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바벨탑 이야기를 들으며 농담 삼아 원망하곤 합니다. 그때 그 일이 없었더라면 토익의 늪에 빠지지 않았어도 되었을 텐데. 바벨탑 이야기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이해가 담겨있습니다. ‘사람들이 죄를 지어서 언어가 뒤섞였다.’ ‘사람들이 하늘에 닿는 탑을 쌓는 죄를 저질렀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 다시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셔도 죽지 않을 우리만의 보호 장치를 마련하려는 오만함.
흩어짐을 거부한 도시
그런데 본문을 천천히 읽어 보면 우리는 바벨탑을 절반만 이해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바벨탑은 기술의 발전에서 시작합니다. 돌 대신 벽돌, 진흙 대신 역청을 쓰는 건축의 혁신에서 출발하죠. 이제 그들은 도시를 만들고, 더 높은 건물을 효율적으로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합니다.
“자, 도시를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에 닿는 탑을 세우고, 우리의 이름을 날리자.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도록.”
— 창세기 11장 4절, 새번역 일부 수정
기술을 바탕으로 ‘도시 건설’을 얘기합니다. 도시 속에 탑이 있습니다. 탑만이 아니라 도시 역시도 문제입니다. 마지막에 그 목적을 말하죠. “우리의 이름을 날리자”, “흩어지지 않게 하자.” 먼저 흩어짐에만 주목을 해봅시다. 도시와 탑을 왜 쌓았을까요? 하늘에 닿으려고? 흩어지기 싫어서였습니다. 두려워한 것은 흩어짐이었습니다. 흩어지지 않기 위해 쌓은 것이 바로 도시입니다.
흩어지지 않는 것은 좋은 일일까요? 창세기에서는 흩어짐이 하나님의 뜻과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처음 하신 말씀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1장 28절)입니다. 땅을 채우라는 말은 한곳에 모여 있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한곳에 모여 있으면 빈 곳이 생기고 그것은 ‘충만’이 아닙니다. 같은 명령이 홍수 뒤 노아에게도 반복됩니다(창9:1). 그리고 바벨탑 사건 바로 앞 장인 10장에서 노아의 자손들이 “종족과 언어와 지역과 부족을 따라서 갈라져 나갔다”고 장 전체에 걸쳐 거듭 말합니다. 갈라져 나갔다, 퍼져 나갔다. 10장에서 이것은 저주가 아닙니다. 홍수 뒤에 세상이 다시 채워지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흩어지지 말자”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복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10장을 보면 언어가 이미 갈라져갔음을 이야기합니다. 11장에서 하나의 언어는 그럼 무엇일까요? 흩어지지 않고 모여 살기 위해서는 같은 말, 공용어가 필요합니다. 공용어만으로는 충분하진 않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도시를 건설할 기술을 갖게 되었습니다. 공용어와 기술만으로는 여전히 부족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우리의 이름’은 서로를 하나로 묶어줍니다. 같은 말, 같은 마음으로 짓는 도시. 그것이 바벨탑으로 상징되는 현장입니다.
이것이 왜 문제일까요? 성경 속에서 바벨탑의 현장과 이스라엘의 역사를 잇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파라오는 창고 도시 비돔과 라암셋을 세우기 위해 이스라엘 사람들을 동원합니다(출1:11). 그들이 적 편에 서지 않도록, 떠나지 않도록(출1:10). 즉, 이집트라는 이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나에서 떨어져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러고는 이스라엘에게 벽돌 빚는 일을 하게 합니다. 벽돌을 만드는 일은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나오죠. 모세와 아론이 광야로 가서 하나님께 희생제물을 드리게 해달라고 요구할 때, 이를 거절하면서 벽돌을 만드는 일의 강도를 높이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른 생각을 품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제국의 폭력입니다.
바벨탑의 현장은 이처럼 제국의 역사 속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 언어와 도시, 우리의 이름은 결코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을 하나로 뭉치게 할 때, 억압이 되기 쉽습니다. 바깥에 머물려는 사람을 억지로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할 때, 바깥이라는 개성을 유별난 것으로 취급해버리곤 합니다. 바벨탑의 한 언어, 도시, 우리라는 이름은 획일화입니다. 전체주의의 논리이고 제국의 폭력입니다. 우리는 이 논리 속에서 일어났던 개인에 대한 억압을 쉽게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도시가 부추기는 두려움
도시가 나쁜 것일까요?
도시의 순기능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문명은 도시 속에서 발전해왔습니다.
다만, 성경에서 상징하는 도시는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도시는 흩어지기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세워집니다. 가인이 그랬고, 바벨탑 이야기에서도 그렇습니다. 브루스 왈트케(Bruce K. Waltke)는 이 두 이야기를 연결하며 ‘존재론적 의미와 거처의 상실’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에게서, 그리고 서로에게서 떨어져 나온 사람이 가진 두려움이죠. 그 두려움은 도시를 만듭니다.
도시는 역으로 우리의 마음에 두려움을 부추기는 듯합니다. 이곳에 살지 않으면 길이 없다고. 이 언어를 쓰지 않으면 뒤처지게 된다고. 우리라는 이름에 참여하지 않으면 혼자 남게 된다고.
'사람은 서울로 가야 한다'는 경구는 지역에 있는 대학을 '지잡대'로 통칭하고, 지방을 모두 식민지로 만들어버린 서울공화국은 서울만 마치 '정식 무대'인 것처럼 만들어버렸다.
— 이혜미, 《착취도시, 서울》
도시라는 이름으로 은근히 행해지는 획일화의 폭력이 옛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도 ‘하나 됨’이라는 이름으로 다름을 존중하지 않기도 합니다. 여기를 떠나면 이단에 빠진다고, 마지막 때가 가까우니 외부의 소리에 귀를 닫으라고, 두려움을 부추겨 ‘우리’라는 틀에 가둬버립니다. 때론 그 ‘우리’라는 이름으로 묶인 숫자, 그들의 헌금이 목회자의 권력과 부가 되기도 하죠. 도대체 무엇을 위한 하나 됨일까요?
바벨과 반대로 행동한 사람
바로 다음 장. 하나님은 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온 인류가 한곳에 뭉치려던 이야기 바로 뒤에, 한 사람이 떠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흩어지지 않으려던 사람들의 도시에는 바벨이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반면, 어디가 될지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라는 말에 순종한 사람의 이름을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십니다. 창세기에서 복은 뭉친 자리에서가 아니라, 떠난 사람에게서 다시 시작됩니다.
그렇게 시작된 복은 획일화 속에서 한 언어로 모이는 하나가 아니라, 각기 다른 언어 속에서 하나가 되는 오순절 사건을 통해서 새로운 차원에 이르게 됩니다.
새 창조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로 뭉뚱그려진 덩어리로도, 단일한 세계 문화로도 그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를 거쳐 온 인류의 영광스러운 다양성이 그대로 이어진다.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저마다의 풍요와 찬양을 가지고 하나님의 도성으로 들어간다(계 7:9; 21:24-26).
— 크리스토퍼 라이트, 『Old Testament Ethics for the People of God』, 작업 번역
The inhabitants of the new creation are not portrayed as a homogenized mass or as a single global culture. Rather, there is the continuing glorious diversity of the human race through history: people of every tribe and language and people and nation will bring their wealth and their praises into the city of God (Rev. 7:9; 21:24–26).
혹시 우리는 하나 됨이라는 구호 속에 숨어 해결할 수 없는 두려움을 덮으려고 하진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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