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쫄쫄보의 유서

제18화 첫눈

2024.11.27 | 조회 1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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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박사 김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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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첫눈입니다. 올해 지나 다가오는 일월에도 눈이 내리겠지만, 새해 첫눈은 지금처럼 연말에 왔다고 생각하겠죠. 올해 첫눈은 참 후하게 내렸습니다.

눈을 맞은 가로수. 나뭇가지들이 잔뜩 휜 채로 한겨울 야자수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퇴근 후 부랴부랴 집이 아닌 곳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학부 시절 가르쳐주신 선생님께서 문학상을 타셨습니다. 눈길을 뚫고 가까스로 시상식장에 도착하니 마지막 수상자분 소감 끝에 폐회사만 남아 있었습니다.

낯을 가리는 탓에 뒤에서 쭈뼛쭈뼛 서 있다가 첫 시집을 함께 봐주신 편집자님과 눈을 마주쳤습니다. 시집이 나오고 한 계절이 지나 짤막하게나마 안부를 나눠 좋았습니다. 몇몇 반가운 얼굴을 스치며 몇 년 만에 뵙는 선생님께 겨우 인사를 드린 뒤 밥 먹고 가라는 따뜻한 말씀에도 조용히 건물을 빠져나왔습니다.

폭닥폭닥 녹아내린 눈길 위를 거닐며 집으로 가는 길에 완성하지 못한 시를 생각했습니다. 새해 발표할 시 원고 마감이 사흘 정도 남은 시점. 새로 쓴 두 편의 시가 제 손을 떠날 때쯤엔 지금 밟고 가는 녹은 눈길 같으려나 싶었어요. 내리 녹지 못하고 다시 얼어 버리진 않을지. 읽는 이의 마음이 불쑥 미끄러뜨리는 부주의한 시구가 있진 않을지. 요즘은 좋아서 쓴 시도 눈 내리는 날 출퇴근길처럼 다시 돌아봅니다.

점심에 회사 동료와 내리는 눈을 지켜보다가 잠깐 나눈 대화가 기억납니다. 천천히. 딱 저 정도 속도로 내리는 함박눈이 참 예쁘다고요. 펄펄 내리는 눈도 아름답지만 적당히 간을 맞추듯 아주 큰 손끝을 타고 내리는 하얀 소금이나 설탕처럼 내리는 눈은 참 아름다워요. 그 풍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아주 잠깐 세상도, 지나온 시간도 포근한 기운을 안겨주는 말간 맛이라 느껴집니다.

하얀 무가 투명하게 익어가는 어떤 맑은 탕 속처럼. 오늘은 그러한 말간 맛을 간직한 채 잠들고 싶습니다. 그간의 불면과 뒤척임은 잠시 잊고 꿈에서 만나고 싶던 사람들 잔뜩 만난 뒤 기억은 안 나지만 개운한 표정으로 일어날 수 있는 아침을 기원하며. 조용히 빠져나온 자리에서 나누고 싶던 안부는 시에 쓰면 좋겠다고. 20241127일 유서에 적어봅니다.

오늘 제가 본 겨울 창문
오늘 제가 본 겨울 창문

추신, 오늘 눈길 조심히 귀가하셨나요. 다다음주 20화를 끝으로 ‘쫄쫄보의 유서’ 연재를 마치려고 합니다. 올해 하반기는 이 연재가 있어서 한 주씩 더 살아낼 수 있었어요. 종종 레터 읽고 전해주시는 기별도 참 감사했습니다. 연재를 마칠 무렵 출간되는 새로운 에세이 소식과 첫 시집 행사 소식도 안고 오겠습니다. 오늘 레터 끝에는 김목인의 노래 ‘겨울, 창문’을 둘게요. 포근한 잠 청하시길.
“저 눈에 다시 눈길이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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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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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mala

    1
    23 days 전

    다른 분들과 비슷하게 시인님의 루미노그램이란 시를 읽고서 팬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창작을 하시는 분과 소통을 할 수 있어서 너무 기쁩니다. 내리는 눈이 주는 설렘 못지 않게 내린 눈이 주는 시리도록 하얗고 포근한 겨울 숲을 거닐 수 있어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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