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공교롭게도 요즘 그나 나나 직장이 없었다. 몇 년 만에 만났는데도 편하게 이야기는 이어졌다. 설 연휴에 만났으니만큼, 가족관계 속에서 느끼는 어려움도 이야기 주제 중 하나였다. 우린 각자만의 쉽지 않은 상황에서 자기 삶을 살아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어릴 때는 미처 이해 못 했던 그 친구의 삶이 조금 이해되는 나를 발견했다. 만남 후에 내가 느낀 것을 남편에게 말하니, 단호한 답이 돌아왔다.
“여보, 너무 쉽게 상대를 연민하지 마.”
내가 그를 연민했나?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분명하게 내가 느낀 감정은 연민이 맞았다. 몇 년 만에 만나서, 겨우 몇 시간 대화한 것을 가지고 나는 그 친구의 삶을 평가했다. 부끄러워졌다. 그럼, 연민이 아니라 무슨 선택을 해야 하는 거야? 이어지는 내 질문에 답이 돌아왔다.
“그 사람이 선택한 삶의 모습을 존중해야지.”
엄마는 연민을 잘했다. 아마도 오랜 교회 생활에서부터 비롯된 신념 혹은 습관 때문이리라 나는 추측한다. ‘주일 학교’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일요일 어린이 교회 모임에서 엄마는 오랫동안 교사로 봉사했다. 내가 오래 다녔던 교회는 가난한 동네에 있었고, 가난한 아이들이 많이 출석했다. 엄마는 그들을 잘 챙겼다. 한 번은 나와는 아무런 친분이 없는 아이들도 내 생일 파티에 불러 맛있는 음식을 먹였다. 내 생일인데,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만 불러 축하받고 싶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엄마가 가지고 있는 연민의 방식은 내게도 자연스레 흡수되었다. 연민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을 받아들이기 쉽게 만들어주는 좋은 도구였다. 나는 이 도구를 나쁘게 생각해 본 적 없이 자랐다. 연민을 사용하면 나에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도, 불같이 화를 내는 사람도, 때론 내게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도 다 이해할 수 있으니까. 나는 그들을 이해하고 품는, 마음이 넓은 존재로 살 수 있으니까. 때로는 타인을 연민하기 버거워질 때도 있었다. 그럼, 그 연민의 방향은 타인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졌다. 나는 나를 연민했다.
정말 연민이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좋은 방법이 맞나? 이 방법이 정말 옳은 것인지 의심이 생긴 순간은, 아마도 내가 누군가에게 연민을 받았을 때부터였다.
내 의도와 상관없이 누군가가 나를 연민하는 순간, 나는 불쾌하다. 관계의 불균형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보다 더 가진 존재, 나보다 더 잘났다고 느끼는 존재를 연민하지 않는다. 연민은 주로 덜 가진 존재, 덜 잘나고 덜 행복해 보이는 존재를 대상으로 삼는다.
타인을 향해 쉽게 연민을 던지는 부류는, 자기도 오래 연민해 왔을 가능성이 높다. 건강한 자기 수용을 위한 연민은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듯, 과유불급이다. 과한 연민은 자기 세계의 고립을 불러온다.
내가 옆에서 지켜보며 가장 많이 엄마의 연민을 받은 대상은, 다름 아닌 아빠였다. 나는 그 순간을 목격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졌다. 정말 아빠는 엄마의 연민을 받을 존재인가? 그렇지 않다는 답이 나왔다. 그러나 아직 두 사람 사이에 이 주제로 대화가 나올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리고 그런 관계 속에서 30년 넘게 살아온 엄마를 나는 종종 연민한다.
꽤 오랜 시간 내가 이 연민의 굴레 안에 살았다는 것을 발견하곤, 복잡한 마음이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아무도 연민하지 말라고? 머리로는 쉽게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만, 과연 그렇게 생각처럼 그대로 살 수 있나, 사람이. 그저 지금은, 내가 그 굴레 속에 있다는 것을 인지한 것으로 만족해 보기로 한다. 조금씩 그 굴레에서 벗어나, 연민이 아닌 존중을 선택하는 방법을 찾아보기로 결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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