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에 새긴 호흡, 금속으로 쓴 시

유은정 <내가 던진 모든 질문> KCDF갤러리

2026.09.22 | 조회 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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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환> 2026, Pewter and Silicone, Casting and silicone molding, 110x70x10cm
<순환> 2026, Pewter and Silicone, Casting and silicone molding, 110x70x10cm

구독자 님, '내 어디가 좋아?'라는 질문을 받아본 적이 있나요? 사랑하는 데 이유가 어딨겠냐마는, 사랑의 근원을 알고 싶은 마음도 그 사랑의 일부일 겁니다.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일, 심중을 헤아려보는 일, 존재에 화답하는 일도 무릇 사랑이겠지요. 유은정(스튜디오 포)의 <내가 던진 모든 질문>은 작가가 들여다 본 돌, 풀, 자연, 세계에 대한 애정 어린 기록입니다. 내내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내 안에 스며들어 순환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죠.

길에서 흔히 마주치는 돌, 풀, 나무, 곤충 하나 하나를 찬찬히 살피는 마음을 생각해봅니다. 작가는 이처럼 사소하고 여리고 보잘것없는 것들을 채집하고 기록합니다. 자연에서 가져온 식물은 시간이 지나 색이 바래고 휘고 구부러집니다. 굽으면 굽는 대로, 주름지면 주름지는 대로 자연스러운 모양은 작가의 손을 따라 금속으로 다시 빚어집니다. 연약한 존재가 단단한 조형으로 태어나서일까요, 금속의 차가운 물성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따뜻함이 느껴집니다.

  <우리의 순간> 부분, 2010-2026, Found natural objects, Dimensions variable
  <우리의 순간> 부분, 2010-2026, Found natural objects, Dimensions vari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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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재료로 만든 사물이어도 영혼으로, 눈으로, 손으로 공들여 빚은 작업은 기계로 찍어낸 것과는 다른 감각을 일깨웁니다. 진열대에서 별 생각 없이 집어 드는 소품이 아니라, 마음에 들어오는 것을 소중하게 고르는 감각. 어린 시절 손에 쥔 자연물을 오래도록 들여다보던 우리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새삼 시간이 빨리 간다고 느낄 때면 이런 감각이 문득 그립습니다. 어떤 작품, 어떤 사물은 마모되고 무뎌졌던 삶의 생생함을 다시 불러옵니다.

나아가 인간 중심의 세계에서 공예는 종종 물질의 존재와 삶의 감각을 선명하게 일깨워줍니다. 작업을 하는 사람도, 작업을 보는 사람도 작업실-전시장에서는 정해진 속도와 방향을 잃습니다. 자신의 속도로 보고, 자신의 방향대로 걷는 일. 돌에 적층된 시간을 금속으로 감싸 안고[包], 그 위에 가지런히 '호흡'이라는 글자를 새긴 작가의 영혼, 눈, 손을 떠올립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천천히 만들어졌을 돌, 돌에 담겨있는 시간의 호흡을 느껴봅니다. 

<돌에 새긴 호흡> 2026, Stone/Brass/Pure Silver, Casting and chasing, Dimensions variable
<돌에 새긴 호흡> 2026, Stone/Brass/Pure Silver, Casting and chasing, Dimensions vari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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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에는 쓰임을 '비워낸' 작업이 많습니다. 어떤 사물을 사용을 목적으로 바라보는 것과 조형 자체로 바라보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입니다. 쓰임을 제거한 공예는 순수 조형으로서 '존재 자체'를 사유하는 매개가 됩니다. 공예품의 본질이 결국 무언가를 담을 수 있는 비어 있는 여백에 있듯 공예는 순수를 담고 있어야 한다고 작가는 말합니다. 사물의 순수한 물질성과 영혼을 대면하고, 물질이 지닌 고유한 힘과 활력을 사유 하는 것은 우리를 지속 가능한 삶으로 이끕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사유 하는 힘은 곧 우리 자신을 스스로 돌아볼 수 있는 힘입니다. 가냘픈 잎사귀 한 장이 무거운 돌을 들어 올린 작업 <중력이동>은 자신의 중심을 어디에 둘 것인가 질문하는 듯합니다. 벌레 먹은 잎은 돌을 들어 올릴 수 없다고 단정 짓는 것은 일견 합리적입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잘 제련된 형태로 다듬고, 무게와 균형을 맞춰 닥친 돌을 들어 올리려는 시도는 불확실하고 위태로운 현실을 밀고 나가는 태도입니다. 

<중력이동> 2026, Mixed media, Casting and welding, 130x72x77cm
<중력이동> 2026, Mixed media, Casting and welding, 130x72x77cm
<지도 제작자> 2026, Clay, Molding, 30x20x20cm
<지도 제작자> 2026, Clay, Molding, 30x20x20cm

전시장에 놓인 중력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는 딱정벌레(목), 일정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달팽이, 가지에 매달린 애벌레, 나무에 앉은 나비 등은 주변에 늘 존재하지만 눈여겨 보지 않는 친구들입니다. 심지어 인간에게 미움 받거나 쓸모 없다고 여겨지는 존재들이죠. 하지만 이들은 나름대로 인간 세상과 공존하면서, 인간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속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약 곤충의 시선으로 지도를 그린다면 인간의 것과는 많이 다를 겁니다. 어쩌면 이 친구들이 너무 오랫동안 굳어진 인간 중심적 사고에 대해 전혀 다른 시각으로 제언해줄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의 시선을 따라, 금속으로 만들어진 작은 생물들을 애정 어린 눈으로 들여다봅니다. 사랑의 이유를 묻는다면 오래 들여다 보니 어느새 마음에 들어와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단단하고 거친 세계에서 무르고 여린 것들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작가는 온몸으로 세계를 여과해 희고 순수한 결정만을 남깁니다. 금속으로 쓴 이 시들은 순간의 시간을 채집해서 영원의 계절로 만드는 연금술입니다. 자연은 찰나에 사라지는 것 같지만 다시 순환하고,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긴 시간 동안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존재할 겁니다. 

<여과> 2026, Hanji/pewter/salt, Wire armature/Casting and welding/Hanji dyeing/installation, 120x180x120cm
<여과> 2026, Hanji/pewter/salt, Wire armature/Casting and welding/Hanji dyeing/installation, 120x180x120cm
  <영원한 계절> 부분, 2026, Sterling/Tree Struck by lightning, Casting and welding/Found and brought, 760x20x20cm
  <영원한 계절> 부분, 2026, Sterling/Tree Struck by lightning, Casting and welding/Found and brought, 760x20x2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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