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쫄쫄보의 유서

제19화 2024년 12월 3일 밤

2024.12.05 | 조회 438 |
2
|

현재를 벌써부터 미래의 전쟁터로 만든다면, 어떻게 파헤쳐진 땅 위에 미래의 집을 짓겠습니까?

프란츠 카프카 지음, 편영수 엮고 옮김, 『카프카의 아포리즘』, 문학과지성사, 2021

(밀레나에게 보낸 편지, 1920년 7월 8일)


어제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룻밤 사이 정리된 해프닝이 아니고, 웃고 넘길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조롱과 냉소로 비관하고 외면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곧 국회 본회의장에서 탄핵소추안 보고가 있을 거라고 합니다.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가결되고도 마냥 안심할 수 없고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반복될까 하는 마음뿐입니다. 정치적 사안과 삶의 거리가 멀다고 느꼈던 어리고 막연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보다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행동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늘 하게 됩니다. 출퇴근길 여러 방면에서 생활을 꾸리고 있는 분들이 모여 발표한 시국선언문을 읽고, 또 거리에 나온 분들의 표정과 몸짓과 함께 놓여 있던 긴 하루가 지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없어도 녹록할 수 없던 연말연시였을 텐데. 모쪼록 주변 모두가 무탈하길.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이 어려운 시기를 꼭 돌파했으면 좋겠다고. 2024년 12월 5일 유서에 적어봅니다.

2024년 12월 3일 밤
2024년 12월 3일 밤

이런 것들은 다 소음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보다 무서운 것이 있다. 바로 정적이다. 큰불이 났을 때 가끔 그렇게 극도로 긴장된 순간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줄기가 잦아들고, 소방수들도 더 이상 기어오르지 않는다. 다들 꼼짝도 하지 않는다. 저 위에서 검은 서까래가 앞쪽으로 쏠리고, 뒤로 불길이 치솟으며 높은 담벼락이 소리 없이 기울어진다. 모두들 어깨를 움츠리고 서서,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고는, 끔찍한 소리를 내며 무너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곳의 정적이 바로 그렇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말테의 수기』, 안문영 옮김, 열린책들, 2019)

소음보다 무서운 정적을 극복하며 부디 무탈한 일상을 되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만물박사 김민지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2개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 퀸리스의 프로필 이미지

    퀸리스

    1
    1년 이상 전

    비공개 댓글 입니다. (메일러와 댓글을 남긴이만 볼 수 있어요)

    ㄴ 답글 (1)

다른 뉴스레터

쫄쫄보의 유서

제14화 어떤 성취. 드디어 단풍이 보여요. 지각을 하고도 가쁜 기색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초연하게 선명해요. 부러운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법 없이 이렇게 다가오는 풍경에만 부러움을

2024.10.30·에세이·조회 740

쫄쫄보의 유서

제15화 입동 준비. 오늘은 입동입니다. 벌써 겨울이라니. 이 겨울 어떻게 맞이하셨나요. 아직 가을이라 여기셔도 됩니다. 조금 추운 가을도 있고 슬슬 추워지는 겨울도 있는 거니까. 저는 첫눈이 오면 겨

2024.11.07·에세이·조회 615

쫄쫄보의 유서

제13화 꿈의 활착. 한동안 가기 바쁜 시간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두 달 앞으로 다가왔어요. 거리에 떨어진 은행을 피해 걷느라 의도치 않게 리듬을 타는 요즘. 구워 먹을 땐 참 좋은데 낙엽이 덮은 거

2024.10.24·에세이·조회 901·댓글 1

만자남 감량일지

프롤로그: 마음고생 다이어트는 이제 그만. 늘어난 고무줄보다는 끊어진 고무줄이 낫습니다. 끝까지 당겼다가 따끔해진 삶이면 다행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 일지는 유월에 끝납니다. 그 이후에도 제 삶이 계속된다면 몸과 마음이

2024.04.08·에세이·조회 947·댓글 2

쫄쫄보의 유서

제12화 잦은 암호화 속 인식. 매일 반복해서 누르는 번호들. 자판들. 어떤 날은 의식하고 누르다가 틀리기도 합니다. 제게는 몇 개의 암호가 있습니다. 너무 어렵지도 쉽지도 않게 만드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기까지

2024.10.17·에세이·조회 870·댓글 1

쫄쫄보의 유서

제17화 집요한 구석. 당연한 걸까요. 나이 들면 아플 일만 남았다는 어른들의 말씀. 그걸 또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상황이, 정말로 아픈 상황이 언젠가 제게도 오겠죠. 오늘 낮 엄마에게 문자를 받았습니다.

2024.11.21·에세이·조회 639·댓글 2
© 2026 만물박사 김민지

생활 전공자를 위한 내적 대화 콘텐츠

메일리 로고

도움말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채팅으로 문의하기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특별시 송파구 위례광장로 199, 5층 501-8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