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자몽

1원 입금으로 처리되는 본인인증의 시대

2021.11.12 | 조회 8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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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박사 김민지

생활 전공자를 위한 내적 대화 콘텐츠

"지갑을 잃어버렸다."

"잃어버렸던 지갑이 돌아왔다."

택시를 타고 집 근처에 하차했을 때 카드를 꺼내 결제하고 지갑을 가방에 넣는다는 것이 얇디 얇은 에코백 옆면을 스쳐 발 아래 떨어졌던 모양이다. 집에 가는 길 마침 손에 들고 있던 카드 한 장으로 잔뜩 신이 나서 초코우유를 샀고 집에 와서 빈 우유팩을 내려놓는 동안에도 아무 예상도 못하고 있었다. 잠들기 전 불쑥 목 뒤를 감싸는 싸한 느낌에 일어나 가방을 들춰보았다.

가방 속에 없다. 지갑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외투 주머니, 방바닥과 현관 바닥, 구석구석을 살피다가 도로 마스크를 쓰고 걸어나와 걸인처럼 아스팔트 바닥을 살피고 다녔다. 편의점에도, 방문했던 가게에도, 어디에도 없다고 했다. 혹시 길거리에 떨어진 거라면 큰일이다 싶어서 부랴부랴 기억을 더듬어 카드 분실신고부터 시작했다. 

지니고 다니던 모든 카드의 분실 신고를 마칠 때쯤 알콜과 함께 증발된 기분이 들었다. 신분증, 온갖 매장의 쿠폰들을 잃어버리면서 거주지와 동선이 파악됐겠다는 아찔함에 치여 있을 겨를도 사치였다. 서둘러 로스트112(불법 피싱 사이트처럼 생겼지만 분실물 등록을 할 수 있는 경찰청 유실물 종합관리시스템)에 분실 관련 정보를 등록하고 이를 악물면서 잠에 들었다.

혹시 택시에 있는 건 아닌 걸까, 짐작은 했지만 기사님 번호는커녕 차량번호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왜 그 상황에서 카카오T를 이용하지 않았다. 차라리 나를 잃어버릴 것이지, 하고 자책을 할 때가 아니었다. 아침 아홉 시가 되자마자 택시비를 결제한 카드를 꺼내 카드사에 전화를 걸었다. 카드사 직원에게 상황을 이야기하니 결제내역을 바탕으로 탑승 택시의 차량번호와 운수회사 연락처를 알아볼 수 있다고 했다. 

과연, 정보화는 위대하구나 감탄할 시간도 없이 기다리다가 운수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처음에는 들어온 분실물이 따로 없다고 말하던 직원이 여성용 지갑 하나가 들어오긴 했다고 말을 바꿨고, 지갑의 생김새를 이야기하자 잠시 열어봐도 되겠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멀리 있는 운수회사에 갈 여력이 없어 택시비는 얼마든지 낼 테니 택시에 태워 지갑을 돌려달라고 사정했다.

지갑을 잃어버린 24시간 이내, 택시를 타고 귀환한 지갑을 안고 뭉친 턱근육을 풀고 잠들 수 있었던 어젯밤. 멘탈을 찾고 다시 들어간 은행앱에서 '착한자몽'이라는 입금자명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혹시나 명의 도용이 될까 싶어 명의도용방지서비스 Msafer)에서 내역 조회를 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했던 흔적이었다.

1원 입금으로 처리되는 본인인증의 시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1인으로서 이미 온라인상에서 몇 번이고 저기 나라 어디에 신상이 털렸겠지만, 오프라인에서 지갑을 잃어버린 경험은 언제 겪어도 난처한 게 사실이다. 

그동안 인생을 통틀어 총 세 번의 지갑 분실이 있었다. 한 번은 누군가가 몰래 훔쳐서, 한 번은 맨정신에 바쁘게 돌아다니다가, 한 번은 술김에 정신없이 집으로 향하다가 잃어버린 것이다. 그중 앞서 잃어버린 첫 번째 지갑은 영영 찾을 수 없었고, 두 번째 지갑은 삼 년 뒤에 돌아왔고, 최근에 잃어버렸던 세 번째 지갑은 하루 안에 돌아왔다. 

삼 년 만에 돌아온 두 번째 지갑 안에는 당시 지니고 있던 현금은 온데간데 없이 이름 모를 서너 명의 명의로 된 카드와 내 신분증, 소지하고 있던 몇 장의 카드가 남아 있었다. 간담이 서늘했던 지난 분실 경험에 이어 이번은 용케 빠르게 상황이 해결되었다. 나를 증명할 수 있는 사회적 도구들을 잃어버리는 경험을 통해서 배운 것이 있다.

"급히 서두르면 문제가 생긴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불안을 해소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두 가지 교훈을 안은 채 오늘도 되찾은 지갑과 함께 돌아다녔다. 언제고 잃어버렸다는 것을 잊어버릴 때까지 살아갈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뭔가 단단히 잃어버렸다는 감각은 어떻게 해도 극복이 안 되는 것 같다. 특히 그것이 물성이 없는 생각일 때는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잃어버린 게 지갑이어서 불행 중 다행이었다.


추신, 이 메일 읽어야 한다는 사실 같은 건 얼마든지 잊어버리셔도 좋습니다. 메일함에서만 잃어버리지 말아주세요. 언젠가 읽을 만해질 때까지.

● 만물박사 김민지의 뉴스레터는 구독자 여러분의 긴장성 두통, 과민성 방광 및 대장 증후군 치유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언제나 좋은 텍스트로 보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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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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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준

    1
    about 3 years 전

    그래도 지갑을 찾으셔서 다행입니다 :) 저도 카드를 곧잘 잃어버리는 편입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저를 다시 돌이켜 볼 수 있는 기회가 되더라구요

    ㄴ 답글 (1)
  • 흑형진

    1
    about 3 years 전

    저도 이번주 월요일에 출장으로 멀리 갔다가 지갑을 잃어버린 것을 깨닿고 그 곳에 연락해 찾았습니다. 다행히 아시는 분이 아직 그 곳에 남아 계서 오시는 편에 부탁해 받을 수 있었어요. 잃어버린 것은 대개,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잘 생각하다보면 찾아지는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대한민국은 친절한 곳이더라고요. 하지만 그럼에도 항상 이동할 때엔 소지품 조심! 처음으로 답장하네요. 너무 공감가는 내용에 답장하지만, 항상 잘 보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김형진 올림.

    ㄴ 답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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