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까지만 핑계댈게요.

 학기말 방학을 앞둔 요즘 국어 시간엔 시를 배운다. 아이들 눈높이에 딱맞는 유쾌한 시를 함께 읽으면 나까지도 덩달아 즐거워진다. 오늘도 국어 시간에 공감가는 시를 만났다. 제목은 '지하주차장'. 차를 가지러 지하 주차장에 갔다가 한참 만에 돌아온 아빠가 왜 늦었는지 온갖 핑계를 대는 유쾌한 내용의 시다. 시를 읽기 전에 오늘의 키워드를 말해주었다. 부모님, 거짓말, 핑계. 친숙한 낱말들에 아이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오늘의 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지하 주차장

글:김현욱

지하 주차장으로

차 가지러 내려간 아빠

한참 만에

차 몰고 나와 한다는 말이

 내려가고 내려가고 또 내려갔는데 글쎄, 계속 지하로 계단이 있는 거야! 그러다 아이쿠, 발을 헛디뎠는데 아아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깊은 동굴 속으로 끝없이 떨어지지 않겠니? 정신을 차려 보니까 호빗이 사는 마을이었어. 호박처럼 생긴 집들이 미로처럼 뒤엉켜 있는데 갑자기 흰머리 간달프가 나타나 말하더구나. 이 새 자동차가 네 자동차냐? 내가 말했지. 아닙니다, 제 자동차는 10년 다 된 고물 자동차입니다. 오호, 정직한 사람이구나. 이 새 자동차를...

에이, 아빠!

차 어디에 세워 놨는지 몰라서 그랬죠?

차 찾느라

온 지하 주차장 헤매고 다닌 거

다 알아요.

피이!

 "누구나 살면서 자기 실수에 핑곗거리를 찾고 변명을 해본 적이 있죠? 여러분 부모님과 선생님처럼 어른들도 때로는 핑계를 대잖아요." 아이들은 어린이만 그러는 게 아니라는 말에 크게 끄덕이며 공감했다. 아침에 지각했을 때, 숙제를 안 해왔을 때, 그리고 동생과 싸웠을 때도. 생각해보면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해명하는 상황을 참 많이 겪는다. 신기하게도 아이들은 시에 나오는 아이의 입장보다는 온갖 말도 안되는 핑계를 대는 아빠의 입장에 더욱 공감해주었다. 아빠가 왜 늦었을까? 그 한 마디에 열 가지 이상의 가능성을 찾아냈다. 사고가 났을 것이다, 길치여서 어디에 차를 뒀는지 헷갈렸을 것이다, 가족들한테 거짓말하고 편의점에 들리느라 늦었을 것이다 등등. 자기가 잘못했을 때 부모님과 선생님에게 변명을 늘어놓던 상황을 떠올리면서 시 속의 아빠를 변호하는 것 같았다. 다들 어쩔 수 없는 사정 하나쯤 있는 거잖아요! 익숙한 경험 속에 모두가 한 마음이 되었다. 이 시의 포인트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잔뜩 늘어놓는 부분이다. 친구와 약속을 어겼을 때나 혼날 위기에 처했을 때 등 원하는 상황을 떠올려 시를 패러디해보기로 했다. 어떤 황당한 핑계를 떠올려도 괜찮다는 말에 장난꾸러기 몇명의 눈빛이 빛났다. 합법적으로(?) 신나게 변명거리를 써보는 시간이다. 시가 마음에 들었는지 할 말이 많은데 종이가 모자라다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렇게 적은 시는 칠판에 붙여 함께 읽었다.

제목:지각한 일

지각한 게 아니라 어떤 일이 있었어요.

 뭐냐면 집에서 나오는데 슈퍼맨이 나한테 주먹을 날려서 내가 그 손을 딱 잡아서 엎어치기를 하고 슈퍼맨을 무찔렀는데 갑자기 고릴라와 킹콩이 나타나서 킹콩도 무찌르고 다시 학교를 가는데 좀비가 우글우글... (생략)

제목:영어 숙제

지난주에도 이번주에도 숙제를 안 한 수정이가 핑계랍시고 한다는 말이

 아니 글쎄 내가 숙제를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닫혀 있던 창문이 열리더니 영어책이 밖으로 날아간거야. 그래서 주우러 나갔는데 지나가던 차 안에 있던 사람이 영어책을 주워가서 영어책을 다시 사느라 숙제를 못 했...

에이, 수정아! 숙제 하기 싫어서 그런 거 다 알아!

 사실 그 동안에는 실수를 저질렀을 때 “아니 그게 아니라-” 핑계를 대려고 하면 “핑계대지마!” 말도 다 못해보고 혼이 나거나 기껏 말해도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나도 그렇게 말한 적 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다같이 시 하나에 웃고 열심히 시를 완성한 걸 보면 빈틈이 생기고 변명하며 사는 건 다들 똑같은 것 같다. 그리고 얘들아 그거 아니? 사실은 선생님도 핑계댈 거 투성이야.

제목:1월1일부터 새출발하자.

잡동사니 널부러진 방문을 여니

아무도 뭐라 안 하는데 혼자 한숨 나온다.

뜨개질용품은 왜 샀고, 가계부 왜 펴놨어?

한참을 고민하다 떠오른 말이

 아니 뜨개질을 좀만 해도 실이 꼬여서 속도가 좀처럼 나질 않잖아. 저번엔 10cm는 짠 것 같은데 너무 두꺼워서 다 풀고 다시 하려고 놔둔 건데 할 일이 그것 뿐이야? 읽다만 책도 여러 권인데 그게 또 우선순위는 아니고 일단 중요한 일부터 해야할 거 아니야. 그런데 나한테 가장 중요한 일이 뭐지? 이젠 그것도 헷갈리네. 그리고 가계부도 야심차게 샀는데 집에만 오면 잠이 쏟아지고 쓰려고 하면 펜은 왜 또 안보이는거야. 페인트칠은 언제 끝내지? 재테크 공부도 했어야하는데.. 에이 그냥 이번 달은 쉬엄쉬엄하자. 학교에서도 불태웠는데 집에서도 불태워야돼? 아 그래 아무도 그렇게 말 안 했지. 그럼 오늘도 조금만 더 쉬어보자. 푹 쉬고 멍하게- 그래 역시 휴식이 최고다. 올 해도 얼마 안 남았는데 그냥 즐겁게 놀자. 책상 정리도 뜨개질도 가계부쓰기도 독서도 방 정리도 글쓰기도. 1월1일부터 새출발하자.^^

작가의 말

🙂 올 해도 얼마 남지 않았네요. 올 해 세웠던 계획 얼마나 지켰냐는 질문, 익숙하지 않으시나요? 전 그런 질문을 들을 때마다 안 지킨 것 투성이라 한숨이 나와요. 요즘엔 마음 먹고 시작한 모든 일들이 지지부진하네요. 그래도 오늘은 마음껏 핑계대고 한없이 관대해지고 싶어요. 저와 같은 분 계시나요? 괜찮아요! 다 그렇게 사는거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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