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쫄쫄보의 유서

제16화 수능한파

2024.11.14 | 조회 632 |
0
|

내일은 특별히 추울 거예요. 수능이니까. 근데 예상과 다를 수도 있어요. 기후위기니까. 어쨌든 현재 기준으로 흐리고 비가 올 거라는 예보가 있습니다. 기후까지 변동이 큰데 요즘 입시제도는 어떤지 모르겠네요. 변동은 변동이고, 혁신은 혁신인데. 요즘은 변동이라는 단어가 입에 더 잘 붙는 느낌입니다. 분명 더 좋은 쪽으로 발전하는 미래도 어딘가엔 있겠죠. 그러길 바라며. 내일 시험 성적으로 인생을 비관하는 상황이 없길 바라며.

최근 냉장고를 바꿨습니다. 오래 쓴 가전 온전한지 묻는 엄마의 문자에 뭔가 싸한 기분이 들었어요. 늦은 야근 후에 들어왔는데도 뭔가 한 번은 끙끙대더라도 냉장고를 끌어내서 봐야겠다는 직감이 들었습니다. 겨우 앞으로 끌어내 뒷면에 붙은 해묵은 먼지를 닦다가 드라이버를 들고 와 열이 많이 나는 판을 열었는데 검은 고무찰흙 같은 게 바닥에 있길래 뭐지 했습니다. 잔뜩 녹아내린 피복이었죠.

하마터면 불이 날 뻔했다니. 냉장고가 오기까지 몇 밤을 침대 주변에 소화기를 두고 잠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깨달았습니다. 아 나 이토록 살고 싶나 하는 마음을요.

어제 낯익은 배우가 작고했다는 뉴스를 밤늦게 접하고 새벽까지 잠들지 못했습니다. 드문드문 드라마에서도 보고 예능에서도 보고 반가웠던 기억이 납니다. 최근에는 공연도 하고 영화도 찍고 그랬다던데. 일하면서도 빠져나올 수 없던 무엇이 있었나 봅니다. 그 무엇을 특정해서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각자 생에 따라오는 무언가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피복이 녹은 자리라고 할까요. 냉장고를 바꾸면서 묵힌 음식물을 몽땅 꺼내 버렸습니다. 휑한 새 냉장고 안을 바라보면서 많은 생각이 오갔습니다. 왜 이 간단한 정리도 하지 못했던 걸까.

머릿속에도 있는 것 같습니다. 꽁꽁 얼려두려고만 했던 생각들이요. 그렇게 얼려놓기만 해도 상한 것은 아니다 여기며 잊고 지내는 마음.

어느 정도 벽과 떨어뜨려 놓은 냉장고처럼 삶도 너무 벽에 밀착시키지 않아야겠습니다. 그렇게만 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지만, 일단은 그렇게라도 해두자고. 20241113일 유서에 적어봅니다.

가을길 걷다가 본 감나무
가을길 걷다가 본 감나무

추신, 영글고 여무는 것들을 보면서 걷는데 마음도 저만한 빛깔과 밀도였으면 좋겠다 했습니다. 주렁주렁 매달린 모습이 좋아보이기도 했고요. 여럿이 주렁주렁 살기. 다가오는 연말에는 친구들과 꼭 약속해야겠습니다. 오늘 레터 끝에 두고 가는 볕이 드는 날. 저도 오랜만에 들어봅니다.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만물박사 김민지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다른 뉴스레터

쫄쫄보의 유서

제14화 어떤 성취. 드디어 단풍이 보여요. 지각을 하고도 가쁜 기색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초연하게 선명해요. 부러운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법 없이 이렇게 다가오는 풍경에만 부러움을

2024.10.30·에세이·조회 741

쫄쫄보의 유서

제13화 꿈의 활착. 한동안 가기 바쁜 시간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두 달 앞으로 다가왔어요. 거리에 떨어진 은행을 피해 걷느라 의도치 않게 리듬을 타는 요즘. 구워 먹을 땐 참 좋은데 낙엽이 덮은 거

2024.10.24·에세이·조회 901·댓글 1

만자남 감량일지

프롤로그: 마음고생 다이어트는 이제 그만. 늘어난 고무줄보다는 끊어진 고무줄이 낫습니다. 끝까지 당겼다가 따끔해진 삶이면 다행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 일지는 유월에 끝납니다. 그 이후에도 제 삶이 계속된다면 몸과 마음이

2024.04.08·에세이·조회 947·댓글 2

쫄쫄보의 유서

제12화 잦은 암호화 속 인식. 매일 반복해서 누르는 번호들. 자판들. 어떤 날은 의식하고 누르다가 틀리기도 합니다. 제게는 몇 개의 암호가 있습니다. 너무 어렵지도 쉽지도 않게 만드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기까지

2024.10.17·에세이·조회 871·댓글 1

쫄쫄보의 유서

제19화 2024년 12월 3일 밤. 현재를 벌써부터 미래의 전쟁터로 만든다면, 어떻게 파헤쳐진 땅 위에 미래의 집을 짓겠습니까? 프란츠 카프카 지음, 편영수 엮고 옮김, 『카프카의 아포리즘』, 문학과지성사, 2021

2024.12.05·에세이·조회 438·댓글 2

쫄쫄보의 유서

제20화 초를 밝히며. 어느덧 최종 유서입니다. 올해 기준으로 그렇습니다. 남은 20일을 보내고 나면 여기 쓴 내용과 마음이 얼마나 맞거나 어긋나 있을지 예측할 수 없네요. 새해를 새해처럼 맞을 수 있기

2024.12.12·에세이·조회 646·댓글 6
© 2026 만물박사 김민지

생활 전공자를 위한 내적 대화 콘텐츠

메일리 로고

도움말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채팅으로 문의하기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특별시 송파구 위례광장로 199, 5층 501-8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