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박물관엔 없는 이야기들

영국 반(反)이민 시위, 그리고 영국 보수의 지성 로저 스크루턴의 오래된 경고

서구의 성취는 어떻게 상대주의와 무분별한 다문화주의 속에서 무너지는가

2026.10.24 | 조회 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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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준

 최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폭력 시위로 인해 유럽의 이민자 문제에 대한 논의가 다시금 수면 위로 오르고 있는 모습입니다.

오늘 뉴스레터에서 전해드릴 글은 2025년 9월 영국에서 대규모 반(反)이민 시위가 일어난 후 이와 관련해 소개해 드리고 싶은 도서가 있어 제 개인 블로그에 적었던 글입니다. 

비록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관련이 있다 여겨져 이렇게 가져와봤습니다.


최근 영국에서는 1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런던 도심에 모여 대규모 반(反)이민 시위를 벌였다. 많은 언론사들이 ‘Unite the Kingdom’이라는 이름의 이 집회를 ‘극우’ 혹은 ‘인종차별적’인 시위로 규정지었지만 또 한편에선 이를 영국 사회에 만연한 이민 정책과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불안이 집단적으로 분출된 사건이라고 보는 시각도 컸다.

평가가 어떻든 이 시위는 단순한 여론 표출을 넘어, 언론, 정치권, 시민사회의 다층적 반응을 촉발하는 데 성공했다. 영국 정부는 난민 수용 시설, 이민 정책, 사회 통합 문제를 다시 들여다보고 있으며, 언론과 시민사회에서는 혐오 발언과 증오 범죄 방지라는 또 다른 과제를 놓고 치열한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

 

영국이 현재 처한 갈등을 이미 오래전에 경고한 철학자가 있다. 바로 로저 스크루턴(Roger Scruton)이다. 그의 저서 『How to Be a Conservative』를 통해서다.

1944년 노동당을 지지하는 전형적인 영국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스크루턴은, 철저한 사회주의자였던 그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레 좌파적 정치 성향을 지지하며 성장했다. 그러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며, 그리고 무엇보다 1968년 파리 학생 시위를 직접 목격하면서 그는 자신의 정치적 좌표가 크게 흔들리는 경험을 한다. 좌파 성향을 가진 학생들이 차를 불태우고 건물을 점거하며 ‘혁명’을 외치는 모습을 보며 그는 처음으로 “나는 저들과는 다르다”라는 자각을 했다고 고백한다.

무질서와 파괴를 이상화하는 급진적 운동에 대한 반발심은 그를 보수주의자의 길로 이끌었다. 이후 그는 버크벡 칼리지에서 오랫동안 미학을 가르쳤고, 《솔즈베리 리뷰》를 창간하며 영국 보수 지식인의 대표적 목소리로 자리 잡았다.

『How to Be a Conservative』은 단순히 ‘보수 주의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말하는 책이 아니다. 저서는 스스로 노동당 가정 출신이자 좌파적 토양 속에서 성장했던 저자가, 어떻게 서구 문명을 지키는 것이 공동체와 개인의 번영을 위한 길인가를 철학적으로 풀어낸 고백이자 논증이다. 그는 민주주의, 법치, 표현의 자유 같은 서구의 성취가 상대주의와 무분별한 다문화주의 속에서 쉽게 무너질 수 있음을 경고했다.

첨부 이미지

How to Be a Conservative의 초판 커버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은 많은 사람들이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을 단순히 '다른 문화를 존중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문화주의의 핵심은 모든 문화가 도덕적·지적으로 동등하며, 따라서 어떤 문화도 다른 문화보다 우월할 수 없다는 전제에 있다. 이 논리를 서방 사회에 적용시켜보면 서구 문명의 핵심 가치들(예를 들면 민주주의, 법 앞의 평등, 표현의 자유, 여성의 권리, 소수자에 대한 관용)을 보편적 가치로 옹호할 수 없는 상황에 다다르는 경우가 생긴다. 이는 급진적인 선동가들에 의해 주류 문화를 '부적절하고, 악하고, 억눌러야 하는 것'으로 폄하하는 움직임으로 번지기도 한다. 이민자를 대량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서방 국가들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문제 중 하나다.

다인종 사회와 다문화주의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다양한 인종이 공존하는 사회는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그 사회가 건강하게 유지되려면, 주류 문화가 스스로를 낮추고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 공통의 문화적 기반 없이 다양성만 강조된다면, 사회는 곧 분열의 길을 걷게 된다.

오늘날 영국에서 벌어지는 반이민 시위와 같은 현상이 스크루턴이 이미 오래전에 제기했던 문제의식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스크루턴에게 보수 주의는 과거의 전통을 무비판적으로 붙잡는 태도가 아니다. 그는 보수 주의를 ‘공동체가 존립하기 위한 기반을 보존하고 가꾸는 실천적 자세’로 정의한다. 사회는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그 변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변화 자체를 지탱해 주는 토대가 필요하다는 거다. 스크루턴은 이 토대가 언어, 예술, 종교, 지역 공동체, 그리고 자율적 제도들이라고 소개한다.

그는 언어를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이 아닌 공동체의 기억과 가치, 사고의 틀을 공유하게 하는 문화적 자산으로 보았으며, 이것이 무너지면 세대 간 연속성과 상호 이해도 끊어진다고 주장했다. 예술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예술을 개인적 취향의 산물이 아니라, 한 사회가 무엇을 아름답고 의미 있는 것으로 여겨왔는지를 보여주는 집단적 표현으로 이해했다. 종교 또한 단순히 초월적 믿음의 차원을 넘어, 도덕적 질서와 사회적 연대를 형성하는 핵심 장치로 평가했다.

여기에 더해 스크루턴이 강조한 것이 바로 ‘국가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자율적 제도들’이다. 그는 교회, 대학, 길드, 시민단체, 자선단체 같은 제도들은 개인과 국가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하며, 권력이 전체를 장악하지 못하게 막는다고 봤다. 이러한 자율적 기관들이 건강하게 작동할 때 시민들은 신뢰와 책임감을 배우고, 사회는 전체주의적 통제에 휘둘리지 않는 힘을 갖게 된다고 믿었다.

첨부 이미지

로저 스크루턴. 출처: Common Sense Society

 

***

 

그렇다면 다문화주의와 스크루턴이 제시한 사회의 기반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그는 무분별한 다문화주의가 ‘모든 문화는 동등하다’는 전제를 내세우며 주류 문화의 정당성을 부정할 때, 이 공통의 틀이 약화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언어의 경우, 공통 언어를 공유하는 것은 공동체가 상호 이해와 협력을 유지하는 기본 조건이다. 하지만 다문화주의가 “각자의 언어를 존중하자”는 식으로만 흐르면, 이민자 집단이 언어 통합을 거부하거나 뒤로 미루게 된다. 그 결과 공적 공간에서의 소통이 어려워지고, 사회는 점점 병렬적 소집단들로 분열된다.

예술과 문화적 표현 역시 마찬가지다. 예술은 특정 공동체의 가치와 정체성을 드러내는 수단인데, 다문화주의가 이를 ‘특정 집단의 배타적 산물’로 치부하거나, 모든 문화적 산물을 동일한 가치로만 취급하면, 주류 사회가 공유하던 미적·윤리적 기준은 설득력을 잃는다. 공동의 문화적 기억이 해체되면 세대 간 전승되는 정체성도 흔들린다.

종교와 도덕적 전통은 더욱 직접적인 타격을 받는다. 서구 사회에서 기독교 전통은 단순히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존엄, 정의, 관용 같은 가치를 낳은 토대였다. 그러나 다문화주의는 이를 “하나의 문화적 관점”으로 상대화하며, 심지어 차별적 유산으로 폄하하기도 한다. 이런 식의 상대화는 사회의 도덕적 합의와 규범을 약화시키고, 공통된 윤리적 기준을 무너뜨린다.

마지막으로 자율적 제도들은 다문화주의적 압력 속에서 종종 “특정 문화의 산물”로 공격받는다. 예컨대 대학이나 시민단체, 교회 등이 주류 문화의 가치를 반영한다는 이유로 해체 압력을 받게 되면, 개인과 국가 사이를 연결해 주는 완충 장치가 무너진다. 그 결과 국가는 소수 집단들을 각각 달래야 하는 정치적 압력에 시달리거나, 반대로 강력한 중앙 통제를 통해 혼란을 관리하려 든다. 어느 쪽이든 시민적 자율성과 신뢰는 약화된다.

결국 스크루턴이 본 위협은 '다양성' 그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다양성이 공동의 토대를 대체하는 원리로 작동할 때이다. 모든 문화가 동등하다는 논리 아래 주류 사회의 언어, 예술, 종교, 제도가 정당성을 상실하면,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힘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파편화된 집단과 권력 투쟁뿐이라는 것이 그가 내린 진단이다.

최근 영국의 반이민 시위는 이러한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사례라 할 수 있다. 스크루턴이 제기한 문제의식, 즉 공통 가치의 상실이 사회 분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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