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94] 🌻 우리는 올해도 죽지 않고 살아갈 거야

3월의 첫 번째 목요일에 편지를 부치는 숑🌻입니다. 완연한 봄날이 성큼 다가왔네요! 서울 기준으로 내일이면 최대 21도까지 오른다고 하는데, 불과 지난 주까지 니트와 코트로 무장하던 인간으로서 얼떨떨하기만 합니다. 길거리에 반팔과 롱패딩이 공존하는, 그야말로 기묘한 계절의 테두리에 서 있군요.

3년 만에 맞은 오프라인 개강의 분위기도 기온 못지않게 봄 기운을 더하고 있어요. 지금 대학가 주변에 살고 있어선지 '아, 이게 대학교의 3월이었지!' 하는 실감을 제대로 느끼고 있습니다. 요일 상관 없이 북적이는 술집에서 개강 총회를 하는지 빼곡하게 모여 앉아 건배사를 외치는 사람들, 서툴지만 설레는 감정으로 20대 초반의 아름다운 페이지를 적어 내려가는 젊은이들...!

-을 멀찍이서 관찰하자니 스스로가 정말 그 시절과 멀어진 30대처럼 느껴더라고요. (하하!ㅠ) 생각해보면 대학 시절을 분명하게 지나온 것도, 그때 쌓아올린 기억들로 현재를 가뿐하게 살아가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오늘 준비해본 세 곡은 이토록 따뜻해진, 싱숭생숭한 변화의 시기에 차분히 봄을 맞으며 자주 듣고 있는 노래들입니다. 한 꺼풀 가벼워진 차림으로 산책하며 듣기에 딱 좋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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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지윤 - 봄눈

산책의 효능은 앉은 자리에서 수십 가지를 꼽을 수 있겠지만, 요즘 가장 찬탄하는 점이라면 계절의 흔적을 기민하게 눈치챌 수 있다는 데 있다. 내게 있어 퇴근하고 그날의 운동을 마친 뒤 집까지 40분쯤 걸어가는 일상은 주 4~5일을 반복하는 단단한 루틴이다. 늘 비슷하다 보니 그 시간쯤 산책하는 강아지의 낯이 익을 만큼 길목의 많은 것이 친숙하다. 이런 때야말로 계절의 미묘한 변화를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다.

지난 주말부터였을까? 제법 늦은 밤인데도 '더 이상 겨울 외투 없이도 춥지 않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주 포근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시린 기운이 제법 물러간 초봄. 이 시기에 박지윤의 도톰한 목소리가 떠오르곤 한다. 정확히는 2009년 발매한 그의 7집 앨범 [꽃, 다시 첫 번째]에 실린 모든 곡들. 요즘은 그 중에서도 루시드폴이 작사, 작곡한 <봄눈>에 가장 자주 손이 간다.

봄눈(Spring Snow)은 사실 만개하고 흩날리는 벚꽃을 표현한 단어지만, '유난히 춥던 그 해 가을, 겨울 / 계절을 견디고 이렇게 마주앉은 그대여' 같은 노랫말 덕인지 초봄에 더욱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계절을 견딘다는 표현을 보니 겨우내 슬픔과 이웃했을 사람들을 떠올리기도 했다. 몸을 옹송그리기 바빴던 계절을 보낸 뒤 맞이한 따뜻한 봄바람이 누군가에게는 더 아프게 느껴질지 모르겠다고. 사람을 붕 떠오르게도 하지만 착잡한 심정에 빠지게도 만드는 봄바람의 이면이란!

🌻 계피 - 2019

가을방학 멤버였던 계피의 목소리는 매 계절 새롭게도 내 마음을 간지럽힌다. 그룹 이름인 만큼 가을은 말할 것도 없고, 쓸쓸한 겨울을 호롱불처럼 밝혀주는가 하면 갓 돋아난 이파리처럼 봄여름의 귀를 산뜻하게 물들여버리는 식이다. 이 노래는 그런 계피가 2019년 4월 발매한 동요집 [빛과 바람의 유영]에 실렸다. <섬집아기>, <엄마야 누나야>, <과수원길>처럼 유명한 동요를 그만의 방식으로 편곡하고 부른 것이다.

당시 나는 앨범이 발매되기 전 가을방학의 크리스마스 콘서트에 갔다가 '계피가 곧 동요집을 낸다'는 스포를 들은 상태였기에 '그때 말한 앨범이구나, 의리(?)로 들어보자' 정도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기대치 못한 신곡 <2019>가 끼어 있었던 것이다. 수련회에서 보물찾기로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발견한 기분인데 심지어 이렇게나 노래가 좋다고! 가사는 또 무슨 일이야! (너무 맘에 들어서 기절)

그 해 나의 봄은 이런저런 고난과 피로가 겹쳐 하루하루 벅차기만 했다. 꼭 필요한 시기에 주어진 처방전처럼, 계피의 예쁜 목소리와 꾹꾹 눌러 쓴 가사로 이루어진 이 노래는 그 봄의 나를 거뜬히 구원했다. 벌써 4년이 흘러 다시 맞은 봄이지만 태어나 처음 들은 듯 노랫말로부터 새 에너지를 받는다. ‘우리의 항해는 이제 여기 시작되려 하지 / 푸르게 피어날 4월의 노래 네게 주고 싶어 / 우리는 올해도 죽지 않고 살아갈 거야'

🌻 Blur - Tender

2월 중순의 어느 주말, 종로의 작은 극장에서 영화 <애프터썬>을 봤다. 감독이 누군지, 어떤 내용인지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냅다 고른 영화였다. 감상하는 동안은 그저 푸른 색감과 물의 표현이 아름답고 친밀한 부녀의 여행을 구경하는 마음이 좋았는데, 곱씹을수록 그리움과 슬픔이 밀물처럼 밀려드는 묘한 영화였다.

무엇보다 영화 중간에 흘러나온 영국 밴드 블러(Blur)의 이 노래가 마음의 미묘한 동요를 증폭시켰다. 이미 익히 알고 있던 노래를 생각지 못한 타이밍에 맞닥뜨렸을 때, 그 노래가 이제껏 전혀 매치해본 적 없는 감정으로 가는 징검다리가 되어줄 때, 그리고 이제는 그 감정과 그 노래를 떨어뜨려놓고 생각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나는 간혹 마주하게 이런 상황이 매번 신비롭고 반갑다. 나는 아마 이 영화를 보기 전 <Tender>를 듣던 기분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곰곰이 생각하며 들어봐도 <Tender>와 영화 <애프터썬>은 비슷한 분위기와 감상을 나눠 가지는 듯하다. 7분 41초라는 짧지 않은 곡에서 연신 부드러움(tender)과 위대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노래의 절반은 애타게 그대를 찾는 목소리로 채워진 점이 마치 영화의 축소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노랫말 속 그대(baby)의 의미를 자유로이 해석하는 것 또한 감독의 역량이구나,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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