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대 초반의 어느 겨울, 서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친척 할머니네 작은 방에 살던 시절이 있었다.
가끔 쉬는 날 외출 없이 집에 머무르다 보면 안방에서 울려 퍼지던 할아버지의 잠꼬대를 들을 수 있었다. 자다가 불쑥 몸을 뒤척이며 육두문자를 외치던 할아버지는 그해 아파트 경비일을 하고 계셨고, 기업들이 많이 들어선 빌딩에서 청소일을 하던 할머니는 매일 저녁 늦게 귀가하셔서 그 누구보다 높이 고봉밥을 퍼서 내 앞에 놓아주셨다.
어린 게 추운 날 서울까지 와서 고생이 많다고, 돌아가서도 공부 열심히 하라고, 나중에 서울에 직장 구하면 꼭 놀러오라던 할머니가 얼마전 서울에 올라온 엄마를 만나 시금치 무침과 약밥으로 가득찬 찬합 두 개를 보내 오셨다.
우풍이 들어오던 그 겨울 작은 방에서 내 주변 일하지 않는 어른들이 있나 생각해봤다. 간혹 사회생활을 하면서 취미로 일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을 보기는 했지만, 돌아보면 다 아프거나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일을 멈출 수밖에 없는 사람들뿐. 그밖에 이유로 일하지 않는 어른이 없었다.
먹고 자는 것에 너무 많은 돈이 든다. 그 생각에 스스로 버거워지는 것. 나는 이게 모든 가난의 전말이라고 생각한다. 돈이라는 단어가 쓰인 자리에 품이라는 단어가 온다면 그건 정신적인 가난일 확률이 클 테고, 내가 오랜시간 주목해왔던 두려움은 경제적인 궁핍이 정신적인 궁핍으로 이어져 극복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나는 내가 야기한 가난을 잘 안다. 그 이야기에는 항상 '서울'이 따라붙는다. 서울에, 그게 아니더라도 서울 근교에 집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이 질문을 가장한 한탄과 수년째 함께해오고 있다는 사실에 한동안 신물이 났다.
왜 서울일 수밖에 없는지. 누군가 질문을 한다면 나에게 주어진 기회가 아니더라도 기회라고 볼 수도 있는 상황들이 쉴 새 없어 벌어지는 심심하지 않은 곳이니까, 그래서 여기 있는 거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지금은 그러다가도 다시 한 번 곰곰 생각해본다. 그러면 그 순간 답은 간결해진다.
"그래도 난 서울이 좋아."
이게 요즘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어디로든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와도 내가 머무를 수 있는 나의 마음을 잘 꾸리는 게 중요하다고 알려준 이곳. 사실 그 시작이 서울이 아니었어도 배웠을 가치였겠지만, 어쨌든 서울 덕분에 알게 되었다.
세들지 않고 지냈던 주변 사람들, 세들어 살았어도 별다른 탈 없이 차곡차곡 돈과 에너지를 모았던 사람들이 집을 얻고 가정을 꾸리는 가운데 나는 아직도 서울과 기 싸움 중이다. 이 싸움은 무엇을 위한 싸움일까. 나는 그 대답을 찾고 있다.
추신, 지난주 금요일 퇴근하면서 찍은 사진을 같이 보내요. 두부가 담겨 있던 플라스틱 각은 화분이 되었고요. 전선은 가위를 보관하는 수납용 랙이 되었어요. 세련되고 고상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믿어볼래요. 각자 머무를 수 있는 마음을 잘 꾸리는 한 주 보내시길. 만물박사가 응원합니다.
● 만물박사 김민지의 뉴스레터는 구독자 여러분의 긴장성 두통, 과민성 방광 및 대장 증후군 치유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언제나 좋은 텍스트로 보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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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찬영
부산도 지금 제겐 그런 곳이고 한달 전 서울 그 곳도 그랬었죠. 여기 여야만해!를 느끼게 해준 장소들 세상 어디보다 찾게 되는 장소들이 참 소중하게 느껴지네요 다시금 :)
만물박사 김민지
"여기가 맞구나!" 하는 찬영님의 마음이 있어서 그런 소중함도 느껴지는 게 아닐까 싶네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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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범
"먹고 자는 것에 너무 많은 돈이 든다. 그 생각에 스스로 버거워지는 것. 나는 이게 모든 가난의 전말이라고 생각한다." 이 부분이 좋네요. 겨우 먹고 자는 일에 왜이렇게 많은 돈이 필요할까..
만물박사 김민지
오늘은 평소보다 지출 적으면 좋겠어요.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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