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은 저 과부처럼, 참된 헌신을 하십시오.”
마가복음 12장,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렙돈 두 닢을 넣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과부는 무명이고, 아주 짧은 에피소드에 등장하지만, 유명세만큼은 성경 어느 주인공에 못지않을 것 같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헌금함에 돈을 넣은 사람들 가운데, 이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모두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을 떼어 넣었지만, 이 과부는 가난한 가운데서 가진 것 모두 곧 자기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
— 마가복음 12장 43–44절, 새번역
이 장면만 보면 예수님이 과부를 칭찬하신 것 같습니다. 헌금은 아니더라도 자기 자신을 드리는 숭고한 희생으로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헌신의 맥락과는 결이 다른 이야기 틈바구니에 있습니다. 바로 심판입니다.
헌금함을 둘러싼 심판 이야기
마가복음 12장의 이 에피소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 입성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11장부터 13장까지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이 나오는데, 공통적인 분모가 있습니다. 심판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의 상점들을 뒤엎으십니다. 불의한 포도원 품꾼들 비유로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비판하고, 심판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성전과 심판의 주제는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이 장면 바로 앞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예복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 마가복음 12장 38–40절, 새번역
바로 앞선 이야기에서도 과부가 등장합니다. 율법학자들을 비판하면서, 또 심판 받게 될 것을 말씀하면서 과부를 언급하죠. 예수님이 과부를 언급하시는 무게는 슥 지나가도 읽기에는 매우 무거운 과거의 기억을 가진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억압하지 않고, 이 곳에서 죄 없는 사람을 살해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섬겨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지 않으면, 내가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 하도록 준 이 땅, 바로 이 곳에서 너희가 머물러 살도록 하겠다.
— 예레미야 7장 6–7절, 새번역
예루살렘 성전이 심판 받을 때, 유다의 죄로 경고했던 것 중에 하나는 과부를 억압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는 것을 강조합니다. 과부를 압제했다는 것은 결코 가볍지 않은 죄입니다. 물론 많은 죄악이 있었지만, 유다를 망하게 한 대표적인 죄악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과부나 고아를 괴롭히면 안 된다.
— 출애굽기 22장 22절, 새번역
과부의 옷을 저당잡아서는 안 됩니다.
— 신명기 24장 17절, 새번역
성전 파괴
공교롭게도 예수님은 13장에서 성전이 무너질 것을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성전을 떠나가실 때에, 제자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건물들입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 마가복음 13장 1–2절, 새번역
그 뒤 이어지는 내용 역시도 심판에 관한 것입니다. 가톨릭 스터디 바이블은 마가복음 11장부터 13장까지를, 예수께서 성전 제의(11:11–25)와 그 지도부의 권위(11:27–12:44)를 끝내고, 이어 성전 자체의 종말(13:2)과 지금까지의 세계의 종말(13:24–37)을 예고하시는 흐름으로 정리합니다.
성전이 무너져 나라를 잃고 고통 속에 살았던 유대인들은 마가복음의 흐름을 놓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과거의 죄악으로 성전이 무너졌던 역사를 예수님은 다시 경고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보다 더 큰 권위로 말입니다.

과부의 헌금, 성전에서 벌어지는 탐욕
과부는 두 렙돈을 헌금합니다. 두 렙돈은 얼마였을까요? 렙돈은 당시 유통되던 동전 가운데 가치가 가장 낮았습니다. 일용 노동자가 하루에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면(마태복음 20장 2절), 두 렙돈은 그 품삯의 64분의 1쯤 됩니다.
그것이 그 과부의 생활비 전부였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의무가 아니라 자원해서 드린 것입니다.
당시 성전세는 유대인 남성에게 부과되었던 것이니까요. 가랜드는 그의 주석에서 헌금액이 이렇게 작았다는 것은 이 예물이 자원 예물로만 들어갈 수 있었다는 뜻이라고도 설명합니다. 자원 예물은 성전 건축(출애굽기 35–36장, 역대상 29장 참조)이나 번제에 쓰였고, 번제의 가죽은 제사장들이 받았습니다.
IVP 배경 주석은 당시 성전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12:41–44. Jerusalem’s massive temple had a large treasury, reportedly adjacent to the Court of Women. A later tradition claims that thirteen receptacles for such gifts stood in the Court of Women, accessible to Israelite women as well as to men. Already probably the most massive temple in the Roman empire, supported by an annual temple tax on all adult male Jews (including in the Diaspora), the temple sported ostentatious wealth (such as a massive golden vine).
12:41–44. 예루살렘의 거대한 성전에는 큰 헌금 시설이 있었으며, 여인의 뜰에 인접해 있었다고 전해진다. 후대 전승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여성과 남성 모두 접근할 수 있는 그 뜰에 헌금함 열세 개가 서 있었다. 이미 로마 제국에서 아마 가장 거대한 성전이었고, 디아스포라를 포함한 모든 성인 유대인 남성이 내는 연례 성전세로 유지되었으며, 거대한 금 포도나무 같은 과시적인 부를 드러냈다.
— Craig S. Keener, The IVP Bible Background Commentary: New Testament, 2판, 마가복음 12:41–44
과부가 마지막 동전을 넣은 곳이 바로 성전의 헌금함이었습니다. 그 헌금은 당시 오랜 기간 건설 중이었던 성전을 짓기 위해 쓰였을 수 있습니다. 그 성전은 화려함만큼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권위를 세워주었을 것이고, 그들은 성전을 보며 감탄하는 제자들(13:1)과 같은 반응 위에서 자신들의 자랑거리로 삼았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앞서 율법학자들에게 “과부의 가산을 삼킨다”고 말씀하신 장면 바로 뒤에 과부가 자기의 얼마 되지 않는 돈을 넣습니다. 예수님은 같은 12장 앞부분에서 한 율법학자의 대답을 긍정하십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와 희생제보다 더 낫다는 대답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과부가 걱정 없이 사는 나라, 가난한 자도 먹을 것을 함께 누리는 나라가 되길 바라셨습니다.
Indeed, the widow who throws her last penny into the treasury should be viewed (12:41–44), in the Markan context, as one of those widows whose house (or estate) has been consumed by the avarice of the scribes, not assisted, as the laws of Moses command.
실제로 헌금함에 마지막 동전을 넣는 과부(12:41–44)는 마가의 문맥에서, 모세의 율법이 명하는 도움을 받기는커녕 율법학자들의 탐욕에 집 또는 재산을 빼앗긴 과부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
— C. A. Evans, “Mark”, New Dictionary of Biblical Theology, p.271
헌신을 좋게만 볼 수 없는 구도
자신이 힘들게 번 돈을 십일조로 하나님께 드립니다. 자신의 삶을 헌신합니다. 자발적으로 드리는 마음이 훼손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는 예수님의 평가를 칭찬으로 볼 수 있을까요?
자발적 헌신으로 누군가가 자신의 배를 불리고,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것으로 사용하고 있다면, 어떤 이의 순수함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있다면, 우리의 시선은 헌신만을 향할 수가 없습니다. 선으로 악이 행해지는 구도 속에서 악을 외면하고 선을 칭찬할 수 있을까요? 가난한 이의 헌금으로 호의호식하는 이가 있다면, 욕망을 비판하지 않은 채로는 도저히 헌신을 추켜세울 수가 없습니다. 먼저 보아야 할 것은 헌신하는 손이 아니라, 그것을 짓밟는 발이며, 그 안에 감춰진 약자의 눈물입니다.
과부의 렙돈 이야기에는 죄를 짓는 이들에 대한 심판이 둘러싸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이웃 사랑이 행해지지 않을 때, 자신의 집인 성전까지도 무너뜨리셨습니다. 오늘날도 그분의 진노 앞에 부서지지 않을 철옹성이 있을까요? 반대로 이웃 사랑을 통해 세운 것은 그 모습이 초라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철옹성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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