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박물관엔 없는 이야기들

세상의 끝에서 살기로 했다

영국 해외영토 트리스탄다쿠냐, 지구에서 가장 외딴 유인도의 222명

2026.10.10 | 조회 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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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준

‘세상에서 가장 외딴섬(the remotest island)’이라는 별명은 얼마나 먼 곳에 붙는 이름일까.

그 별명의 주인공은 남대서양의 트리스탄다쿠냐(Tristan da Cunha)다. 영국 해외영토에 속한 이 섬에서 가장 가까운 대륙인 아프리카까지는 약 2,800킬로미터를 건너야 한다. 공항도 없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에서 배를 타고 대략 일주일을 가야 닿을 수 있다. 정확히는 세계에서 가장 외딴 유인도로 알려진 이곳에서, 바다는 사방으로 펼쳐진 풍경이자 세상으로 나가는 유일한 길이다.

그런데 이 섬의 역사에서 가장 마음을 붙드는 것은 고립의 깊이보다 그곳으로 돌아가려 했던 사람들의 선택이다. 1961년 화산 분화로 고향을 떠나 영국에 피신한 주민들은 새로운 생활을 꾸릴 기회를 얻었지만, 이듬해 열린 귀환 투표에서 찬성 148표, 반대 5표로 돌아갈 뜻을 밝혔다. 1963년에는 선발대와 본대가 차례로 바다를 건너 고향에 닿았다.

집과 일터를 복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들은 왜 그 먼 섬으로 돌아갔을까. 지도에서는 푸른 바다에 묻힌 작은 점에 불과한 땅이 누군가에게는 다시 삶을 시작하고 싶은 곳이었다는 사실이, 트리스탄다쿠냐의 이야기를 오래 들여다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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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글지도 위 트리스탄다쿠냐의 위치

 

수비대가 떠난 뒤 시작된 삶

 

이 섬과 영국의 인연에는 나폴레옹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패한 나폴레옹은 남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섬으로 유배됐다. 영국은 프랑스 세력이 트리스탄다쿠냐를 구출 작전의 거점으로 삼을 가능성을 경계했고, 이것이 이듬해 영국군이 섬을 점령해 수비대를 주둔시킨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영국은 곧 이곳의 전략적 가치가 크지 않다고 판단했고, 1817년 수비대를 철수시켰다.

그때 스코틀랜드 출신 상병 윌리엄 글래스는 섬에 남기로 했다. 남아프리카 출신 아내 마리아와 두 자녀, 그리고 석공 두 명이 그와 함께했다. 이들보다 먼저 정착을 시도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공동체의 기틀을 놓은 것은 이 작은 무리였다.

글래스가 왜 남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그들이 어떤 삶을 꿈꿨는지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1817년 11월에 작성된 공동생활 협약에는 물자와 이익, 비용을 고르게 나누고, 누구도 다른 사람 위에 서지 않는다는 원칙이 담겼다.

협약 하나로 섬의 삶이 늘 평등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래도 그 출발점에는 함께 살아갈 사람들이 생활의 규칙을 스스로 정하려는 뜻이 있었다. 제국이 군사적 필요로 차지했다가 버리고 떠난 땅에서, 남은 이들은 먹을 것을 구하고 집을 짓고 아이를 키우며 자신들의 역사를 써 나가기 시작했다.

공동체는 저마다 다른 사연을 지닌 사람들이 하나둘 합류하며 자라났다. 영국과 미국에서 온 선원, 네덜란드 출신의 난파 생존자, 세인트헬레나에서 건너온 여성들이 가정을 이뤘다. 1892년에는 불이 난 이탈리아 선박에서 살아남은 안드레아 레페토와 가에타노 라바렐로가 이곳에 뿌리를 내렸다.

글래스, 그린, 해건, 라바렐로, 레페토, 로저스, 스웨인. 이 일곱 성씨에는 그 이동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오늘날 주민 명부에는 다른 성씨도 올라 있지만, 공동체의 오랜 뿌리는 여전히 이 일곱 이름이다. 외딴섬의 주민들은 처음부터 한 고장 사람들이 아니었다. 서로 다른 곳에서 출발한 이들이 한곳을 고향으로 삼아 대를 이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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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스탄다쿠냐의 기. 출처: Public Domain

 

세상이 빨라질수록 멀어진 섬

 

트리스탄다쿠냐가 처음부터 세계의 바닷길에서 동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범선이 바람과 해류에 기대어 움직이던 시대, 섬은 유럽에서 인도양으로 향하는 항로 위에 놓여 있었다. 지나가던 배들은 물과 식량을 구하러 이곳에 들르곤 했다.

섬을 멀어지게 한 것은 바깥 세계의 변화였다. 고래잡이 산업이 기울면서 찾아오는 배가 줄었고, 1869년 수에즈운하가 열리자 유럽과 아시아를 오가는 배들은 더 이상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갈 필요가 없어졌다. 증기선이 범선을 밀어내면서 바람을 따라 이곳을 지나던 항로도 의미를 잃었다. 섬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지만, 사람들이 오가는 길이 다른 곳으로 옮겨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무렵에는 정기 보급선마저 끊겼다. 섬의 공식 역사에 따르면 1919년 7월 영국 군함 야머스가 휴전 소식을 싣고 오기까지 10년 동안 우편이 한 통도 들어오지 않았다. 다른 경로로 전해진 소식이 전혀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바깥세상과의 연결이 얼마나 위태로웠는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편지를 기다리는 섬사람에게 바다는 아름다운 풍경인 동시에, 누군가의 안부가 건너와야 하는 아득한 거리였을 것이다. 수평선 위로 배 한 척이 모습을 드러낼 때, 그 배에는 물자와 소식만이 아니라 오래 접어둔 기대까지 실려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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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에 발행된 트리스탄다쿠냐 우표

섬의 유일한 마을에는 '일곱 바다의 에든버러'라는 웅장한 이름이 붙어 있다. 1867년 빅토리아 여왕의 아들인 에든버러 공작 앨프리드의 방문을 기념한 이름이다. 그러나 주민들은 마을을 그저 '세틀먼트', 곧 정착지라고 부른다. 공식 명칭에는 먼 왕실의 흔적이, 일상의 이름에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온 시간이 배어 있다.

왕실과의 인연은 1957년에 다시 이어졌다. 엘리자베스 2세의 남편 필립 공이 멜버른 올림픽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왕실 요트 브리타니아호를 타고 섬에 들른 것이다. 그는 섬에 올라 주민들이 짓고 있던 마을 회관의 초석을 놓았고, 그 건물은 훗날 '프린스 필립 홀'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회관 안에는 앨버트로스 바가 있고, 주민들은 이곳에 모여 춤을 추고 행사를 연다. 왕실 방문의 기억은 그렇게 마을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었다. 먼 나라의 역사가 사람들이 만나고 어울리는 공간에 자연스레 녹아 있다는 점이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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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바다의 에든버러 마을 지도. 출처: Peter Fitzgerald, OpenStreetMap - OpenStreetMap, CC BY-SA 2.0

 

고향을 떠나야 했던 가을

 

1961년 10월, 마을 가까운 땅이 부풀어 오르더니 새로운 화산 분출구가 열렸다. 위험이 커지자 주민들은 섬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집과 밭, 가축과 일터를 모두 두고 떠나는 피난이었다. 주민들은 나이팅게일섬을 거쳐 케이프타운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다시 배를 갈아타고 영국에 닿았다.

영국에서는 처음에 서리의 임시 시설에 머물다가 사우샘프턴 인근 캘숏의 옛 공군 기지로 옮겨갔다. 아이들은 학교에 다녔고 어른들은 일자리를 얻었다. 새 환경에 잘 적응한 이들도 있었지만, 독감과 혹독한 겨울은 주민들을 힘들게 했다.

일자리와 학교가 있다고 해서 낯선 땅이 곧바로 고향이 되지는 않는다. 섬에서는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 사이에 저마다의 자리가 있었지만, 영국에서는 그 자리부터 다시 찾아야 했다. 생활이 편리해지는 것과 어딘가에 속해 있다고 느끼는 것 사이에는 서로 다른 시간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섬으로 돌아가도 된다는 판단이 내려지자 주민들은 귀환을 준비했다. 고향이 그들을 편안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돌아가면 버려진 집을 손보고 일터를 처음부터 다시 세워야 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다시 바다를 건넜다는 사실은, 그곳에 되찾고 싶은 삶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 선택을 하나의 감정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사람마다 가족과 일, 기억과 기대가 달랐을 것이고, 영국에 남기를 바란 이들도 있었다. 다만 돌아가기로 한 사람들에게 섬이 지닌 가치는, 바깥사람이 소득이나 편리함만으로 가늠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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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촬영된 트리스탄다쿠냐 사진. 출처: NASA - http://earthobservatory.nasa.gov/IOTD/view.php?id=80456, Public Domain

 

감자밭으로 가는 버스

 

오늘날 마을에서 감자밭이 모여 있는 '패치스'까지는 고령 주민들을 위한 버스가 다닌다. 집집마다 낮은 돌담을 두른 작은 밭에서 감자와 채소를 기르고, 가족이 함께 심고 돌보고 거둔다. 돌담은 거센 바람을 막아주고, 밭은 여러 세대에 걸쳐 주민들의 식탁을 지켜왔다.

바깥사람에게는 대양 한복판을 달리는 버스가 이색적인 풍경이겠지만, 주민들에게는 그날 할 일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는 평범한 교통수단일 뿐이다. 땅을 고르고 작물을 살피며 계절이 바뀌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 이곳에서도 하루의 리듬을 만든다.

바다에서는 트리스탄 바닷가재를 잡는다. 어업은 섬의 주요 수입원으로, 공동체가 바깥세상과 거래하며 살아가는 버팀목이다. 밭에서 얻는 식량, 바다에서 얻는 수입, 그리고 배로 들어오는 물자. 이 작은 섬의 삶은 이 세 가지에 기대어 이어진다.

물론 이런 풍경을 앞세워 고립을 낭만화할 수는 없다. 병원이 있어도 필요한 치료를 모두 받을 수는 없고, 섬을 떠나 공부하는 학생들도 있다. 교육과 의료를 위해 섬을 떠나는 일은 이 공동체의 일상이다.

작은 마을에서 서로를 속속들이 안다는 것은 위안이 되기도 하지만, 나만의 거리를 갖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남는 사람에게도 떠나는 사람에게도 저마다의 이유가 있고,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이 늘 같은 선택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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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의 유일한 마을인 ‘일곱 바다의 에딘버러’. 사진 앞쪽 중앙에서 왼편으로, 1961년 분화 당시 형성된 기생화산이 보인다. 출처: Brian Gratwicke from DC, USA - Settlement on Tristan, CC BY 2.0

 

돌아올 자리가 있다는 것

 

트리스탄다쿠냐의 역사는 윌리엄 글래스 한 사람의 결심으로 완성되지 않았다. 함께 남은 가족과 동료들, 바다를 건너온 여성들, 난파선에서 살아남은 선원들, 피난길에 올랐다가 끝내 돌아온 주민들이 저마다의 삶을 보태며 마을을 지켜왔다.

2026년 9월 말 주민 명부에 이름을 올린 222명은 그 긴 역사의 현재다. 그중에는 잠시 섬 밖에 머무는 이도 있고, 바깥에서 들어와 함께 사는 이도 있다. 고립된 공동체에서도 사람들의 오고 감은 멈추지 않으며, 마을의 모습은 세대가 바뀔 때마다 조금씩 달라진다.

멀리서 바라보는 이에게 이곳은 세상의 끝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자란 이에게는 세상을 처음 알게 된 자리다. 어린 시절 걷던 길과 가족의 집, 함께 일하는 이웃의 얼굴이 있는 곳이라면, 대륙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는 고향을 설명하는 여러 조건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1962년 겨울, 투표장에서 주민들이 고른 것도 지도 위의 외딴섬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쌓아온 관계와 자신이 맡아온 일, 익숙한 풍경 속에서 맞이할 내일이 함께 떠올랐으리라. 돌아간 뒤에도 그들은 집을 고치고 밭을 일구며, 떠나기 전의 삶을 조금씩 되찾아가야 했다.

트리스탄다쿠냐의 이야기는 귀환 이후에도 계속된다. 고향은 돌아가는 순간 완성되는 곳이 아니라, 돌아온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며 날마다 새로 만들어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1963년 촬영된 트리스탄다쿠냐 주민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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