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봐요, 오르한 파묵씨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곳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오늘도 난 걸어가고 있네. god의 ‘길’이라는 노래입니다. 이상을 쫒기엔 삶이 버겁고 현실에 안주하기엔 이상이 붙잡죠. 이상과 현실을 조율하며 산다는 건 어쩌면 삶을 제대로 살고 있다는 반증일지 모릅니다. 오늘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슬쩍 풀어볼까 합니다. 

이봐요, 오르한 파묵씨

글 : 선재

자판을 두드린다. 밤은 깊어 가는데 나사가 빠진 손가락은 도무지 멈출 줄 모른다. 오래전부터 자판을 두드려왔다. 언제부터였더라…까마득하다. 시초가 언제였는지, 어떤 계기로 두드리게 되었는지 헤아릴 수 없지만, 나사 빠진 손가락은 그 시절을 오롯이 기억하고 그리워한다. 눈이 침침하여 잠시 안경을 벗고 독서대에 놓인 두툼한 양장 도서를 우두커니 바라본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남자는 집필에 들어가기 전 낡은 손목시계를 책상에 올려놓고 권투 경기에 나가는 사람처럼 투쟁을 준비한다. 그리고 대여섯 시간 글을 써나간다. 시간관념이 정확한 남자는 밤 11시에서 새벽 4시까지 글을 쓰고 잠자리에 든다. 나는 남자의 글귀에 빠져든다. 상념에 젖은 남자가 말한다.

-담배를 끊은 지 272일이 되었다.*

남자는 담배를 피우던 시절의 자신을 옛 정체라고 부른다. 옛 정체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 슬로모션 세상 속을 거닐고 주름잡던 불멸의 사람이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 시공간은 오만가지 감정이 오르내리고 과거를 재단하고 현재를 수정하며 미래를 설계한다. 변하지 않는 세상을 거닐며 사색을 즐긴다. 어느 날 남자가 신문을 펼쳐든다. 건강에 대한 칼럼을 읽던 남자는 불현듯 담배로 인해 죽을 수 있다는 공포에 휩싸인다.

자욱한 연기가 걷힌다. 슬로모션 세상을 벗어난 남자는 급변하는 세상과 마주한다. 초조함이 엄습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주름잡던 불멸의 사람은 온데간데없다. 헐벗은 듯 무력감에 휩싸여 고독할 뿐. 다시 밤의 격렬함 속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죽음의 그림자와 마주한 그는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남자의 상념이 나를 흔든다.

손가락이 온전하던 그 시절, 세상의 중심은 바로 나였고, 자판 소리가 요란하도록 거침없이 써 내려갔다. 그 영역은 오로지 나와 글만이 존재했고 타인은 개입할 수 없었다. 문법과 플롯, 비문 등등 엉성하기 짝이 없지만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누비며 자유롭게 글을 썼다. 단 한 사람, 나와 취향이 비슷한 친구에게 글을 보여주고 조언을 받았지만 그리 개의치 않았다.

어느 날, 신문을 읽다 광주에서 ‘소설은 나의 힘’이라는 타이틀을 내세운 아카데미 공고를 보고 무작정 신청했다. 강의가 거듭될수록 시작의 설렘은 사라지고 나의 영역은 산산조각 났다. 자판 위에서 춤추던 손가락에 금이 가고 나사가 헐거워지기 시작했다. 입고 있던 옷을 벗고 세상의 잣대에 맞춰 옷을 재단하고 껴입고 보니 어느새 손가락의 나사가 빠져 있었다.

담배를 끊기로 작심했던 남자가 결핍을 맛보았듯, 낯선 세상으로 발을 들인 건 온전히 나의 선택이다. 만만치 않은 수업에 융화되어 한 작품, 한 작품 글을 쓰고 퇴고하는 과정 속에서 뼈대가 자라고 살이 붙었지만, 그 시절 내가 써 내려가던 순수와 자유의 세계는 퇴색되고 흩어졌다.

다시 밤의 격렬함 속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나는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오르한 파묵 에세이집「다른 색들」담배를 끊은 지 중에서

＊오르한 파묵 : 튀르키예(터키) 소설가. 튀르키예의 정체성과 역사를 탐구한 작품들로 잘 알려진 작가로 2006년 작품 '눈'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함 (출처. 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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