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돌아온 이종철입니다. 오늘은 저희 아버지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유료 구독하셨던 분들은 이미 아는 내용이 일부 포함될 수 있습니다.
이기찬은 규칙 속에서 자라난 인물이다. 대가족에서 다섯 번째 자녀였고 두 아들 중 하나였다. 모두가 서로 양해해야만 살 수 있는 시절을 보낸 기찬은 모든 것이 부품처럼 돌아가기를 원했다. 본인이 창의력을 무한대로 갖고 있는 사람인지는 인식하지 못한 채.
그런 그에게서 그와 똑 닮은 짐승의 눈을 가진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는 귀신 들린 듯한 그림을 그렸고, 성인처럼 말했으며, 좋아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뚜렷해 부모의 뜻대로 살아 주지 않았다. 딱 맞아떨어지는 수학 같은 기찬에게서 불규칙이 태어났다. 기찬도 아이도 서로를 막지 못했다. 아이는 좋아하는 것이 생기면 그 자신이 재가 될 때까지 자신을 활활 태웠다. 늘 엇나가는 아이가 기찬은 못마땅했고 아이도 규칙을 수도 없이 만드는 기찬을 못마땅해했다.
아이가 기찬에게 인정을 받는 데는 30년이 걸렸다. 적은 돈을 받고 글을 쓴다는 아이는 많은 열성 독자를 보유하게 됐고, 본인의 삶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성과들을 이루었다. 기찬의 규칙은 거기서 멈췄고, 어느덧 기찬의 나이가 된 아이도 기찬의 삶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이었다. 기찬은 자꾸 가게의 계산을 틀린다.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기 시작했다. 은퇴를 해야 할 때였다.
아이는 은퇴 다음날 기찬의 모습을 기억한다. 늘 규칙 속에 살았는데, 오늘은 일어나 갈 곳이 없었다. 갈 곳이 없고 부르는 곳이 없다. 돌아올 곳에만 머물러 있다. 허전한 기찬은 동네를 몇 바퀴나 돌았다.
그러다 하루는 방을 찾지 못하고, 다음날은 집을 찾지 못했다. 평생을 함께한 기찬의 부인 얼굴도 흐릿해졌다. 갈 곳이 사라지자 증세는 더욱 심각해져, 주간보호센터를 찾았지만 그곳은 기찬보다 훨씬 나이 많은 형님들밖에 없었다. 기찬은 이것을 출근이라고 불렀다. 출근을 하며 시간이라도 남은 시간이라도 길어지기를 부인과 아이는 바랐다.
어느 시기부터 기찬은 말하는 법을 잊었다. 머릿속에 생각이 돌았지만 입을 움찔거릴 뿐 출력은 되지 못했다. 아이는 가끔 나오는 제대로 된 문장을 보려 노력했지만 그런 일은 쉽게 벌어지지 않았다.
아이가 새로운 회사에 취직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때였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급히 전화를 걸어 지금 당장 내려오라고 말한다.
여기까지가 작년 6월까지 있었던 일입니다.
지난해 6월 회사에 한참 적응하고 있던 도중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버지의 건강 자체는 아주 나쁘지는 않았던 터라 당황스러웠어요. 그날은 하필 회사에서 앞으로의 계획을 발표하는 날이었습니다. 발표가 5시쯤 끝나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조퇴를 하고 고향에 내려갔습니다. 아버지의 심장은 불규칙하게 뛰고 있고 호흡 역시 불안정했습니다. 저는 그때 처음으로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사람 생명이 꺼져 가는 건 육안으로도 알 수 있다는 것을요. 병원에서도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했고요. 고인과 가족 모두 생전에 우리 가족의 어떤 사람이든 생명 유지 장치는 하지 않기로 사전에 약속한 바도 있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다음날 새벽 6시, 회사와 이야기된 바가 없어 다시 서울로 와서 출근을 했고요. 그날 근무 도중 대표님과 팀원들의 허락을 받고 고향에서 며칠간 재택근무-서울 복귀 후 근무를 한 달여간 했습니다. 회사와 대표님, 팀원들께 정말 고맙다는 인사를 지금 여기서 또 한 번 전합니다.
응급환자의 가족으로 사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코로나 등의 감염병 우려로 인해 병원에서는 가족 여러 명이 있기를 원치 않더군요. 그래서 어머니, 동생, 제가 번갈아 자리를 지켰고요. 자리를 지킬 수 없을 때는 병원 근처 카페를 전전하며 업무를 했습니다. 업무를 굳이 고수한 이유는, 사실 제가 멍하니 기다려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한 달여간의 생활이 지나고, 어머니가 당분간 올라가 있으라고 하더군요. 아버지가 지금 당장은 돌아가시지 않을 것 같다고. 저는 짐을 챙겨 서울에 와서 3일 정도 일했고요. 새벽 4시쯤 어머니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짐을 챙겨서 내려오라고요. 아버지는 이미 떠난 뒤였습니다. 저는 병원이 아닌 장례식장으로 향해야 했습니다.
새벽 6시 이전 첫차 기차는 처음 타보았습니다. 그 풍경이 다른 시간대 기차와는 매우 다른 모습입니다. 평택 등지로 출근하는 사람들 대다수는 기차에서 식사를 했고, 새벽에 어디론가 떠나는 저희 어머니뻘의 여성분들은 기차 안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더군요. 제가 아는 기차 풍경과는 달랐습니다. 이렇게 멍하니 기차를 타고 장례식장으로 향했습니다.
부고를 돌리기 전, 한 달 전부터 전화번호를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제 전화번호부에는 2천여 명이 있더군요. 부고를 보낼 수 있느냐 아니냐인 단순한 기준으로 전화번호를 정리했더니 200명 정도가 남았습니다. 이것이 제가 가진 인맥의 진짜 규모였을 겁니다.
사실 서울에서 추모객들이 오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곳은 너무 덥고 멀었어요. 그리고 휴가 기간이기도 했죠. 그냥 먼 곳에서 마음만으로 추모해 주는 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많은 분들이 서울에서부터 찾아와 주셨고, 여러 업체가 화환을 보내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부모가 사람 하나를 똑바로 키워냈다는 자긍심을 얻으셨을 겁니다. 불완전하고 불온한 인간을 완전한 인간으로 만들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사실 바쁠 땐 서너 달 정도 아버지를 못 본 적도 많았기 때문에, 지금도 아버지의 부재가 믿기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몇 년이 지나야 빈자리가 보이겠지요. 잘 산다는 거짓 약속은 못 드리겠고, 남들에게 피해 주지 않고 살겠다는 약속만을 해봅니다.
오늘은 아버지의 첫 기일입니다. 슬픈 이야기를 쓰고 싶지 않았지만 오늘만큼은 얌전하게 넘어가야 할 것 같아서, 그런데 매주 수요일 무조건 돌아온다는 약속을 했기 때문에 기습적으로 아버지 이야기를 해 보았습니다. 앞으로 아버지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을 예정입니다.
아래는 지난해 추모해 주신 분들에게 쓴 글입니다. 오늘 새롭게 추모해 주실 분들에게 미리 감사드리며 아래 글을 남깁니다.
2025년 8월 5일
우주에게 감사를
삶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건 에너지의 순환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제가 온라인상에서와 달리 그토록 건조한 삶을 살아온 이유는, 쓸모없는 모든 행동이 에너지의 낭비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건 변명이고 타인에게 무언가를 요청하는 걸 가장 어려워하는 겁쟁이 소년이 성인의 삶 뒤에 숨어 있습니다. 제 삶의 문제 대부분은 이곳에서 출발합니다.
고인은 약 한 달간 중환자로 지냈습니다. 그간 회사에 양해를 구해 재택근무를 병행하며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지냈고, 주말에는 고인의 곁을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고인은 이미 사람을 알아보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만, 귓가에 목소리는 맴돌 수도 있을 것 같아 말을 걸고 인사를 하고, 일상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어떤 세계가 있다면, 우리 아들은 어떻다며 자랑이나 흉이라도 실컷 하도록.
고인과 둘이 있을 때 고인에게 물었습니다. 아빠는 언제 가장 행복했냐고. 고인은 대답할 수 없었겠지만 아마 제가 태어났을 때가 아닐까요. 고인 성인의 삶 시작이 아마 저의 탄생이었겠지요.
3일간 장례식에 찾아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서울에서 그곳까지 오는 과정이 얼마나 지난한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한 번에 되는 게 하나도 없고, 전철역에서도 멀고, 습하고 더우니까요. 휴가철이라 표가 많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고요. 퇴근 후 돌아오면 새벽이 될 테고, 선잠을 자고 출근해야 하는 것이 고난스러웠을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여러분께 그 정도의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뭘 해도 침묵했고 곁을 지키지도 못했으니까요.
멀리서 애도해 주신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특히 온라인으로만 연락을 주고받는 분들에게 저는 몇 비트, 가끔은 패킷 낭비일 뿐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온도 없는 랜선을 타고도 체온이 전해진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보내 주신 많은 화환이 어머니에게 자랑거리이자 위로가 되었습니다. 평소 그런 것이 사람 노릇이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사람 하나를 똑바로 키워냈다는 자긍심을 느끼셨을 겁니다. 여러분이 그걸 저 대신 증명해 주셨습니다.
도와 주신 많은 부의금도 힘이 되었습니다. 고인은 중환자로 한 달간 머물렀습니다. 중환자에게는 큰 병원비가 듭니다. 덕분에 어머니와 저의 숨통이 트였습니다.
근 몇 년간 고난을 겪으며 생각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의 호흡과 역량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주변 사람들이 저를 업어 주고 부축해 주며 지탱하고 있었다는 것을요.
혼자 버티며 걸어왔다는 건 착각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숨결이 저 멀리 하늘과 바다를 타고 저를 씻겨 주고 일으켜 주고 두들겨 주었습니다. 이에 우주에게 말합니다. 감사하다, 감사하다, 감사하다고요.
저는 이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여러분이 토닥여 주신 덕에 다시 사람 꼴을 하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근거리, 먼 거리에서 애도해 주신 모든 분께 약속드립니다. 여러분이 고난에 빠질 때, 언제나 제가 함께하겠다고요.
감사드립니다.
아래는 지난 7월 한 달간의 일상을 AI로 만들어 놓은 영상입니다. 저때만 해도 싸구려 AI 쓰느라 품질이 조악하네요. 대강 이런 일이 있었다고 생각해 주시면 됩니다.
저는 다음 주에는 미리 써 놓은 밝은 글로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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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임종은 못 보셨어도 중환자실에서라도 함께하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해드리셔서 아버님의 영혼이 위안받으셨을것 같습니다. 하늘나라의 아버님 영혼의 평안을 기도드립니다.
돌아온 수요일의 이종철. 수종철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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