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 문학으로 읽는 영국

대체되는 인간, 자동화와 영국의 노동 위기

함께 읽는 영국 장르 문학, 『클라라와 태양』두번째 이야기

2026.10.11 | 조회 113 |
0
|
from.
강태준

소설 속 조시의 아버지 폴은 오래전 기계에 자리를 내주고 일자리를 잃었다. 소설은 그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은 채, 그가 도시 바깥의 외딴 곳으로 밀려나 살아가게 됐다는 사실만을 담담하게 전한다. 그러나 이 짧은 설명에는 소설 속 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담겨 있다. 클라라가 진열창에 놓여 판매되는 이유부터 아이들이 좋은 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향상(lifting)’이라는 유전자 조작을 받아야 하는 이유, 그리고 향상을 받지 못한 아이들이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나는 이유까지, 이 모든 현상의 바탕에는 자동화가 자리하고 있다. 기계가 인간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사회는 기계에 대체되지 않은 사람들과 대체된 사람들로 갈라졌고, 그 경계는 교육과 기회의 격차로도 이어진다.

이시구로가 그려낸 이 세계는 먼 미래에만 존재하는 낯선 풍경이 아니다. 기술의 변화로 일자리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나는 역사를, 영국은 이미 여러 차례 겪어왔다.

첨부 이미지

1835년 영국의 직조 작업장에 설치된 로버츠 직기. 출처: Illustrator T. Allom, Engraver J. Tingle - History of the cotton manufacture in Great Britain by Sir Edward Baines,, Public Domain

 

***

 

1811년 3월 11일 밤, 잉글랜드 노팅엄셔(Nottinghamshire)의 작은 마을 아놀드(Arnold)에서 한 무리의 남자들이 기계를 부수기 위해 작업장으로 들어갔다. 이들의 분노는 생계를 위협하는 생산 방식의 변화에서 비롯됐다. 숙련 노동자의 손에 의존하던 작업이 저임금 노동력으로 대체되면서 오랜 세월 갈고닦은 기술의 가치는 떨어졌고, 임금과 일자리도 함께 줄어들었다. 노동자들이 휘두른 망치는 기계를 향했지만, 그들이 맞서려 했던 것은 자신들의 삶을 무너뜨리는 변화였다.

이들은 자신을 ‘네드 러드(Ned Ludd) 장군의 군사’라고 불렀다. 네드 러드는 1779년 양말 편직기를 부쉈다는 이야기로 알려진 전설적 인물로, 실제로 존재했는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노동자들의 저항을 하나로 묶는 상징이 됐고, 오늘날 우리가 ‘러다이트(Luddite)’라고 부르는 운동의 이름으로 남았다.

이후 러다이트 운동은 노팅엄셔를 넘어 요크셔와 랭커셔 등 잉글랜드 중부와 북부의 산업 지역으로 번져나갔다. 노동자들은 밤에 작업장과 공장에 침입해 기계를 파괴했고, 지역 주민들의 지지를 받기도 했다. 공장주들의 불안이 커지자 영국 정부는 1812년 기계 파괴를 사형에 처할 수 있는 중죄로 규정하는 법을 통과시키고, 산업 지역에 군대를 투입해 저항을 억눌렀다. 체포와 처형, 유배가 이어지면서 운동은 결국 진압됐다.

러다이트는 흔히 기술의 진보를 막으려다 패배한 사람들로 기억되지만, 그들이 무엇에 저항했는지를 들여다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들의 핵심적인 불만은 기술 자체보다 기술이 노동자의 생계와 권리를 희생시키는 방식으로 사용된다는 데 있었다. 생산성이 높아져도 그 혜택이 노동자에게 돌아오지 않고, 오랫동안 쌓아온 숙련이 평가절하된 끝에 빈곤만 남는다면 그러한 변화에 저항할 이유가 있다는 것이었다.

기술 발전으로 얻는 이익은 누가 누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손실은 누가 감당하는가. 러다이트가 남긴 이 질문은 2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첨부 이미지

1812년에 제작된 판화에 묘사된 ‘러다이트의 지도자’ 네드 러드. 출처: Unknown. 195 years since publication, copyright extinguished - Working Class Movement Library catalogue, Public Domain

 

***

 

산업혁명은 결국 영국의 경제와 사회를 바꿔놓았다. 기계의 발전과 함께 생산성이 높아지면서 영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했고, 철강과 석탄, 섬유와 조선 산업은 그 번영을 떠받치는 중심축이 됐다. 맨체스터와 버밍엄, 리즈와 셰필드, 뉴캐슬과 글래스고의 공장과 탄광에서는 수많은 노동자가 일했다. 노동은 고되고 위험했으며 보수도 넉넉하지 않았지만, 그들에게 일자리는 단순한 생계 수단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마을의 공동체를 지탱하고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기반이자,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이어지는 기술과 자부심의 원천이었다.

이 세계가 본격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후반이었다. 특히 1980년대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 정부는 국유 산업의 민영화와 노동조합의 영향력 축소를 추진하며 영국 경제를 재편했다. 금융과 서비스업이 경제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동안, 북부 잉글랜드와 웨일스, 스코틀랜드의 오래된 산업 지역에서는 공장과 탄광이 문을 닫았다. 경제 현대화의 성과 이면에는 일자리와 삶의 터전을 잃은 지역사회의 상처가 남았다.

그 갈등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난 사건이 1984년 3월 시작된 광부 파업(Miners’ Strike)이었다. 국가석탄위원회(NCB)가 탄광 20곳을 폐쇄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자 전국광부노동조합(NUM)은 이에 맞서 파업에 나섰다. 약 1년 동안 이어진 투쟁 속에서 광부 가족들은 구호품과 지역사회의 지원에 의지해 버텼고, 탄광 마을에서는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와 작업을 계속한 노동자 사이에 깊은 골이 생겼다. 그러나 광부들은 결국 탄광 폐쇄를 막지 못한 채 일터로 돌아갔고, 이후 석탄 산업의 쇠퇴와 함께 일자리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바나슬리(Barnsley)와 그림소프(Grimethorpe) 같은 탄광 지역에는 그 여파가 오랫동안 남았다. 마을의 경제를 떠받치던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술집과 상점도 손님을 잃었고, 젊은이들은 기회를 찾아 다른 지역으로 떠났다. 남겨진 주민들은 실업과 빈곤을 견뎌야 했으며, 오랜 세월 축적한 기술과 경험도 더 이상 생계를 보장해주지 못했다. 탄광의 폐쇄는 하나의 산업이 쇠퇴하는 사건인 동시에, 그 산업을 중심으로 형성된 공동체와 삶의 방식이 무너지는 과정이었다.

첨부 이미지

1984년 열린 광부 파업 지지 행진. 출처: sludgegulper - https://www.flickr.com/photos/28179929@N08/4057072990/, CC BY-SA 2.0

 

***

 

탈산업화가 남긴 상처는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에서도 드러났다. 런던과 스코틀랜드, 여러 대학 도시가 유럽연합 잔류를 선택한 반면, 북부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오래된 산업 지역 상당수는 이탈을 지지했다. 이 선택을 경제적 요인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산업 쇠퇴에 따른 박탈감과 정치적 소외감, 오랜 세월 누적된 불만은 투표 결과를 이해하는 중요한 배경이다.

이러한 분열은 흔히 ‘남겨진 사람들(left behind)’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된다. 세계화와 기술 발전으로 새로운 기회를 얻은 사람들 곁에는, 같은 변화 속에서 일자리와 삶의 기반을 잃은 사람들이 있었다. 『클라라와 태양』에서 폴이 기계에 일자리를 내주고 도시 바깥으로 밀려나는 모습은 이 현실을 소설 속으로 옮겨놓은 듯하다.

이 역사를 노동과 기술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오늘날 인공지능과 자동화의 확산은 또 하나의 거대한 변화로 읽힌다. 러다이트가 편직기에 맞섰던 산업혁명과 대처 시대의 탈산업화에 이어, 이제는 지식 노동의 영역까지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회계와 법률 보조 업무, 의료 영상 분석, 번역과 콘텐츠 작성처럼 전문 지식이 필요한 일도 자동화의 영향권에 들어왔다. 일자리가 얼마나 사라질지를 둘러싼 전망은 엇갈리지만, 기술이 바꿔놓을 노동의 범위가 육체노동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해지고 있다.

이시구로는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에서도 이러한 변화가 초래할 분열을 경고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그 혜택을 누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 깊은 격차를 만들고, 극단적인 능력주의가 아파르트헤이트를 닮은 사회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였다. 『클라라와 태양』은 그 경고를 소설의 세계에서 구체화한 작품으로 읽을 수 있다. ‘향상’을 받은 아이들과 받지 못한 아이들 사이의 차이가 교육과 사회적 기회의 격차로 굳어지는 모습은, 기술이 인간의 가능성을 넓히는 동시에 새로운 계급의 경계를 만들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첨부 이미지

1845년 피터버러 이스트역에서 기차로 운송되는 라우스–런던 구간의 왕립우편. 출처: James Pollard (1792 - 1867) – Artist (British)Born in Islington. Died in Chelsea.Details on Google Art Project - MwEJSFR8qSbyjA at Google Cultural Institute maximum zoom level, Public Domain

 

***

 

하지만 이 역사를 일자리 상실과 공동체의 붕괴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러다이트들이 생계를 위협한다고 여겼던 기계는 영국이 산업 강국으로 성장하는 동력이 됐고, 산업혁명은 오랜 혼란과 고통 속에서도 새로운 산업과 일자리를 만들어냈다. 다만 새롭게 생겨난 일이 노동자들이 잃어버린 일과 같지는 않았으며, 변화의 혜택이 그 과정에서 희생을 감내한 사람들에게 돌아간다는 보장도 없었다. 훗날 탄광 마을들이 쇠퇴하는 동안 런던의 금융 중심지인 시티가 번영한 모습에서도 이러한 불균형을 확인할 수 있다.

기술 발전이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내더라도, 그 기회는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사는 곳과 다른 지역에 생기거나 그들이 갖추지 못한 기술과 교육을 요구하곤 한다. 경제 전체가 성장한다는 사실만으로 삶의 기반을 잃은 개인과 공동체가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기술 변화가 낳은 번영에 시선이 쏠릴수록, 그 혜택에서 멀어진 사람들이 겪는 고통은 쉽게 가려진다.

클라라의 시선은 이러한 현실을 온전히 포착하지 못한다. 그녀는 조시를 세심하게 관찰하며 최선을 다해 돕지만, 폴이 일자리를 잃고 도시 바깥에서 살아가게 된 배경까지 충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의 처지를 설명하려면 개인의 능력이나 선택을 넘어, 누군가의 기술을 불필요하게 만들고 새로운 기회를 다른 사람에게 배분하는 사회의 구조를 살펴봐야 하기 때문이다. 진열창 안에서 사람들의 표정과 행동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는, 그들의 삶을 좌우하는 힘까지 알아보기 어렵다.


함께 생각해볼 질문들

  • 러다이트는 오늘날 '기술 혐오자'의 대명사처럼 쓰이지만, 실제로 그들이 저항한 것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기술이 도입되는 방식이었다. 오늘날 AI 자동화에 대한 저항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그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인가, 아니면 러다이트와 마찬가지로 정당한 문제 제기인가.
  • 기술 혁명은 반복적으로 전체적인 번영을 가져왔지만, 그 과정에서의 고통은 특정 지역과 계층에 집중되었다. 이것이 불가피한 것인가, 아니면 정책적으로 다르게 할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혜택을 받은 사람들은 고통을 받은 사람들에게 어떤 책임을 지는가.
  • 소설 속 유전자 향상(lifting)은 자동화로 인한 새로운 사회 분열의 은유다. 향상받은 아이와 받지 못한 아이 사이의 격차가 자동화 시대의 교육 격차와 어떻게 닮아 있는가. 오늘날 어떤 종류의 교육과 기술이 이 시대의 '향상'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는가.

함께 들으면 좋은 음악

  • Billy Bragg – 'There Is Power in a Union' (1986) 에섹스 출신의 빌리 브랙은 탈산업화 시대 영국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음악으로 이어받은 예술가다. 이 곡은 광부 파업이 한창이던 시기에 나왔다. 공동체가 해체되고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저항, 그리고 연대의 중요성을 노래한다. 폴이 일자리를 잃고 도시 바깥으로 밀려나는 소설의 배경을 생각하며 듣기를 권한다.

 

다음 화 예고

클라라는 조시를 사랑하는가.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는 이 질문을 거듭 마주하게 된다. 클라라는 조시의 기분을 살피고 필요한 것을 헤아리며, 조시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일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 모습은 사랑처럼 보이지만, 클라라가 인간이 만든 기계라는 사실은 판단을 망설이게 한다. 그녀의 행동이 설계와 학습의 결과라면,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사랑을 정교하게 모방하는 것과 실제로 사랑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 질문은 영국에서 오랫동안 이어져온 기계와 인간에 관한 논의와도 맞닿아 있다. 1950년 맨체스터 대학교에서 연구하던 앨런 튜링(Alan Turing)은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접근하기 위해 ‘이미테이션 게임(imitation game)’을 제안했다. 오늘날 튜링 테스트(Turing Test)로 알려진 이 방식은 대화를 통해 상대가 인간인지 기계인지 구별할 수 있는지를 살핀다. 그러나 인간과 구별하기 어려울 만큼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능력이 곧 사고의 증거인지를 두고는 지금도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클라라의 행동을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묻는 순간, 독자는 튜링이 제기한 문제를 감정의 영역에서 다시 마주하게 된다.

마지막 화에서는 이러한 질문이 이어져온 역사를 따라가려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에니그마 암호 해독에 기여하고 현대 컴퓨터 과학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지만, 동성애를 이유로 형사처벌을 받은 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튜링의 삶에서 출발해 영국 철학이 마음과 의식의 문제를 어떻게 다뤄왔는지 살펴본다. 이를 통해 클라라라는 존재가 그 오랜 사유의 역사에 어떤 질문을 더하는지도 생각해보고자 한다.

클라라에게 영혼이 있는지를 묻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영혼이라는 말로 무엇을 뜻하는지부터 돌아봐야 한다. 어쩌면 클라라가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어려운 질문은 기계의 내면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내면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에 관한 것인지도 모른다.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THE PUNT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다른 뉴스레터

© 2026 THE PUNT

영국 인문교양 뉴스레터 | 매주 여러분의 시야를 영국이 전세계에 미친 광활한 영향력만큼 넓고 깊게 확장해드립니다.

뉴스레터 문의hello@thepunt.co.uk

메일리 로고

도움말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채팅으로 문의하기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대표번호: 070-8027-1409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특별시 송파구 위례광장로 199, 5층 501-2-31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