않은 곳이 있었는데, 다름 아닌 집창촌 알파마였습니다. 축일을 거룩히 여기던 신자들이 가장 먼저 죽고, 가장 타락했다고 생각했던 매춘부들만은 살아남은 세상에 신의 심판 같은 설명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전지전능한 신을 전제하는 기독교에서, '그렇다면 악이 왜 존재하는가'라는 이른바 '악의 문제'는 중요한 화두입니다. 이에 대해 '가능한 모든 세계 중 현재의 세계가 그나마 최선이다'라는 답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리스본 대지진은 도저히 최선으로 볼 수 없는 대참사였습니다.
계몽주의 철학자들에게 리스본 대지진을 기독교를 비판할 중요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볼테르는 '리스본 재앙에 관한 시'에서 '이제는 사라진 리스본은 정말로 더 사악한 곳이었나, 맛있는 것들을 탐닉하는 런던이나 파리보다 더. 하지만 리스본은 폐허가 되었고 파리에서 사람들은 춤을 추네.'라고 노래했습니다. 소설 '캉디드'에서는 '리스본 사람들의 고통은 신의 무의미한 잔혹행위'라고 강하게 비난했습니다.
세계사의 흐름을 본다면 리스본 대지진이 없었어도 결국 언젠가 유럽인들은 종교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문학을 꽃피우고 과학을 발달시켰을 것입니다. 하지만 리스본 대지진은 '이토록 잔인한 세상인데 정말로 우리를 사랑하는 신이 계시는가' 하는 의문을 유럽의 대중에게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퍼뜨렸습니다.
같이 볼 링크
위키피디아, '1755년 리스본 지진'
나무위키, '1755년 리스본 대지진'
나무위키, '악의 문제'
영문 위키피디아, 'Divine judgement'
Independent, 'Lessons from earthquakes: there isn't always someone to blame When the earth goes from under our feet, we'd rather feel guilty than helpl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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