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쫄쫄보의 유서

제17화 집요한 구석

2024.11.21 | 조회 3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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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박사 김민지

생활 전공자를 위한 내적 대화 콘텐츠

당연한 걸까요. 나이 들면 아플 일만 남았다는 어른들의 말씀. 그걸 또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상황이, 정말로 아픈 상황이 언젠가 제게도 오겠죠. 오늘 낮 엄마에게 문자를 받았습니다. 대상포진에 걸리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 김장 그거 하지 말라니까는..."

그 말을 하면서도 사실 저는 그 말이 소용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어디 김장뿐일까요. 세상 아프게 하는 일은 참 많습니다. 

몇 달 전 친한 친구로부터 부모님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를 웃게 한다고 전화해 별 쓰잘데기없는 농담을 늘어놓다가 통화 끝에 몇 가지 건강식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의사의 진단이 있어야 먹을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엄마의 문자를 받기 전 지난 주말. 시집서점에 들러 공고를 보고 신청해 두었던 신년사주를 보고 왔습니다. 상담 내용에 어머니 건강을 신경써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 점이 내내 걸리더니 이렇게 곧장 걱정되던 일이 벌어지니 조금 놀랍더라고요.

와중에 엄마는 예전에 예방주사를 맞아서 그나마 괜찮을 것 같다고, 저에게 온갖 예방주사 목록을 보내면서 너도 맞으라고 하더군요. 지난번 냉장고 교체 사건 이후 엄마라는 존재의 레이더에 대해 다시금 경탄하는 동시에 스스로 애석했습니다.

저는 엄마를 닮아 어딘가 집요한 구석을 타고났지만, 엄마처럼 그렇게 다부지게 살아갈 현명함이 부족합니다. 아직 엄마로서의 경험이 없기도 하고 살면서 엄마가 될 일이 있을까 싶은데. 지난 주말 들었던 내용은 좀 의외였습니다.

걱정하는 제 얼굴을 보고 어머니 건강 문제가 아니라면 임신할 운이 들어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뜨악했지요. 전자의 일이 생기면 너무 마음이 아플 것이고, 후자의 일이 생기면 너무 골치가 아플 것이기에. 후자의 가능성이 더 낮은 것을 마냥 안도할 수만은 없고, 그 가능성을 낮추는 대가로 전자의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접어들자 고개를 크게 내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둘 다 현실성 없는 이야기다 생각하며 걸어가는 길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서 건강검진 좀 받자 당부했지요. 그리고 지난 주 야근하던 중에 도착한 메시지 하나. 나는 솔로 신청하라는 얼토당토않은 엄마의 권유에 웃음이 터지기도 했습니다.

어제 됐다고 됐다고 해도 기어코 보내신 김치가 문앞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전 이맘때 할머니 장례를 치르고 돌아와 엄마, 이모, 숙모 곁에서 함께 마당에서 찬 배추에 양념을 무치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돌아가실 줄 모르고 준비한 김장재료들이 한데 버무려지고 익어가는 내내 많이 슬펐습니다.

저도 이런데 엄마는 어땠을까. 감히 상상하지 않는 방식으로 지내는 젊음은 어리석기도 하지만, 어른들은 그렇게 지내도 된다는 듯 말없이 기다려주곤 합니다. 요근래 모든 일상이 그랬어요. 그러면서도 자주 허무해져 문득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 생각과 무관하게 많은 것을 해낸 올해 끝이 보입니다.

무언가 하고 싶은 게 있고, 그걸 해낼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은 나와 주변이 모두 무탈하다는 행운일 것이기에. 따로 횡재수가 없고 고단하기만 하다고 여겼던 제 삶도 그런 측면에서 볼 때는 몇 년치 행운이 있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새해에는 무탈이라는 행운이 가득하길 바랍니다. 그게 제가 바라는 전부라고. 2024년 11월 21일 유서에 적어봅니다.

저녁에 따뜻한 국화빵을 먹는 행운이 있었어요
저녁에 따뜻한 국화빵을 먹는 행운이 있었어요

추신, 첫 시집에 실린 「불릿의 시」를 비롯한 몇몇 시는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던 가까운 어른들의 기다림이 자양분이 되어 쓸 수 있던 시입니다. 엄마의 엄마, 아빠의 엄마... 그리고 엄마와 아빠... 저도 언젠가 그런 기다림으로 무언가를 새롭게 세상에 내놓을 수 있을까요. 그게 안 되더라도 태어난 이상 일단 살아보려 합니다. 한동안 야근 때문에 하지 못했던 운동을 어제 잠깐 집에서 했고, 오랜만에 플랭크 자세로 버텨보니 다시금 새겨지던 스스로를 향한 당부가 있었습니다. 모두 건강하세요. 맛있는 풀빵이 거리에 있고, 김치가 익어가는 겨울. 잔잔히 웃고 싶으실 때 『시끄러운 건 인간들 뿐』도 펼쳐도 좋겠다는 다소 시끄러운 당부도 마저 남깁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친구야 무너지지 말고 살아내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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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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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aura

    1
    about 6 hours 전

    오늘은 '돌아가시기 전에 돌아가실 줄 모르고 준비한 김장재료들이 한데 버무려지고 익어가는 내내 많이 슬펐습니다.' 이 문장을 마음에 담아갑니다 :) 목요일도 파이팅하세요!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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