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역과 니은을 세우며 걸어갑니다. 기역과 니은. 초성을 떠올렸을 때 어떤 단어가 가장 먼저 생각나시나요. 제 머릿속에 스친 단어는 가난과 가능이었습니다. 너무나 대비되는 말이죠? 그런데 동시에 떠올릴 수 있다니. 인간의 뇌는 참 신기합니다. 극과 극을 잘 알아요.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이 있죠.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다. 뭐 그런 말들이요. 저는 실지로 강한 부정의, 아니 강한 긍정의 힘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 진가는 바닥을 찍고 올라올 때 나타나지요.
최근 PT 끝에 워킹 런지로 운동을 마무리하는 날이 늘어나고 있는데요. "레드카펫, 버진로드... 뭐 그런 길은 원하지도 않을게요... 제발 워킹 런지만은..." 하고 현실을 부정했지만, 이내 이리저리 흔들리는 기역과 니은을 그리며 나아갔습니다.
워킹 런지를 할 때는 왜 그토록 눈물이 나는지. 그래도 제자리에서 버틸 때보다는 재밌습니다. 울면서 겨자 먹기의 재미는 이런 것이구나 하고 걸어갑니다.
제가 다니는 헬스장은 그리 넓지 않습니다. 그래도 몇 달 전 대비 사람들의 눈치를 덜 보게 됐어요. 사실 눈치 볼 힘이 있다면 몇 세트 더 할 힘이 남아 있다는 거니까. 그걸 트레이너한테 들키면 안 되니까. 눈치도 눈치껏 안 보게 되었죠. 인간의 요령은 참 신기합니다. 그 순간 살아남기 위해 그동안 살기 위해 강화한 지독한 습관도 버리니까요.
하체 운동을 하는 날은 발바닥의 힘을 온전히 느낍니다. 인간의 바로서기. 그 광경을 있는 힘껏 받쳐주는 발바닥. 언젠가 앨범에서 막 태어난 저의 발도장을 본 적이 있어요. 그토록 작고 귀엽던 발바닥이 어느덧 이렇게 장성하다니.
운동을 하면서 발에 대한 애착이 커졌어요. 조금 더 쿠션감이 좋은 신발을 사고 싶고, 언제나 촉촉하게 빛나는 발꿈치를 유지하고 싶어요. 저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발을 대신할 좋은 것들을 찾기도 해요. 바퀴와 날개 달린 교통편을 이용해 멀리 도망가듯 여행하고 싶은 일상을 살아요.
구독자 님의 일상은 어떤가요? 마음을 생각하면 가난한가요, 가능한가요? 워킹 런지를 하면 조금 더 탄탄한 엉덩이로 오래 앉을 수 있는 힘도 길러진대서 이 글도 열심히 온몸으로 기역자 니은자 그리다 씁니다. 혼자 있을 땐 기역과 니은만 그리기 바쁜 삶이지만, 이따금 좋아하는 누군가를 만나 두 팔로 큰 시옷과 이응을 그리며 포옹하는 하루를 보낸다면 좋겠습니다.
시옷과 이응. 초성을 떠올렸을 때 어떤 단어가 가장 먼저 생각나시나요. 제 머릿속에 스친 단어는 사연과 사이입니다. 사연 없는 사람 없다지만, 스스로와 사이 좋을 때 인간은 뭐든 해냅니다. 마음이 가난했던 시작이었지만, 가능한 많은 것을 키워내길. 삶의 바닥을 힘껏 경작하며 맑은 날 구름처럼 가벼워지는 꿈을 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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