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은 여전하게 찾아왔다. K는 눈을 뜨며 생각했다. 밤새 깨어 있던 것인지, 잠들었는지, 모르는 채 잠들었던 것인지 모르겠다고 느꼈다. 목 안이 건조해서 침을 삼키자 쓰라렸다. 추워서 코 끝이 시려웠다. 옆으로 돌아누워 웅크리고 이불을 코 밑까지 끌어당겼다.
K는 자기 파괴적이었다. 오늘처럼 추위에 떨며 일어날 것을 알면서도 보일러를 켜지 않거나 밥을 며칠씩 먹지 않거나 죽을 것 처럼 술을 마시고 정신을 잃어버리거나 비가 오는데 우산 없이 다녔다. 자기 자신을 아끼지 않으며 내팽개치면 죄책감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K는 스스로를 더럽고 지저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죄책감이 생겼다. 책임지지 않아도 될 그런 죄책감을 안고 살았다.
D는 K가 죄책감을 갖지 않아도 될 사람이란걸 확인시켜 주는 사람이었다. 겨울엔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보일러를 켜주고 술 대신 두부구이와 따끈한 밥을 차려주고 비가오면 버스 정류장으로 우산을 들고 마중나갔다. K는 D의 품에서 웃고 울며 죄책감을 잊었다. 하지만 이제 아침 마다 D는 없다.
D는 남은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았다. 할 수 있는만큼 치료를 받았고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도 차분하게 받아들였다. K가 울고 떼를 쓰며 계속 치료를 받으라고 우겼지만 D는 담담하게 웃으며 집에갈 시간이 된 것일 뿐이라고 했다.
D는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퇴원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도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읽고 뜨개질을 하고 글을 썼다. 글은 대체로 주변 사물과 날씨, 음식이나 그날 기분에 대한 것들이었다. K는 그런 D를 보며 왜인지 모르게 화가나서 어차피 이 세상을 영영 떠나게 될 텐데 뭐하러 책을 읽고 글은 왜 쓰냐고 물었다. D는 책을 읽는 이유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 세상에 대해 더 많이 알고 가고 싶어서 라고 했다. 글 쓰는 이유는 자기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어쩌면 세상에 남을 사람들을 위해 썼던 것을 아닐까. 이제와서 K는 그렇게 생각했다.
K는 이불을 둘러쓴 채로 거실에 나와 소파에 앉았다. 이렇게 보일러도 틀지 않고 추위에 떨며 소파에 앉아 있으면 D도 없이 세상을 사는 K가 벌을 받았다고 생각해서 다시 D를 돌려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주말동안 밥을 먹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D가 떠난 뒤엔 스스로를 괴롭혀야만 위로받을 수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하루씩 하루씩 보냈다.
세상은 전혀 변한 게 없는데 K에게만 세상은 그 날과 전혀 다른 세상이 되어 있었다. 그 전날에도 그날에도 오늘도 전광판의 광고는 똑같고 정류장에 서는 버스의 번호도 같지만 K는 어떤 기시감도 느끼질 못했다. 사이즈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했고 신발을 뒤집어 신은 것만 같았다. 시계 바늘 뒤의 세상처럼 K의 시간도 멈춘 것 같았다.
창 밖을 보니 온통 흰색이었다. 밤새 눈이 많이 내렸던 모양이다. K는 퀭한 얼굴로 옷을 챙겨입고 출근 준비를 했다. K는 장화를 참 좋아했다. 비가 올 때, 눈이 올 때 신는 장화가 달랐고 색도 다양했다. 오늘은 검정 장화를 꺼냈다. 앉아서 장화를 신으려는데 안쪽에서 폭신한 뭔가가 느껴졌다. 장화를 뒤집어 흔들어도 나오지 않아 손을 집어넣어 꺼냈다. 털실로 짠 양말이었다. 양말 바닥엔 ‘K 양말. made in D’ 라고 쓰여 있었다.
K가 발은 더럽다며 수건을 따로 쓰는걸 보고 D가 했던 말이 있다. 발은 어둡고 답답한 곳에서 언제나 우리를 지탱해주느라 힘들었을 뿐이라고, 고맙다고는 못할 망정 더럽다고 하면 안되는거라고 했다. 그러니 발을 아끼고 항상 고마워해야 한다고 했다. 매일 고맙다고 말하고 예쁜 양말을 신어서 사랑해주라고 장난스럽게 말하며 웃었다. D는 종종 K의 발을 씻겨주며 오늘도 수고했다고 했는데 K는 그게 발에게 하는 말인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궁금했었다.
K는 앉아서 D가 짜준 양말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발목 쪽엔 ‘오늘도 고마워’란 말이 수 놓여 있다. 여전히 그게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는 알 수 없지만 K는 더이상 더러운 존재라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양말을 신고 장화를 신고 문을 나섰다. 잠시 후 K는 잊은게 생각난 듯 다시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 꺼진 보일러를 오랜만에 다시 켜고선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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