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정부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이 세계 인공지능 공급망의 "대체 불가한" 자리를 맡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한 달 전, 취업을 앞둔 청년들에게 AI 때문에 일자리를 잃을까 두렵냐고 물었더니 23퍼센트가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지난해 8퍼센트에서 세 배가 됐습니다. 대체 불가의 산업이 되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동시에 대체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노력해야 할 때입니다.
직장이 불안정하고 직업이 사라질 위기에서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소명 의식'도 흔들릴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소명을 직업과 연결해서 생각합니다. 내게 주어진 소명을 찾으라고 권하고, 감동을 받은 청년들은 내가 어떤 직업, 어떤 직종, 어떤 전공을 가져야 할지를 떠올립니다. 이러한 생각은 앞으로 시대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직업이 사라지고 산업혁명에 버금가는, 아니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내가 '소명'이라 믿었던 직업이 붕괴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정체성도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직업으로 소명을 설명하는 문제는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습니다. 평생직장은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직업에 귀천은 없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직업으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배달과 대리, 프리랜서로 일하는 사람에게 "이 직업이 내 부르심"이라는 문장은 어떻게 들릴까요? 아픈 부모를 돌보느라 경력을 접은 사람, 아이를 키우느라 이력서에 빈칸이 생긴 사람은 어떻습니까? 이런 노동에는 직함도 급여도 없습니다. 소명이라는 말이 소외된 사람들의 좌절을 가리고, 어느새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사람에게만 편한 말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휘튼대학의 교수는 이 문제를 이렇게 짚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종종 일과 소명을 뒤섞어, 일을 사람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전제한다. 이렇게 되면 의미 있는 일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의 공백 속에 남겨지고, 소명대로 살아가는 데 실패한 사람처럼 취급된다."
"In practice we often conflate the ideas of work and vocation, treating work as the presumed means by which people fulfill God's purpose in their lives. This leaves people without meaningful work in a vacuum of time and space where they presumably fail to live vocationally."
— 크리스틴 제스키(Christine Jeske), 『크리스천 스칼라스 리뷰』(2020)
직업으로 소명을 생각할 때, 소명을 찾는 방식도 문제입니다. 어릴적 소명을 이렇게 찾으라고 배웠습니다.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보라." "무엇을 할 때 기쁜지 보라." "어떤 재능을 받았는지 보라". 표현은 언제나 수동태이긴 하죠. 주신 것, 나를 부르신 것. 그런데 찾는 눈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향합니다. 이러한 소명에서 과연 하나님이 중심에 있었을까? 각자가 돌아볼 몫입니다.
소명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곁의 사람들이 확인해 주는 것이라고 반박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직업이 소명일 때, 소명의 자리에 시장이 들어옵니다. 소명의 문이 열렸는지는 시장이 확인합니다. 끈끈한 공동체 안에서 확인 받고, 배우고,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직업으로서 내 소명은 노동 시장 속에서 평가 받습니다. 시장이 발급한 자격증은 시장이 회수할 수 있습니다. AI는 그 회수를 앞당길 것입니다. 자본주의 속에서 소명은 과연 하나님 중심인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부름은 대체로 한 사람의 직업이 아니라 공동체에게 주어집니다. 베드로전서가 교회를 제사장이라 부르는 대목이 그렇습니다.
"여러분 자신들도 살아 있는 돌로서 성령님이 거하시는 집으로 세워지십시오. 그리하여 거룩한 제사장 일을 맡아 하나님이 기꺼이 받아 주실 만한 영의 희생제물을 올려 드리십시오." — 베드로전서 2장 5절 (새한글성경)
"여러분 자신들도"입니다.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럿이고, 세워지는 것도 각자의 집이 아니라 '하나의 집'입니다. 쇼베는 이 본문에 붙은 말들이 전부 무리를 가리킨다는 데 주목합니다. 베드로전서에서 족속, 나라, 백성, 집. 개인의 자격을 세는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주석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구절이 종교개혁의 만인제사장 사상의 근거이기는 하지만, 이 구절의 요점은 각 그리스도인 개인의 제사장 신분도 아니고, 각자가 동료 그리스도인에게 제사장 노릇을 한다는 뜻도 아니다. 이 문맥에서 제사장직은 오직 공동체적으로만 이해될 수 있으며, 2장 9절 후반부와의 평행이 보여주듯 그 기능은 모든 인류를 향한 증언을 포함한다." — Paul Achtemeier, 1 Peter (Hermeneia), 벧전 2:5
소명은 개인이 받아 든 자격증이 아니라, 공동체가 세상을 향해 지고 있는 빚인 것이죠.
우리는 소명을 관계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관계는 내가 고른 것 같지만 대부분 주어진 것입니다. 부모도, 형제도, 옆자리 동료도 내가 고른 사람이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주어졌다는 말은 견디라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혼자 만들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관계 속에 두셨다면,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일상도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직업은 사라지더라도 사람은 대체될 수 없습니다. 기계가 공감을 수행할 수 있더라도, 사람처럼 몸과 몸이 부딪히며 대가를 치를 수는 없습니다.6 앞으로 십 년 늘어날 직업으로 한국고용정보원이 꼽은 것은 간병인과 간호사와 치료사입니다.5 몸이 있어야 하고 누군가 값을 치러야 하는 일은 여전히 지속될 것이고, AI 시대 그 본질적 속성이 더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교황청이 인공지능을 두고 펴낸 연구서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는 최초의 본래의 창조를 통해서 형성될 뿐만 아니라, 각각의 진정한 나-너의 만남을 통해 형성됩니다."
— 교황청 AI 연구 그룹, 『인공지능과 만남』
기계가 무엇을 대신하든, 나를 만들어 온 만남을 대신할 순 없습니다.
소명은 내가 얻는 '자리'가 아니라 빚을 지고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큰 선물로 사람의 '몸'을 주셨습니다. 우리처럼 육체를 가지고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우리의 소명은 하나님께 받은 그 방식으로 빚을 갚아나가는 것이지 않을까요? AI가 모든 것을 대체한다고 할지라도 누군가의 곁에 몸으로 함께하는 자리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태초에 관계가 있다."
"Im Anfang ist die Beziehung."
— 마르틴 부버, 『나와 너』(1923)8
있었다, 가 아니라 있다입니다. 태초만이 아니라, 지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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