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쫄쫄보의 유서

제11화 착시와 축시

2024.10.09 | 조회 7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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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가끔 착시를 씁니다. 잘못 본 것을 통해 마음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그대로 시에 받아 적는 편입니다. 오늘 착시는 쓰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시를 썼지만, 운동하면서 잘못 본 것을 레터에 받아 적습니다.

벤치프레스가 끝나고 한 손에 바벨을 쥐고 X축 같은 몸을 눕혀 팔을 굽혔다 펴는 운동을 배웠습니다. 이름하여 원암프레스. 팔 한쪽으로 무게를 치는 자세를 온통 배워놓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트레이너분이 적어주신 운동일지를 보았습니다. “원앙프레스? 이게 어떤 운동이죠?” 뚱딴지같은 질문을 하고 말았죠.

원앙프레스. 어쩐지 책과 전혀 상관없는 청첩장을 숱하게 찍어줄 것 같은 출판사 같기도 합니다. 왜 그렇게 읽었을까. 그렇게 열심히 한 팔 들기를 해놓고 원앙이라고 보았을까. 그러다 생각이 났습니다. 금슬의 상징인 원앙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를요.

원앙의 생태는 일부다처제. 암컷이 알을 품으면 수컷은 떠난다는 이야기. 수컷 원앙을 바람둥이라 할 수도 있지만, 실제 반려 상대를 선택하는 건 암컷의 몫이라는 이야기를 찾아 읽은 밤입니다. 상징성과 다른 내막, 그 속에 짐작할 수 없던 생태의 진실이 또 숨어 있다는 게 재밌었습니다.

원앙프레스라는 운동은 배우지 못했지만, 원암프레스는 제대로 배운 밤. 아까 쓰던 한 팔 힘처럼 스스로 애를 쓰는 날들이 잦습니다. 원앙을 제대로 알든 알지 못하든 나란히 힘을 쓰는 시간은 확실히 부러워서 가끔 커플에 대한 환상을 품다가 스스로 진저리칠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겪고도 여전히 정신을 못 차렸구나 하고요.

아직 임자를 만나지 못했을 뿐일지도 모르지만, 저는 제게 주어진 이 원암프레스의 시간을 견고하게 채우고 싶습니다. 하나도 못하던 푸시업도 이제는 10개 이상 할 수 있게 되었고 조금씩 강해질 팔로 할 수 있는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거면 됩니다. 아직 문제 해결까지 가는 길이 멀지만, 정말로 그거면 됩니다.

다가오는 겨울에 결혼할 친구들에게 축하의 글을 전할 때 원앙프레스라는 이름을 쓸 거예요. 생각하니 기쁩니다. 조금은 슬프기도 할 거예요. 가슴을 제대로 들어 올리고 지지대가 되어줄 반대편 발에 힘을 줘야 한 팔을 제대로 써서 무게를 감당할 수 있다는 걸 배웠어요. 양팔이라고 해서 다를 게 없었어요.

사랑하는 친구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잘살기를. 착시를 쓰다가도 축시를 쓸 거예요. 올가을 그런 마음으로 지내고 있다고. 2024109일 유서에 적어봅니다.


일본 여행에서 만났던 새 친구들
일본 여행에서 만났던 새 친구들

추신, 몇 년 전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나온 사람이 또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나오는 장면이 이젠 익숙합니다. 이 익숙함이 맞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시대에 책을 내놓고 어떻게든 알리려는 순간이 반복되다 보니 문득 그런 장면이 겹쳤어요. 조용히 시를 쓸 때의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시집을 내고 한없이 수런하고 초조했던 몇 주간이 지나갑니다. 이제 곧 한 달이 되겠지요. 구간이 되는 길을 피할 순 없지만, 언제든 찾으면 찾을 수 있는 조용하지만 깊은 구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힘을 빼고 호흡이 자연스러워질 때쯤 낭독회를 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날 오실 분들을 위해 잔잔하게 기분 좋아질 만한 기획들을 해보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레터 끝에 두는 노래는 천국의 계단을 타면서 오랜만에 들었던 노래입니다. 날이 갈수록 밝은 노래가 더 슬프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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