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반복해서 누르는 번호들. 자판들. 어떤 날은 의식하고 누르다가 틀리기도 합니다. 제게는 몇 개의 암호가 있습니다. 너무 어렵지도 쉽지도 않게 만드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기까지 몇 번의 시행착오가 있었죠. 어떤 암호들은 터무니없이 만들어졌습니다. 암호마다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요. 그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해져도 그 암호만은 기억합니다.
요즘은 암호를 설정할 방법이 여럿인데요. 번호를 입력하세요. 패턴을 그리세요. 지문을 인식하세요. 얼굴을 인식하세요. 요즘은 얼굴이 자주 암호가 됩니다. 눈이 반쯤 감긴 아침에도 얼굴을 정신없이 대면 잠겼던 휴대폰이 곧장 풀립니다. 그 핑계로 알람을 쉽게 꺼 버리고 지각을 합니다. 여러 개 맞춰도 소용없는 걸 보면 요즘 엄청 억지로 사는 시기인가 봅니다. 아니면 엄청 열심히 살아서 피곤한 시기인가 긍정적 의문으로 생각을 돌려 보는 늦은 새벽입니다.
자정 넘어 야근을 마치고 지문을 남기며 회사 출입문을 닫고, 또 돌아와 집 현관을 열면서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죽으면 이 잠겨 있는 이야기들이 어떻게 풀릴까. 스스로 잠갔다 풀기를 반복했던 모든 이야기를 그 누구도 풀어내지 않았으면, 풀고 싶을 때마다 풀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버젓이 내어 둔 이야기들만 봤으면 하는 마음엔 단정했으면 하는 욕심이 잔뜩 깃들어 있는 것 같달까요.
그럼에도 정리는 되지 않습니다. 지난 금요일에는 퇴근하자마자 고속버스를 타고 강릉에서 내렸습니다. 토요일 아침 경포대 해변 인근에서 5km를 완주하고 돌아왔습니다. 이렇다 할 준비도 없이 난생처음 참가하는 뜀박질 대회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왔습니다. 처음 맛보는 듯한 초코파이와 바나나, 무엇보다 숨 고르며 마신 물맛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반환점을 돌면서 땀과 눈물이 비슷한 속도로 맺혔다 바람에 식는 순간을 맞이할 때 참 좋았습니다. 제 허리만큼 키가 자란 아이들. 그 아이들과 발을 맞춰 뛰는 부모님. 나란히 가다가도 등을 밀어주고 손을 잡아주는 연인들. 그 틈에 홀로 뛰다가 여든하나에 참가하신 분 옆에 서서 뛰었습니다. 정말 좋은 호흡이셨습니다. 적당한 보폭이었습니다. 의도치 않게 좋은 페이스메이커를 만나 36분대로 결승선에 들어왔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조금도 멈추지 않고 걷지도 않았다는 것에 큰 의의를 두기로 했습니다. 유년기 천식으로 체육 시간만 되면 양호실 갈 궁리만 하던 제 인생에 일어날 수 없던 일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 예상할 수 없던 일 하나를 해내니 조금 더 살아볼 힘이 나더군요. 돌아오는 기차에서 이 대회 참가를 제안한 언니와 대회 전날 밤 나눈 대화를 회상했습니다.
힘든 일정에 달리기까지 하는 언니에게 열심히 사는 이유를 물으니 일찍 죽으려고 그런다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그 이야기 반은 농담이고 반은 진담이라는 걸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직접 달리고 보고 나니 더 그랬습니다. 어느 날은 농담에 무게가, 어느 날은 진담에 무게가 더 실리는 반복. 쉽게 유추할 수 없는 삶 속에서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지도 않는데 가끔은 더없이 지루하고 좋은 일이 드문드문한 방식이라도 연속될 거라는 기분도 희미합니다.
이 희미함 속에서 어떤 인식을 합니다. 의식하면 틀린다. 그냥 누르고 보자. 좋지 않은 예감도, 나아지지 않을 거라는 무력함도 일단은 누르고 보자는 마음. 그 마음으로 뛰었던 시월.
반환점을 찍기 전까지는 눈앞에 놓인 제 그림자를, 반환점을 찍은 후에는 앞서가는 사람의 그림자를 따라 뛰었습니다. 해가 떨어지는 방향이, 바다가 보이고 바람이 부는 순간이 다 좋았습니다. 그 경험은 일종의 패턴 그리기로써 어떤 좋은 날의 암호가 되었다고. 2024년 10월 16일 유서에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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