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쫄쫄보의 유서

제6화 진배없다는 말

2024.08.29 | 조회 8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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떤 말을 쓰다가 검색을 시작해요. 오늘은 진배없다. 그 말이 떠올라서 야근을 마치고 집에 오는 길 내내 되뇌었습니다. 사전에 적힌 뜻은 이래요.

그보다 못하거나 다를 것이 없다.

죽음은 삶과 진배없다. 이 말에 동의하시나요. 안 죽어봐서 모르겠어요. 죽기 전에 제대로 살아보는 게 먼저 같기도 하고요.

오늘 기준 제대로 산다는 것은 혼자 가지 않고 사람들과 남아서 같이 일하는 거였습니다. 비록 쾌활하게 그 모든 과정을 수용하진 못했지만, 이전보다 스트레스가 적어요. 어차피 할 일이면 최대한 집중해서 바짝 해내자는 결심이 섰거든요.

사실 저녁에 예매한 영화를 보지 못했어요. 그래도 그 영화 다음에 볼 수 있지 하면서 애써 넘겼지요. 다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걸 보니 아직 살 만하다 싶어요.

제가 좋아하는 영화들은 대부분 회화적인 요소가 강해요. 그림의 성격을 띤다는 건 제게 한 장면으로 많은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인데요. 어떤 사람의 단편적인 모습을 보고 그 사람의 현재 앞뒤로 붙은 시간을 상상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에요. 어디까지나 상상이죠.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저 표정, 저 인상은 어떤 시간의 축적일까. 또 그 현상을 관찰하고 있을 그 사람의 미래가 궁금해지기도 해요. 저 자신을 보는 관점도 다르지 않아서. 아침에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말릴 때마다 생각에 잠기다가 웃기도 하고 웃어 보이기도 합니다. 종종 울 것 같은 표정이거나 다 죽어가는 표정일 때도 있어요.

다 죽어가는 표정을 지을 때면 거울이 지옥의 수면 같아요. 조금도 증발할 것 같지 않은 감정이 거기 잠잠하게 고여 있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런 느낌이 마냥 거북스럽지는 않아요.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달까요. 지옥의 반사신경으로 살아낼 때도 더러 있다는 것을요.

오늘은 진배없다. 그보다 못하다는 표현보다는 그것과 다를 것이 없다는 표현에 방점을 찍으면서 그 단어를 다시 곱씹어보았습니다. 오늘은 진배없다. 하루 끝 뒷심을 싣고 싶은 밤입니다.

내일 아침 거울 앞에선 설핏 웃고 싶어서 조금 웃긴 이야기를 조금 보탭니다.

내일 미팅 자료로 준비한 문서에 낸 동료의 오타가 있었어요. ‘해요체라고 써야 할 것을 해용체로 썼더라고요. 이응 하나로 사람을 이렇게 무장해제를 시키다니. 너무 피곤하고 다급해서 생긴 사소한 일들이 때때로 굳은 표정을 풀어주기도 하네요.

숨이 가쁘게 눈에 불을 켜다가도 재가 되어 버려서 흩날릴 수 있는 웃음이 있다고. 아주 가끔 그런 웃음 덕분에 산다고. 2024828일 유서에 적어봅니다.

추신, 얼마 전 오아시스 재결합 소식을 듣고 살아서 이런 장면도 보네 싶었습니다. 오늘 레터 끝에는 좋아해서 오래 새겨 두었던 노엘 갤러거의 인터뷰 답변과 Live Forever 두고 갑니다. 어김없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주에는 일곱 번째 유서를, 다다음 주에는 조금 다른 느낌의 레터를 보내겠습니다.

‘Wonderwall’, ‘Don’t Look Back in Anger’, ‘Live Forever’ 당신의 기타 실력은 물론, 작곡 능력을 빼놓고 이야기할 순 없는데요. 곡을 쓸 때 영감은 어디서 주로 받나요?


그냥 내 주변에 기타를 항상 두고, 내가 유명해지기 전에도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심심할 때마다 기타를 가지고 논다. 보통 10일 중 9일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다 10일째 되는 날 일이 일어난다. 그게 어디서 오는지는 나도 알 수 없다.

재밌는 사실을 하나 말해주겠다. 내 곡은 보통 봄에 많이 나온다. 3월에서 5월. 고의는 아니지만 생각해 보니 봄에 노래가 많이 써져서 나도 의아했다. 내가 봄에 태어나서 그럴 수도 있고, 그래서 나의 곡이 희망적일 수도 있겠다. 겨울을 깨고 여름(Summertime)을 기다리는 건 항상 설레는 일이니까.

우리가 그런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
그냥 인간을 향한 그냥 인간의 찬사
그냥 인간을 향한 그냥 인간의 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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