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햇살, 초록매실, 알로에

할머니 입맛으로 살아가는 낀세대의 하루

2021.12.06 | 조회 8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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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박사 김민지

생활 전공자를 위한 내적 대화 콘텐츠

평일 아침 출근길. 회사 인근 마지막 횡단보도 하나를 건너기 전 편의점에 들러 공복으로 이것저것 고른다. 오늘도 고민이 되는 건 '그 빵'을 사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다. 문제의 그 빵을 고르면 매일 그 시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그 아르바이트생이 나를 그 빵으로 기억할까 하는 쓸데없는 고민에 마음에도 없는 샌드위치를 고르던 날이 얼마나 많았던가. 오늘은 소신 있게 그 빵을 사서 회사로 걸어갔다.

삼립에서 나온 '잘익은 옥수수 이야기'라는 이름의 빵은 수입산 옥수수처럼 길고 샛노랗지만 그 질감이나 맛이 온전히 나의 유년과 닿아 있었다. 전국의 또래들이 다 먹지도 못할 포켓몬빵을 사서 차곡차곡 띠부띠부씰을 모으는 동안, 나는 삼립에서 나온 옥수수크림빵 등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때 그 권태로운 포만감. 그 시기 그 회사에 다닌다는 부모님의 지인으로부터 도착한 박스 안에는 내가 원하는 포켓몬빵 같은 건 없었다. 그렇지만 오늘날 이러한 입맛이 되기까지 그때의 사투는 정말로 혁혁한 경험이 되어줬다. 

아침 여덟 시에 잘익은 옥수수 이야기를 한 입 두 입 베어 물면서 드는 생각이란 그리 심오하지 않다. 집에서 멀쩡한 화장대 의자를 냅두고 방바닥에 주저앉아 폐인처럼 머리를 말리면서 "그래 오늘은 집으로 돌아와 시를 쓸 수 있겠어" 생각하던 새벽의 예감도 다 없던 일이 될 만큼 회사에서의 시간은 뭘 했고 대체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따질 수 없게 촘촘히 버려진다. 빵이나 과자를 먹으며 흘리게 되는 부스러기처럼, 요즘 나는 고작 그런 것으로 글을 써나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무렵 회사생활을 하는 내 주변 친구들과 친한 지인들은 대리를 넘어 과장이라는 직위를 달기 시작했다. 우리는 정말로 서너 명 정도의 사람들과 일하며,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일과를 살피며 보고와 실무를 질리지 않고 해낼 만큼 어른의 깜냥을 키워가고 있는 걸까. 최근 몇 년간 이렇다 할 직위가 없이 직책만 받은 상태로 회사를 전전하던 나에게는 조금은 낯선 이야기지만, 안이나 밖이나 이러나 저러나 모두가 실무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는 게 공통된 의견이었다. 함께한다는 느낌은커녕 혼자라도 잘 실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때가 태반이므로.

잘익은 옥수수 이야기. '잘' 뒤로 왜 띄어쓰기가 되어 있지 않은 걸까. 운을 맞추려고? 쓸데없이 이런 생각은 왜 하는 걸까. 이런 생각조차 안 하고 싶을 만큼 회사에서는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을 더 빨리 처리하려고 한다. 이해하고 싶은 비문도. 시간이 없어서, 혹은 마음이 급해서 끼어든 오자와 빠져버린 탈자의 흔적도. 가끔은 아무것도 안 고친 채로 세상에 선보이고 싶다. 이런 마음이 어디에서 오는 건지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기에 최근에 나는 이런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데, 그저 따라잡기만 하는 이 생활의 궤도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까. 옥수수빵으로 기억되는 삶은 어떨까. 성분표 옆 원재료명을 보고 있는데 어디 하나 이곳에서 자란 것이 없다. 살아봤다 말할 수 없는 저 멀리와 저 멀리에서, 적정한 값으로 시간을 줄여 어떤 모양과 맛을 내고 있는 식음료들을 본다. 권태로운 포만감을 안정감이라 오해하며 거울을 구겨 삼키듯 수많은 평일 점심을 지나온 것 같다. 

언젠가 할머니 집에 있던 음료수들이 편의점에 나란히
언젠가 할머니 집에 있던 음료수들이 편의점에 나란히

추신, 안녕하세요. 만물박사 김민지입니다. 오늘은 다소 퍽퍽한 이야기를 썼네요. 그래도 글에 언급된 빵의 식감은 그렇지 않답니다. 변이와 폭증으로 이 시기를 지나는 일이 쉽지 않네요. 한계가 있지만 다들 각자 입맛에 맞는 시간 보내셨으면 좋겠어요. 벌써 연말입니다. 지난번 말씀 드렸던 프로젝트 '안부' 책에 이어서 낭독 영상이 다시서점 유튜브 채널에 공개되었어요. 버벅거리는 목소리지만, 책의 전문을 들어보실 수 있습니다. 12월도 살뜰히 보내다가 새로운 레터 띄울게요.

📮프로젝트 '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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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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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준

    1
    almost 3 years 전

    저는 항상 가는 마트에서 영수증을 달라고 한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분은 항상 저에게 ‘오늘도 적립 안하시고 영수증만 드릴까요?’ 라는 말씀을 하시죠.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그 사람에게 기억되는 나름 유쾌한 방법인것 같습니다

    ㄴ 답글 (1)
  • 티끄리

    1
    almost 3 years 전

    마침 출근하는 길에 글을 읽었어요! 회사에서 아직 중요한 업무를 하는 건 아니지만 이걸 왜 하는지, 왜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하는지, 의미도 모르겠고 재미가 1도 없네요..🥲 조만간 잘익은 옥수수 이야기 사서 먹어야징.. 만물박사님 오늘 하루 무사히 보내세요!

    ㄴ 답글 (1)
  • 밍261

    1
    almost 3 years 전

    비공개 댓글 입니다. (메일러와 댓글을 남긴이만 볼 수 있어요)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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