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회복시키기 위한 첫째 과제는 인간 스스로에 대한 철저한 자각이다. 이 자각은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스스로 개척해야 할 영역이다. … 이때 비로소 인간은 인간다운 인간이 된다. 여기에서 인간의 통로가 열린다.
-법정, [서 있는 사람들]
희비가 교차되는 인간의 삶.
서로의 마음이 열려있고, 동조될 때는 평화롭다가도
다름에 대한 인식으로 의견이 어긋나는 일이 생기면
마음은 정착할 곳을 잃고 방황하게 됩니다.
왜 사람은 우주의 시간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할 짧은 세월을,
행복하게 살아가지 못하는 걸까요?
굳이 희로애락이란 걸 왜 겪어야 하는 걸까요?
그토록 엄청난 확률을 뚫고 태어났음에도, 괴로움을 느껴야 할 까닭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무언가에 느끼고 동요한다는 것은
내 안에 이미 동요를 일으키는 '그것'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안에 있는 것에만 반응할 수 있지요.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게 내 안에 있듯,
나를 괴롭게 하는 것 역시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안에 든 것이 다르기에
똑같은 상황에 놓여도 각자 느끼는 것에 차이가 생기는 것이죠.
사람은 바깥을 통해, 나와는 또 다른 생명을 통해
마음을, 자신을 의식하게 됩니다.
내가 오로지 나뿐이라면, 어떻게 나를 의식할 수 있을까요?
사람은 무리 속에서 개별성을, 차이란 것을 만들어냈습니다.
우리는 차이를 통해 괴로움을 느끼고,
화합과 수용의 과정을 통해 괴로움을 떨치며,
나에게 필요한 것을,
안정된 상태로(원상태로) 회복되기 위한 '나다움'에 대하여 알아가게 되지요.
차이와 분열에 집착할수록 나는 공허해지니
삶은 미움, 분노, 슬픔, 질투, 책망, 회피와 같은
내가 나에게 저지르는 온갖 만행을 멈출 때까지
끊임없이 몰아세우고, 부숴뜨리며, 수렁 속으로 빠뜨리게 됩니다.
모든 생명이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은 다를지라도
같은 본성을 품고 있음을 볼 수 있을 때까지,
하나를 보고, 하나로서 대할 수 있을 때까지
스스로 만들어 냈던 나-타자의 구분을 없애
사랑만이 남게 될 때까지.
괴로움은 우리에게 질문을 하도록 만듭니다.
당연하게 바라보았던 시선을 거두게 하고,
다른 시선을 가질 수밖에 없도록 만듭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괴로워야 하는가.'
'나는 원치도 않았음에도 왜 태어났는가.'
'괴로워하다 가야 하는 이 생이 얼마나 허무한가.'
반복되는 고통은 나에 대해 알지 못했던 무지를,
나의 조각난 의식을 마주하게 하도록 질문들을 던지며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이끕니다.
괴로움이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기존의 경험에서 답을 추정할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답을 찾아야만 합니다.
세상을 다시 보고,
생명을 다시 보고,
나를 새롭게 다시 봐야만 합니다.
내가 여태껏 알아왔던
나에 대한 확신조차도 버려야 합니다.
사람 안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샥티 카테리나 마기)
모든 생명의 본질은 의식입니다.
나는 육신의 경험을 통해 '나'를 지각하도록
세상에 보내졌고,
나의 진정한 실체를 속속들이 다 알고
일체가 나임을 깨닫게 될 때까지
이 연극은 계속될 것입니다.
찾는 자와 찾는 대상은 이원성이라는 한계를 초월하면서 하나가 되는데, 그것은 다시 말해 참나 각성, 빛 비춤, 깨달음이며, 다른 말로 하면 "하늘나라는 너희들 안에 있다."이다.
-데이비드 호킨스, [진실 대 거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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