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 님은 혹시 파란색 좋아하시나요?
저는 원래 파란색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했던 색은 빨강이었거든요. 거기에 형광 핑크와 형광 녹색처럼 눈에 확 들어오는 색이라면 더 좋았습니다. 점잖고 무난한 색보다는 조금 과하다 싶을 만큼 강렬한 색을 좋아했지요.

오랫동안 디자인을 해오면서 생긴 취향이기도 합니다. 얀 치홀트의 타이포그래피나 바우하우스 작가들의 작업을 보면 빨강과 검정, 노랑과 파랑처럼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색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지금 보아도 촌스럽기는커녕 여전히 힘이 넘칩니다.

리소그래피 인쇄물도 좋아합니다. 형광 핑크나 선명한 블루 같은 별색 잉크를 사용하고, 여러 색을 겹쳐 전혀 다른 색을 만들어 내는 방식이 재미있거든요. 일반적인 인쇄로는 얻기 어려운 색을 위해 비용을 더 쓰기도 합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색 하나가 조금 달라졌을 뿐인데, 디자이너에게는 그 조금이 꽤 중요합니다.
색은 디자인을 예쁘게 만드는 장식만은 아닙니다. 제품이나 기업의 성격을 결정하고, 그 안에 상징을 심고, 소비자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달할지 정하는 중요한 장치이기도 합니다. 똑같은 형태와 글자를 사용하더라도 어떤 색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브랜드가 될 수 있으니까요.
그런 저에게 파란색은 너무 평범한 색이었습니다. 기업 로고에도 많고, 상품 포장에도 많고, 주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색이었지요. 남들이 다 좋아하고 다 사용하는 색을 굳이 저까지 좋아해야 하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파란색은 처음부터 제 곁에 있었는데 제가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린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면 영화와 소설, 음악 속에서 제가 좋아했던 파랑은 참 많았습니다.
장자크 베넥스의 《베티 블루》, 뤼크 베송의 《그랑 블루》, 곤 사토시의 《퍼펙트 블루》,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 색: 블루》. 제목부터 파란색인 영화들입니다. 데이비드 린치의 《블루 벨벳》도 빼놓을 수 없겠군요. 80년대 미국 드라마 《블루문 특급》까지 떠올리면 파란색은 생각보다 오래전부터 제 취향의 일부였던 것 같습니다.
소설에는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가 있고, 재즈에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Kind of Blue》와 존 콜트레인의 《Blue Train》이 있습니다. 쳇 베이커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어쩐지 그 음악에도 파란색을 입혀주고 싶어집니다.
어렸을 때 좋아했던 건담도 생각납니다. 흰색과 빨강, 노랑이 함께 사용됐지만 제 기억에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은 몸통의 파란색입니다. 이상하게도 그 파랑에서는 명석하고 똑똑하고 정의로운 느낌이 났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 시절 제가 건담에게 부여한 이미지였겠지요.
그렇게 영화와 음악, 소설과 애니메이션 속에는 제가 좋아하는 파랑이 이미 가득했습니다. 디자인에서는 너무 흔하다고 생각했던 색을 다른 문화에서는 열심히 좋아하고 있었던 겁니다. 사람 취향이라는 게 참 일관성이 없습니다. ㅋㅋㅋ
그러고 보니 파란색의 이름부터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쪽빛, 남색, 감색, 군청색, 아청색, 담청색 같은 이름들이 있습니다. 서양에는 울트라마린, 코발트블루, 프러시안 블루, 세룰리언 블루, 로열 블루, 아쥬르가 있고요. 비슷해 보이는 색에도 저마다 다른 이름과 역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요즘 제 눈에 가장 들어오는 색은 코발트블루처럼 진하고 선명한 파랑입니다.
그런데 이 색이 2027년의 중요한 트렌드로 떠오를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글로벌 트렌드 예측기관 WGSN과 컬러 전문기업 Coloro는 이미 2027년 올해의 컬러로 루미너스 블루(Luminous Blue)를 선정했습니다. 패션계에서도 강렬한 코발트 계열의 블루가 몇 시즌에 걸쳐 존재감을 키우고 있고요.
제 촉으로는 2027년에 이 블루가 상당히 강렬한 트렌드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색이 등장했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하려니 조금 아쉽습니다. 파란색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를 품고 있는 색 가운데 하나니까요.
심지어 한때는 금보다 비쌌습니다.
금보다 비쌌던 신들의 색
성모 마리아를 그린 서양의 종교화를 유심히 보신 적 있으신가요? 성모는 유난히 파란색 망토를 자주 걸치고 있습니다. 화가가 파란색을 좋아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 색에는 종교적인 상징뿐 아니라 꽤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습니다.
바로 돈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깊고 선명한 파란색은 지금처럼 물감 가게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색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최고의 청색 안료로 여겨졌던 천연 울트라마린은 청금석, 즉 라피스 라줄리라는 광물에서 얻었습니다.
주요 산지는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에 해당하는 지역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채굴한 돌을 먼 유럽까지 운반하고, 곱게 갈고, 여러 차례 불순물을 제거해야 비로소 아름다운 청색 안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최상급 울트라마린은 때로 무게당 금보다 비싸게 거래됐습니다.
금보다 비싼 물감을 그림에 바른다니. 요즘 기준으로 생각하면 꽤나 호화로운 취미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만큼 신성한 존재를 표현하는 데 귀한 재료를 사용한다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푸른 망토는 단순히 옷의 색이 아니라
신앙과 부, 권위가 함께 담긴 색이었던 셈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알고 나면 성화 속 파란색이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이전에는 그저 아름다운 푸른 망토였는데, 이제는 저 비싼 안료를 얼마나 사용했을지 궁금해지거든요.
제가 좋아하는 라파엘로의 《안시데이의 성모》도 그렇습니다. 1505년 무렵 제작된 이 그림에서 성모는 깊고 아름다운 푸른 망토를 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런던 내셔널갤러리의 과학적 조사 결과를 보면 라파엘로가 얼마나 영리하게 그 색을 사용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성모의 망토를 그릴 때 먼저 상대적으로 저렴한 청색 안료인 아주라이트를 칠하고, 그 위에 값비싼 천연 울트라마린을 얇게 덧입혔습니다. 비싼 안료를 처음부터 두껍게 바르는 대신 다른 파란색으로 바탕을 만들고, 가장 중요한 표면에 귀한 색을 사용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나서 라파엘로가 조금 더 친근하게 느껴졌습니다. 천재 화가도 재료비를 생각해야 했던 겁니다.

물론 단순히 돈을 아끼기 위한 방법만은 아니었습니다.
서로 다른 안료를 겹쳐 원하는 깊이와 질감을 만들어 내는 화가의 기술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화가들은 오늘날처럼 물감 튜브를 짜서 그림을 그릴 수 없었습니다. 광물을 갈아 안료를 만들고, 기름이나 달걀 등과 섞어 원하는 성질의 물감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어떤 안료는 서로 섞으면 색이 달라지고, 어떤 안료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기도 했으니 재료에 대한 지식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르네상스의 화가들은 예술가이면서 상당한 수준의 재료 기술자였던 셈입니다. 작업실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 연금술 연구소를 떠올려도 아주 이상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역시 회화 재료와 빛, 색채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오늘날에는 회화와 화학을 서로 다른 분야로 생각하지만, 당시 예술가들에게 두 영역은 지금보다 훨씬 가까웠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유럽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조선의 청화백자에 사용된 파란색 역시 귀한 코발트 안료에서 나왔습니다. 초기에는 수입 안료에 크게 의존했고, 청화백자 자체도 왕실을 비롯한 일부 계층이 향유하던 고급 도자기였습니다.
유럽에서는 성모의 옷을, 조선에서는 값비싼 백자의 문양을 장식했던 색입니다.
지금은 파란색 하나를 만드는 데 큰돈이 필요하지 않지만, 그 시절의 파랑은 아무 데나 사용할 수 없는 색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야기가 달라졌습니다. 프러시안 블루가 등장하고, 코발트블루와 합성 울트라마린이 개발되면서 파란색은 점차 대중적인 색이 됐습니다. 과거에는 귀한 돌을 갈아 얻어야 했던 파란색을 이제는 공장에서 만들어 낼 수 있게 된 겁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파란색의 희소성이 사라져 가던 시대에
한 예술가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남자는
파란색에 자기 이름을 붙여버립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파란색, IKB
프랑스 예술가 이브 클라인 (Yves Klein)은 파란색에 거의 집착하다시피 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특히 사랑했던 색은 짙고 선명한 울트라마린 계열의 블루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울트라마린 안료는 가루 상태에서 굉장히 선명한 색을 보여주지만, 일반적인 결합재와 섞으면 그 강렬한 느낌이 줄어들 수 있었습니다. 클라인은 안료 특유의 깊이와 질감을 최대한 그대로 유지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안료 판매상이었던 에두아르 아당(Édouard Adam)과 함께 적절한 결합 방식을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안료의 강렬한 색감과 무광의 질감을 살리는 독특한 조합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1960년, 이 안료 조합을 인터내셔널 클라인 블루(International Klein Blue), 줄여서 IKB라는 이름으로 등록합니다.
파란색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자기 이름을 붙여버린 겁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파란색을 클라인이 소유하게 됐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가 등록한 것은 특정한 안료와 결합재의 조합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술의 역사에서 자신의 이름을 하나의 색채와 이토록 강하게 연결한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그의 작품 가운데는 캔버스 전체를 파란색 하나로 칠한 모노크롬 회화도 있습니다. 그림을 보면 그저 파랗습니다. 인물도 없고, 풍경도 없고, 복잡한 구도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화면을 오래 바라보게 됩니다. 물감이 칠해진 평평한 표면인데도 깊이를 알 수 없는 공간처럼 느껴집니다.

클라인이 추구했던 것은 단순한 색채 효과를 넘어선 무한함과 비물질적인 감각이었습니다. 그에게 파란색은 무엇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작품의 주제였습니다.
디자이너의 입장에서 보면 무척 흥미로운 시도입니다. 우리는 보통 형태를 만들고, 글자를 배치하고, 그림을 넣고, 마지막으로 색을 정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클라인은 반대였습니다. 색 하나만으로 작품의 정체성을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그 색을 IKB라고 부릅니다.
브랜드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꿈꿔볼 만한 일입니다.
어떤 색을 보았을 때 그 자체로 특정한 이름이나 세계관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 말입니다.
클라인은 색 하나로 자신만의 우주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파란색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든 사람은 또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캔버스가 아니라 정원 전체를 파랗게 칠했습니다.
파란색 정원에서 화장품 용기까지
모로코 마라케시에는 마조렐 정원(Jardin Majorelle)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사진을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식물보다 건물의 색에 먼저 눈길이 갈 겁니다. 선인장과 야자수 사이로 믿기 어려울 만큼 선명한 파란색 건축물이 등장하거든요.
이 정원을 만든 사람은 프랑스 화가 자크 마조렐(Jacques Majorelle)이었습니다. 정원 곳곳에 사용된 강렬한 색은 오늘날 마조렐 블루(Majorelle Blue)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정원의 파란 벽은 주변의 초록색 식물과 노란색 화분을 더욱 강렬하게 보이도록 만듭니다. 색을 조금만 바꿔도 공간 전체의 분위기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아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장소입니다.

이 정원에는 패션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의 이야기도 숨어 있습니다.
1980년 이브 생 로랑과 피에르 베르제는 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놓였던 정원을 매입하고 보존했습니다. 이브 생 로랑은 이곳에서 오랫동안 영감을 얻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한 화가가 선택한 파란색이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의 영감이 되고, 그 정원은 다시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찾아오는 장소가 됐습니다. 색이 공간의 성격을 만들고, 그 공간이 다시 사람들의 기억 속에 하나의 이미지로 남은 것입니다.
그런데 파란색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에서는 기업들도 만만치 않습니다.

가장 친숙한 예는 니베아입니다.
1925년 니베아는 기존의 장식적인 노란색 크림 통을 버리고 짙은 파란색 바탕에 흰색 글자를 사용한 용기를 선보였습니다. 그로부터 100년이 넘도록 이 기본적인 조합은 니베아의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제는 파란색의 둥근 크림 통만 보아도 니베아가 떠오를 정도입니다.
재미있는 건 브랜드가 오랫동안 같은 색을 사용하면, 그 색이 제품의 형태나 이름만큼이나 강력한 기억의 단서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IBM도 그렇습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디자이너 중 한 명인 폴 랜드(Paul Rand)가 1972년에 완성한 IBM의 여덟 줄짜리 로고는 기업 디자인 역사에서 손꼽히는 작품입니다. 세 글자를 가로줄로 분할한 단순한 구조인데, 그 자체로 기술과 질서, 정확함을 연상하게 만듭니다.
여기에 IBM 블루가 결합하면서 사람들은 기업의 이름을 넘어 그 색까지 기억하게 됐습니다. IBM이 '빅 블루(Big Blue)'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것이 괜한 일이 아닙니다.
니베아의 파랑과 IBM의 파랑은 다릅니다.
하나는 오랫동안 사용해 온 크림 통의 친숙함을,
다른 하나는 기술 기업의 정체성을 떠올리게 합니다.

펩시도 2023년 새로운 브랜드 디자인을 공개하면서 일렉트릭 블루와 검정을 강조했습니다. 기존에 사용하던 빨강과 파랑은 유지했지만 색의 농도와 조합을 바꾸면서 훨씬 역동적인 인상을 만들었습니다.
셋 다 파란색을 사용하지만 같은 이야기를 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어릴 때 싫어했던 바로 그 평범함이 사실은 디자이너에게 꽤 재미있는 문제였던 겁니다. 누구나 사용하는 색으로 어떻게 남들과 전혀 다른 성격을 만들 것인가.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생각하는 파란색 브랜드 사례는 따로 있습니다.
스위스의 고급 화장품 브랜드 라프레리(La Prairie)입니다.
라프레리의 스킨 캐비아(Skin Caviar) 용기를 보신 적 있으신가요? 아주 깊고 선명한 코발트블루를 사용합니다. 화장품에 흔히 사용되는 흰색이나 투명한 용기와는 확실히 다른 인상입니다. 그런데 이 파란색의 출발점은 화장품 회사의 회의실이 아니었습니다. 프랑스계 미국인 예술가 니키 드 생팔(Niki de Saint Phalle)이었습니다.
커다랗고 자유분방한 여성 조각으로 유명한 작가인데, 작품에 강렬한 원색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특히 코발트블루는 그녀가 매우 좋아했던 색이었습니다. 1982년 뉴욕의 한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니키 드 생팔은 자신의 향수를 개발하고 있었고, 같은 공간을 사용하던 라프레리 관계자들과 교류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그녀가 좋아하던 코발트블루가 라프레리의 색채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 인연은 훗날 스킨 캐비아의 상징적인 파란 용기로 이어졌습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에 사용하던 색이 어떤 우연한 만남을 통해 화장품 브랜드의 얼굴이 되고, 수십 년이 지난 뒤에도 사람들이 그 색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 같지 않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색이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하나의 내러티브가 될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디자인 작업을 하다 보면 색을 결정하는 과정에 적잖은 시간을 들이게 됩니다. 언뜻 비슷해 보이는 두 색을 놓고도 고민합니다. 때로는 원하는 색을 구현하기 위해 인쇄 방법을 바꾸거나 비용을 더 쓰기도 하지요.
그게 정말 그렇게 중요하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정말 정말 중요하다고 답할 겁니다.
파란색 하나만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성모 마리아의 망토와 이브 클라인의 캔버스, 마조렐 정원의 벽과 라프레리의 화장품 용기는 모두 파랗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전혀 다릅니다. 색 하나를 잘 선택하면 디자인의 성격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잘 사용하면 하나의 세계관을 만들 수도 있고요.
물론 그 과정이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파란색이 클라인 블루나 IBM 블루가 될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도 디자이너에게는 그런 가능성을 고민하는 과정 자체가 즐거운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야기한 파란색은 이미 역사가 된 색들입니다. 성모의 망토도, 클라인의 작품도, 니베아와 IBM의 색도 오랜 시간을 거쳐 오늘날의 의미를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파란색은 어떨까요?
우리는 그 색이 어떤 의미를 갖게 될지 미리 짐작할 수 있을까요?
2027년의 색은 이미 정해졌을까?
세계적인 트렌드 예측기관 WGSN과 컬러 전문기업 Coloro는 2025년 4월, 2027년 올해의 컬러로 '루미너스 블루(Luminous Blue)'를 선정했습니다. 이름 그대로 빛을 품은 듯한 파란색입니다.
WGSN은 이 색을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색으로 설명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선정 이유입니다. 자연과 기술, 전통과 미래, 온라인과 오프라인처럼 서로 다른 세계가 연결되는 시대를 상징한다는 겁니다. 오래된 보석인 청금석에서 현대의 배터리 기술에 쓰이는 코발트까지 연결하는 설명도 꽤 재미있습니다.

앞에서 한참 이야기했던 울트라마린의 원료가 청금석이었지요. 르네상스 화가들이 귀하게 여기던 광물이 수백 년을 건너 현대의 첨단 기술과 한 문장 안에 등장하는 겁니다. 물론 청금석과 배터리에 사용되는 코발트가 같은 물질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서로 다른 시대의 재료를 통해 파란색의 과거와 미래를 연결한 설명입니다.
그런데 컬러 트렌드 예측이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닙니다.
팬톤이나 WGSN이 올해의 컬러를 발표할 때마다 사람들은 마치 다음 해의 정답이 발표된 것처럼 받아들이곤 합니다. 하지만 특정 기관이 어떤 색을 선정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음 해부터 그 색을 좋아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패션과 디자인의 유행은 디자이너와 브랜드, 소비자의 선택이 겹치고 확산되면서 형성됩니다. 색의 유행 역시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눈에 띄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다릅니다.
이미 패션계에서 코발트블루의 움직임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조짐은 2027년보다 훨씬 전부터 있었습니다. 영국 《보그》는 코발트블루가 2024년 봄·여름 컬렉션의 로에베와 지방시에서 등장했고, 이후 드리스 반 노튼과 더 로우 등으로 확산됐다고 짚었습니다.
그리고 2026년에는 그 흐름이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2026년 1월 영국 《보그》는 코발트블루를 그해 주목할 색으로 소개했습니다. 패션 검색 엔진 태그워크(Tagwalk)의 자료를 인용해 2026년 봄·여름 런웨이에서 코발트블루 관련 룩이 139건 검색된다고 전하기도 했습니다.
아크리스와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컬렉션에 코발트블루를 폭넓게 사용했고, 랑방은 런웨이 공간까지 강렬한 블루로 채웠습니다. 반대로 질 샌더와 셀린느, 웨일스 보너처럼 절제된 의상 속에 선명한 파란색을 포인트로 사용한 브랜드들도 있었습니다.
2026년 2월 미국 《보그》 역시 코발트블루의 귀환을 다뤘습니다. 로에베와 질 샌더, 샤넬 등에서 나타난 강렬한 블루를 소개하며, 이 색이 점차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재미있는 건 《보그》가 그 흐름을 설명하면서 이브 클라 인의 파란색을 함께 언급한다는 겁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IKB가 미술관을 떠나 패션 기사 속으로 등장한 것이지요.

정확히는 코발트블루와 클라인 블루가 같은 안료나 동일한 색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패션계에서 두 이름이 비슷한 색감을 설명하는 용어로 함께 사용되는 겁니다.
그리고 올해 공개된 2027년 봄·여름 컬렉션에서도 그 움직임은 이어졌습니다. 캘빈 클라인, 로에베, 지방시, 랄프 로렌 등의 런웨이에서 선명한 코발트 계열의 블루가 등장했고, 패션 매체들은 이 색을 2027년의 주요 트렌드 후보로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색의 사용 방식도 다양합니다. 의상 전체를 짙은 블루로 채우는가 하면, 검정이나 흰색 의상에 아주 강렬한 파란색을 배치하기도 합니다. 소재에 따라 같은 계열의 색이 전혀 다르게 보이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벨벳이나 광택 있는 소재에서는 색이 더욱 깊게 느껴지고, 매트한 원단에서는 파란색 자체의 존재감이 부각됩니다.
평소 강렬한 색채를 좋아하는 저로서는 이런 컬렉션을 보는 일이 꽤 즐겁습니다. 오래전부터 선호해 온 선명한 원색들이 다시 눈에 띄기 시작했으니까요. 이들이 공유하는 것이 깊고 공통된 강렬한 파랑이라는 것이 꽤나 인상적 입니다.
어쩐지 내년도에 출시될 제품엔
코발트나 울트라 마린을 쓰고 싶더니
제 촉이 잘 맞았네요. ㅎㅎ
공간과 디지털에서 블루가 만들어내는 세계
저는 앞으로 블루가 패션만큼이나 흥미롭게 활용될 분야가
공간 디자인과 디지털 인터페이스라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마조렐 정원의 이야기를 했지만, 그곳을 떠올리면 파란색이 가진 힘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같은 건물이라도 벽을 흰색으로 칠했을 때와 마조렐 블루로 채웠을 때의 인상은 전혀 다를 겁니다.
공간에서 코발트블루는 상당히 독특한 색입니다. 한쪽 벽에 포인트로 사용해도 강렬하지만, 벽과 천장, 가구까지 같은 색으로 채우면 전혀 다른 경험을 만들어냅니다. 경계가 흐려지고 공간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색면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팝업스토어, 전시, 쇼룸처럼 방문객에게 짧은 시간 안에 강한 인상을 남겨야 하는 공간에서는 특히 효과적인 전략이 될 수 있습니다. 공간의 구조보다 색 자체가 경험의 중심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흔히 전시를 만들 때 무엇을 보여줄지부터 고민합니다. 어떤 물건을 놓고, 어떤 영상을 틀고, 어떤 그래픽을 사용할지 말이지요. 그런데 때로는 색 자체가 가장 강력한 콘텐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브 클라인이 캔버스 전체를 파란색으로 채웠던 것처럼, 공간 전체를 하나의 색으로 구성한다면 사람들은 그 안에서 어떤 감각을 경험하게 될까요?

사진을 찍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조형물이나 상품이라도 어떤 색의 공간에 놓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미지가 됩니다. 공간의 색이 곧 브랜드의 배경이 되고, 방문객이 남기는 사진과 영상에도 자연스럽게 그 색이 따라붙습니다.
브랜드를 알리는 데 반드시 거대한 로고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특정한 색만 보아도 그 브랜드를 떠올릴 수 있다면 공간 전체가 하나의 상징이 될 수 있으니까요.
물론 무조건 강렬한 파란색으로 도배한다고 좋은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소재의 질감과 조명, 주변 색과의 관계까지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같은 코발트블루라도 빛의 방향과 밝기에 따라 전혀 다른 분위기를 만들 수 있고요.
바로 그런 점이 재미있습니다.
인쇄물에서 별색을 배합하듯 공간에서도
조명과 재질을 통해 색의 성격을
조절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디지털에서는 어떨까요?
디지털 환경에서는 조금 다른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블루는 오랫동안 금융과 테크 기업의 디자인에 활용되어 왔습니다. 안정감과 신뢰를 표현하기에 적합하다는 인식 때문이었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IBM 역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선명한 블루가 브랜드의 시각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데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고 봅니다. 특히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이 일상으로 들어오면서 브랜드들이 미래적인 이미지를 전달해야 하는 상황이 많아졌습니다. 밝게 빛나는 블루, 깊은 어둠 속에서 드러나는 일렉트릭블루, 금속이나 유리의 질감과 결합한 블루는 이러한 표현에 잘 어울립니다.

WGSN 역시 루미너스 블루의 활용 가능성을 설명하면서 테크 제품의 광택과 금속성 표면, 화장품 패키지와 인테리어 등을 함께 언급했습니다. 단순히 옷에 입힐 색을 고른 것이 아니라 다양한 제품과 경험을 가로지르는 색으로 전망한 겁니다.
물론 디지털에서는 인쇄물이나 공간과 다른 조건이 있습니다.
디자이너가 아무리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색이라도 사용자가 불편하다면 좋은 디자인이 아닙니다. 특히 인터페이스에서는 색의 유행보다 사용성이 중요합니다. 눈에 띄는 것과 읽기 편한 것은 다른 문제니까요.
코발트블루 배경에 어떤 색의 글자를 사용할지, 버튼과 본문의 대비가 충분한지, 작은 스마트폰 화면에서도 정보를 쉽게 구별할 수 있는지까지 살펴봐야 합니다. 예쁘다고 형광색을 마음껏 사용했다가 정작 글자를 읽을 수 없다면 곤란하겠지요. 저도 강렬한 색을 좋아하지만 사용성을 포기할 생각까지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술적 조건을 충족한다는 전제에서 코발트블루는 디지털 브랜드가 자신만의 개성을 만드는 데 매력적인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AI 서비스나 새로운 디지털 경험을 제공하는 브랜드라면, 익숙한 파란색을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인상을 만들 여지가 있습니다.
중요한 건 파란색이라는 사실 자체보다 그 파란색을 어떻게 쓰느냐입니다.
누구나 파란색을 사용할 수 있지만, 모든 기업이 IBM처럼 기억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강렬한 블루로 공간을 꾸밀 수 있지만, 모든 장소가 마조렐 정원처럼 하나의 이름으로 기억되지는 않습니다.
결국 차이는 색에 어떤 성격과 이야기를 심느냐에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합니다.
한때 우리는 화면 속 파란색을 보며 신뢰할 수 있는 서비스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앞으로는 그 파란색을 보며 전혀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2027년의 블루가 정말 흥미로운 트렌드가 될 수 있을지 지켜보고 싶습니다.
패션에서 시작된 강렬한 색채의 흐름이 제품과 공간, 브랜드와 디지털 환경까지 얼마나 확장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디자이너와 기업이 자신만의 파란색을 만들어 낼까요?
저는 오히려 그다음 이야기가 더 기대됩니다.
제가 좋아하는 파랑

여기까지 쓰고 나니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어릴 때는 파란색이 너무 흔해서 싫었습니다. 주변에 파란색을 사용하는 기업이 너무 많았고,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색이라 특별할 게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그 평범함이 재미있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망토에서는 신성함과 부의 상징이었고, 르네상스 화가들에게는 다루기 까다로운 귀한 안료였습니다. 이브 클라인에게는 무한한 세계를 표현하는 수단이었고, 자크 마조렐에게는 정원 전체의 분위기를 만드는 색이었습니다.
니베아는 파란색으로 100년 넘게 이어지는 브랜드의 얼굴을 만들었고, IBM과 펩시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 색에 기업의 성격을 담았습니다. 라프레리는 한 예술가가 좋아하던 코발트블루를 자신만의 상징으로 발전시켰습니다.
그리고 이제 패션과 디자인 분야에서는 다시 강렬한 파란색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파란색은 한 번도 우리 곁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시대마다 사람들이 그 색에 담는 의미가 달라졌을 뿐입니다.
저는 여전히 빨강을 가장 좋아합니다.
형광 핑크와 형광 녹색도 좋아하고요.
하지만 요즘에는 코발트블루처럼 깊고 선명한 파랑에도 자꾸 눈길이 갑니다. 이색의 이름만 들어도 어렸을 때 봤던 다양한 영화들의 푸른 화면이 눈앞을 지나갑니다. 그래서인지 앞으로 이 색을 사용해 어떤 디자인을 만들 수 있을지 생각하면 벌써부터 흥미 진진합니다. 물론 이브 클라인처럼 제 이름을 붙인 색을 만들겠다는 생각까지는 없습니다.
광파랑?
이건 좀 그렇잖아요?! ㅋㅋㅋ

P.S.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보니
우리가 좋아하는 파란색 중에는 정확한 이름이 없는 색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해가 뜨기 직전 새벽의 파랑
끝을 알 수 없는 바다의 파랑
깊은 밤하늘의 파랑
파도에 부서지는 파랑
비가 그친 뒤의 파랑
청명한 가을 하늘의 파랑
누군가에게는 어린 시절 수영장 바닥의 파랑일 수도 있고, 오래전 여행지에서 만난 바다의 파랑일 수도 있겠지요. 또 어떤 날에는 기분이 울적해서 '오늘은 좀 블루하네'라고 말하기도 하고요. 같은 파란색인데도 누군가는 자유를, 누군가는 외로움을, 또 누군가는 오래된 기억을 떠올립니다.
여러분은 어떤 파랑을 좋아하시나요?
색의 이름이 아니라 여러분의 기억에 남아 있는
파랑이 있다면 그것도 궁금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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