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만자남 감량일지

제3화 비하인드 넥 프레스

2024.05.11 | 조회 7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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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초 운동을 시작할 무렵엔 턱끝을 간신히 맴도는 단발이었습니다. 당시엔 자꾸만 힘없이 길어지는 듯한 시간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저는 권태에 취약한 인간이라, 마음이 시드는 상황이 오면 주변 정리도 못한 채 항상 새로운 일을 벌이곤 했습니다.

머리카락을 자르는 일은 그중 가장 손쉬운 결정이었고, 늘 고만고만하게 길이만 다듬다가 두 뼘 이상의 머리카락을 싹뚝 자르고 온 그날만큼은 참 홀가분하더라고요. 그러나 한때의 단정함을 꾸준히 유지하는 건 또 다른 문제라서, 지금 저는 애써 잘랐던 머리를 다시 기르는 중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변덕스럽고, 변덕스러운 가운데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힘이 있어요. 순리라면 순리이고, 오기라면 오기겠죠.

석 달 좀 넘게 운동을 하면서 몸에서 가장 먼저 윤곽을 드러낸 건 얼굴이었고, 그다음은 어깨선이었습니다. 조금 더 선명해진 어깨선에 닿을락말락한 머리카락을 보며 의식하지 않고 내 할 일 하면서 기다리면 찬찬히 돌아오는 게 그래도 있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헬스장에서 하는 어깨 운동 중에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지만, 앞으로도 영영 안 할 것 같은 운동이 하나 있는데요. 바로 비하인드 넥 프레스입니다.

"관절에 무리를 주는 운동이라면 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PT를 받으면서 내내 뇌리에 남았던 부분은 관절에 무리가 갈 것 같은 동작을 트레이너님이 애초에 시키지 않는다는 거였어요. 몸에서 자주 접히는 만큼 마찰을 겪는 관절을 위해야 즐겁게 오래 운동할 수 있으니까요.  

우리 마음에도 관절 같은 게 있지 않을까요. 자주 접히며 마찰을 겪는 부분. 그런 게 분명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마음에 무겁게 붙은 겁들을 살처럼 뺄 수 있다면. 저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어요. 사람에겐 사랑이라는 운동이 있고, 그 정성스러움과 꾸준함은 삶에 필요하니까. 

얼마간 침대 맡 책장에 꽂혀 있던 안톤 체호프의 『사랑에 관하여』 속 단편을 읽다가 일기장에 옮겨 적은 두 부분이 있습니다. 


*저는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고, 심장이 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그제야 우리의 사랑을 방해한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불필요하고 사소하고 기만적이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사랑할 때, 그리고 그 사랑을 생각할 때는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행복이나 불행, 선행이나 악행보다 더 고상한 것, 더 중요한 것에서 출발해야 하며, 아니면 차라리 아무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전에는 이런 서글픈 순간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온갖 논리로 스스로를 안심시키려 했다면, 이제는 그런 논리를 펼 겨를이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깊은 연민을 느꼈고, 진실하고 다정한 존재가 되고 싶었다….

*「사랑에 관하여」 /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운동을 할 때, 아무 생각하지 말고 동작 하나하나, 호흡 하나하나를 가다듬는 데 신경 쓰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사랑을 할 때도 비슷한 말을 자주 들었던 것 같습니다.

제 페이스에 혼자 쏠려 하는 건 아무래도 즐겁게 오래 할 수 없습니다. 소중한 마음을 조각으로 버려두지 않는, 관절과 같은 마음을 위해주는 일을 이제라도 조금씩 해야겠습니다. "깊은 연민"으로, "진실하고 다정한 존재"가 되겠다는 각별함으로.

 

추신, 안녕하세요. 이번 레터는 평일이 아닌 주말에 보내 봅니다. 이제 만자남은 윗몸 일으키기 20번을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소식과 함께요.

그리고 다음 달, 유월에 드디어 '만물박사 김민지' 이름 걸고 책이 한 권 나옵니다. 이 메일링 서비스를 시작한 초창기에 발행하던 사물과의 인터뷰 콘텐츠를 바탕으로 한 책이에요. 레터로 발행되지 않았던 글이 많이 실려 있고, 위트 넘치는 일러스트 작가님이 함께 지면을 채워주셔서 읽는 재미가 쏠쏠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세한 소식은 책이 나오는 날 한 번 더 공유드릴게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길가에 장미가 많이 피어난 오월, 몸과 마음 선명하게 보내시길 바라며 요즘 푹 빠진 올리비아 딘의 노래 하나 두고 갈게요. 자막 설정을 하셔서 가사도 함께 마음에 담으면 더 좋습니다.🌹

마음이 반기는 사랑에 기꺼이 뛰어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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