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당신은 얼만큼 치우쳤나요?👀

만화 <플루토>에는 이런 장면이 등장합니다.

세계 최고의 AI 로봇을 만든 텐마 박사는 은밀히 또 다른 프로젝트에 돌입했습니다. (미래 지구라는 설정으로) 전 세계 99억명의 인격을 모두 담지한 인류 최상의 AI 로봇을 만드는 겁니다.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떤 모습이든 "노프라블럼"인 궁극의 기계를 개발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실제로 로봇은 프로그램을 장착해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눈을 뜨지 못 했습니다. 아니, 눈을 뜨길 거부했습니다. 무수히 많은 가능성 중에서 무엇이 돼야 할지 몰라 시뮬레이션의 늪에 빠져버렸기 때문입니다. 혼란에 빠진 인공지능을 깨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텐마 박사는 이렇게 답합니다. 

증오는 벡터입니다. 대상이 있고, 방향이 있습니다. 

이도 저도 아닌 모호함 속에서 허우적 대는 인간에게도 이러한 치우친 감정이 곧잘 지침이 됩니다. 일종의 우선순위를 매기는 힘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만화책으로도 봤던 저 대사를 넷플릭스 애니메이션으로 다시 시청하며 되뇌었습니다. '나의 치우친 감정은 무엇일까.' 무엇이 51%인지 자문해보게 되는 장면이었습니다.

물론 증오만이 추진력을 제공하는 건 아닙니다. 

영화 <블루 자이언트>에는 저마다 다른 목표로 재즈에 빠져드는 3명의 젊은이가 등장합니다. 미야모토 다이는 "세계적인 색소폰 연주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무작정 도쿄로 상경한 주인공입니다. 유키노리는 발군의 피아니스트지만 음악으로 먹고 살 수 있는 입지를 다지기 원합니다. 둘 다 타고난 재즈 아티스트입니다.

이들의 '치우침'에 비해 슌지의 '치우침'은 소소해 보일 수 있습니다. 

대학에 입학해 왠지 무료한 일상을 반복하던 슌지는 고향 친구 다이가 진지하게 재즈에 임하는 자세를 보며 재즈에 매료됩니다. 초보 드러머로 입문합니다. 유키노리의 무시를 받다가도 셋이 함께, 오래오래 재즈를 연주하기를 희망합니다. 손이 터지도록 연습하며 가장 보통의, 그래서 와닿는 몰입을 보여줍니다.

세 사람 모두 재즈에 푹 빠져있기 때문에 꽤나 기울어진 상태입니다. 학기 학점을 모두 망쳐 정학의 위기에 놓이기도 하고, 밤에 무리해서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형편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불행하지 않습니다. 열정, 동경, 희망, 자부심 등 치우친 감정이 그들에게 우선순위를 만들어줬습니다. 목표를 얻어 레벨업을 하는 과정은 괴롭지만 즐겁습니다. '무언가' 되고 있으니.

이 영화를 감명 깊게 본 이유는, 아마도 요즘 제가 이런 질문을 자주 받기 때문인 듯합니다.  

1월 1일에 덜컥 개인사업자 등록을 했으니 뭐라도 생각해둔 게 있지 않느냐고, 요즘 만나는 분들이 자주 묻습니다. 대략 난감하죠(!) 사실 저는 의외로 별 생각 없이(?) 일단 사업자등록을 진행했으니까요. 전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프리랜서로 도맡아서 하던 프로젝트들이 점차 사이즈가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덩달아 장기 프로젝트가 한 건 더 들어왔습니다. 이제는 도저히 혼자 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주변 프리랜서분들께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했어요. 하나의 프로젝트마다 조금씩 과업을 나눠 팀 아닌 팀이 결성됐습니다. 세금 처리를 하려니 제가 사업자등록을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이렇게 솔직하게 밝혀도 오프라인에서 가장 처음 받는 물음은 ‘사업 계획’에 관한 것입니다.

정확히는, 요즘 뭐하고 사는지, 뭘 하고 싶은지, 어떻게 벌어 먹고 살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입니다. 여기에 대해 나름의 답변을 정리해 건넨 것이었지만 궁금증이 시원하게 해소되지 못한 듯하죠. 그럴 수밖에요. 저 또한 제 자신에게 물음표를 건네고 있으니까요. 

제가 하는 일은 크게 3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나름대로 간명하게 정리한 이 내용들은 스텔러스 소개 페이지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궁금한 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그 너머로 뻗어나갑니다. 그래서 지금 하는 일로 무슨 사업을 벌이고 싶은지, 어떻게 확장시킬지, 이처럼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래의 제 안부를 묻는 식입니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난망한 고민이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저는 아직 충분히 치우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무엇에라도 ‘능숙해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20대라는 새파란 불꽃이 불타던 자리에는 이제 30대라는 모닥불이 일렁입니다. 아마도 내가 무언가 굉장히 원했던 것 같은데, 무언가는 굉장히 싫어하고 어떤 건 맹렬히 좇았던 것 같은데, 그런 에너지의 기억이 흔적 기관처럼 어딘가에 남아있습니다. 열정적이었던 나 자신에 대한 기억은 나지만 그 존재감은 다소 희미해졌어요. 분명 제 것이었지만 왠지 보이진 않죠. 

이 능숙함이 싫지 않습니다. 과거의 나였다면 막막함과 불안감이 9척 파도 같아 보였을텐데, 어떤 파도는 너울이라는 것이 이제는 눈에 들어옵니다. 크고 작은 파도를 여러 번 타봤으니 이 파도는 이렇게, 저 파도는 저렇게 타면 되겠다는 셈이 따박따박 나온달까요.

특히나 일에 능숙해지다 보니 내 앞에 놓여진 과제, 내가 풀어야 할 문제를 곧잘 받아 들고 해결해 나아갑니다. 기복이 줄어듭니다. 

어쩌면 그게 문제인지도 모릅니다. 적당히 능숙해진 나 자신은 굳이 어느 것에 치우치지 않아도 그럭저럭 살 만한 일상을 마련해줍니다. 현상 유지를 하며 찬찬히 살아가자면 못 할 게 없습니다.

허나 여러 일을 벌려둔 불확실한 현생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이제는 모든 걸 와구와구 소화할 수 없는 몸. 우선순위를 정하고 지혜롭게 집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치우침의 역설’이 발생합니다. 

B2B로 콘텐츠와 미디어를 다루는 사업을 확장한다고 가정해볼까요. 

사실 이 일을 어떻게 더 벌릴지는 차차 눈에 들어옵니다.

기획 및 고객 커뮤니케이션을 주로 (저를 포함한) 경험이나 책임이 있는 쪽이 맡고, 그 외 제작이나 매니지먼트 업무를 잘 쪼개서 다른 사람에게 위임할 수 있습니다. 혹은 인공지능을 적절히 사용해 최종 작업만 제가 해도 무방합니다. 핵심 지표를 설정하고, 조정하고, 달성하면서도 전반적인 이해관계에 맞춰 다음 스텝을 고민하는 게 인간의 몫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니 두 가지 선행작업이 필요합니다.

일단, 스텔러스의 과업을 함께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해야 합니다. 정규직이냐 계약직이냐는 의외로 그리 중요치 않습니다. 프로젝트 개수나 강도를 과감하게 키운다면 고양이 손도 보태야 할 만큼 바빠집니다.

그러나 사람을 모아 안정적으로 사업을 영위하려면 돈을 벌 수 있는 창구를 먼저 마련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일을 따오고서 수습하기 위해 인력을 찾는 순서입니다. 

(아마도 제 성미상) 일을 받아두고 쳐내기 위해 사람을 붙이는 방식은 잘 안 맞을 듯합니다. 이왕이면 콘텐츠를 잘 만드는 사람, 미디어 업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있는 사람, 제가 여러모로 신뢰의 조각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임시적이라 해도) 팀이 되고 싶으니까요. 그래야 결과적으로 효율적으로 일하면서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걸 압니다. 일단 인재를 구하는 게 선행의 선행작업이라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근데 사람을 구하려면, 그것도 나름의 기준을 갖고 선별하려면 ‘비전’이 필요해집니다. 

비교할 수 없이 많은 돈을 주거나 엄청난 영예를 안겨줄 게 아니라면 작은 조직은 필연적으로 ‘비전’을 셀링 포인트로 내세웁니다.

우리와 함께 일하면 배울 수 있다, 성장할 수 있다, 미래의 특정한 청사진에 기여할 수 있다 등등 영감을 불어넣고 마음을 움직이는 스토리가 필요하죠. 탁월한 인재를 상대적으로 열악한(?) 신사업에 매혹하는 수법입니다. 그러니 선행의 선행의 선행 작업은 ‘비전 세우기’로 보입니다. 

비전은 치우침과 동의어입니다. 누가 뭐래도 나는 무언가를 믿는다, 남들이 보지 못한 미래의 어떤 상을 보았노라 하는 이야기죠. 그 치우침에 베팅한 나 자신을 드러내면서 상대방에게 ‘너도 동의하고 공감하느냐’고 손을 내미는 것이 비전입니다.

그러니 ‘사업 계획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단순한 의문문이 아닙니다. 어떤 미래를 보느냐, 그 미래를 함께 만들 동료를 바라느냐는 물음표과 연결됩니다. 

그러다 보니 저도 제 욕망을 들여다보며 솔직하게 반문하곤 합니다. 

능숙함은 묘하게 안정적입니다. 무엇이든 적당히, 어찌저찌 해낼 수 있는 수월함 속에서 넘실 넘실 떠있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여기서 어느 방향으로든 약간만 기울어도 나의 벡터가 생겨날 텐데, 지금의 안정감을 포기하면서까지 지금 하는 일들 중 하나의 대상에 치우치고 싶을까. 자기확신이 없어 우물쭈물 하는 모양새입니다. 다양한 페르소나를 장착한 AI 로봇이 눈을 뜨지 않는 것처럼 눈 뜨길 주저하는 요즘입니다. 

일에서 의미나 재미를 찾지 못했냐 하면 또 그렇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더 셈법이 복잡해지는 게 아닐까요.)

지금 제가 매일 소화하는 일들, 고민하는 방향들. 거기서 모두 의미와 재미를 발견합니다. 콘텐츠 비즈니스의 다양한 수익화 시도를 도우면서, 해외 진출과 네트워크 확보를 고민하는 기업을 위해 모르는 외국인들에게 먼저 연락하며 맨땅에 헤딩하는 일도 모두 즐겁습니다.

난이도가 있더라도, 가끔 망망대해에 혼자 서있는 듯해도 이내 의미를 찾습니다. 내가 기여하는 바를 인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치우침은 그 이상의 몰입을 요구합니다. 굉장히 좋아보이는 일, 남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과업을 수행하는 걸 넘어 ‘나는 아무래도 이렇게 해야겠다’는 적극성이 드러납니다. 이러한 호언장담을 할 수 있어야 귀한 인연을 얻어 팀을 꾸리거나, 독자의 마음을 얻어 크리에이터로서 영향력을 얻거나, 무엇에서라도 결단을 보겠지요.

하지만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내가 무얼 보고 원하는가’에 대한 답변이 뒤엉켜있습니다. 

20대 초반에는 좀 더 명료했습니다. 그때 제가 생각해낸 방법은 ‘나 자신을 냅두기’였습니다. 공부도, 동아리 활동도, 그 어느 것도 스스로 강제하지 말고 나를 놓아 뒀을 때 내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일탈을 한들 결국 ‘나라는 인간의 경향성’ 안에서 그래프를 그리며 점과 점이 이어지지라 짐작했어요.

그 결과로 저는 영상을 만들거나 글을 쓰는 콘텐츠 제작자, 미디어 종사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30대 초반에 비슷한 고민을 안고 좀 더 복잡미묘한 맥락에 서있습니다. 10년 전처럼 나 자신을 해방시켜주기에는 내 손에 딸린 식구(나 + 가족)가 눈에 밟히고, 적당히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자니 ‘앞으로 계획이 무엇인지 정해야 한다’는 미션이 남아있고.

마치 다사다난한 연애 끝에 결혼 상대를 골라야 하는 기로에 놓인 것처럼 51%의 결단을 내리지 못해 어정쩡하게 걸어가고 있답니다. 

나의 벡터는 무엇일까요. 솔직히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즉답을 내리긴 어려워 보입니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콘텐츠 업 자체에 대한 비전이든 크리에이터로서 내다본 비전이든 영원히 미룰 수 없다는 겁니다. 언젠가는 용기를 내 눈을 뜨고 현실과 미래를 바라봐야겠죠. 그 용단 끝에 나와 비슷한 눈을 가진 타인을 찾아 나서든, 내가 본 대상을 이야기로 남기는 미션에 최선을 다해야 하리라 믿습니다. 

커리어와 일에서도 이제는 ‘사랑’을 찾아야 하는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실감합니다.

근래 들어 ‘요즘 뭐하고 다니냐’ ‘사업 계획 무엇이냐’라는, 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을 받으니 이 질문 자체가 30대의 내가 어떻게 일하며 살아가야 할지 나름의 기준을 정립하는 데 나침반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듭니다.

돌고 돌아 결국 나 자신을 아는 것, 심플하면서도 근본적인 도전 앞에서 견디는 시도를 해봐야지 싶습니다. 

무언가 사랑하는 (그래서 다른 무엇이든 손에서 놓아버릴 수 있는) 다짐은 왜 이리도 어려울까요. 차라리 내가 무언가를 금방 중요하게 여기고, 귀히 대하며 애정했다면 이 모호함이 좀 더 빨리 걷혔을까요.

어차피 제가 그런 성질의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부질없는 기대는 잠시 접어두고, 샛길이 아닌 정도를 걷자고 되뇌어 봅니다. 올해 제가 내리는 선택마다 조금씩 치우침이 더해지기를 바랍니다. 

너무 괴로워하거나 조급하기보다는 차차 지도를 만들어가면 어떨까요. 애초에 ‘나 자신을 알라’는 가르침은 일평생 따라다닐 터. 저 또한 나 자신을 다그치기보다는 사랑하는 대상을 그리는 심정으로 매일매일 꾹꾹 시간을 눌러 담아보려 합니다. (아 어떻게든 다 되겠죠!!)

*다음 글은 (앞서 계속 언급했던 떡밥인) '사랑'에 대해 써보려 합니다. 무작정 연애 스토리는 아니고요ㅎㅎ '사랑' 그 자체에 대한 제 경험과 관점을 슴슴하게 정리해보려 합니다. 분명 타인과 세계를 '이해'하는 개인적인 동인에 대해 2번째 글로 쓰기로 해놓고서 삼천포로 빠져버렸는데요. 이 주제도 좀 더 먹음직한 요리가 되면 꼭 대접할 예정이니 기다려주세요:) 매주까진 아니어도 자주 찾아 뵙겠습니다!

김지윤 스텔러스(Stellers)｜Foun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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