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ANDER] 26호 : 좋은 공간은 무엇을 하지 않는가

공간을 바라보는 나만의 기준

2026.10.04 |
from.
VOLANDER

 요즘은 예전만큼 자주 찾지 않지만, 저는 여전히 미술관에 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단순히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텅 빈 공간과 작품이 어우러지는 느낌이 좋아서입니다. 비어 있는 공간, 높은 천장, 작품을 비추는 조명, 많지 않은 사람들까지 모두 포함해서요.

 지난 추석 연휴에도 정말 오랜만에 국립현대미술관을 찾았습니다. 서도호 작가의 전시를 보러 간 길이었는데, 예상대로 관람객이 많아 기대했던 여백을 느끼기는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미술관 한쪽에서 진행 중이던 <이것은 개념미술이 (아니)다> 전시에서는 한적한 공간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첨부 이미지

 제가 좋아하는 건 예술품만이 아니라, 작품을 둘러싸고 있던 공간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돌아보면 예전부터 저는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다는 마음이 컸습니다. 그래서 미술관이 아닌 일상에서도 공간을 느끼고 싶어 카페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8년 전쯤 갔던 을지로의 카페 '루이스의 사물들'도 떠오릅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사물들, 무심한 가구, 당시 을지로 골목 특유의 분위기까지. 그 공간 자체가 당시의 '힙지로'를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는 '언젠가 나도 이렇게 내 취향을 모아둔 공간을 만들어야지' 하고 생각했던 거 같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좋아하는 물건을 모으고,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취향에 맞는 커피를 내리는 공간을 갖고 싶었던 건 결국 내 취향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욕심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사실 남들에게 내세울 만큼 취향의 깊이가 깊은 것도, 무언가에 마니아처럼 깊이 몰두해 본 적도 없으면서 말이죠.

 내 취향을 타인에게 보여주는 공간을 갖고 싶었던 것이라는 생각에 공간을 소유하고 싶다는 꿈은 내려놓았지만 좋은 공간을 향한 관심까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낯선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아, 참 좋다" 하고 느껴지는 순간, 그리고 무엇이 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지 가만히 생각해보는 일은 여전히 기분 좋은 일이니까요.

 제가 좋았던 공간들을 몇 군데 떠올려봅니다.

  • 청계천 FELT

    벽면 전체를 감싼 강렬한 버건디 커튼과 중앙의 심플한 커피 바, 긴 좌석이 어우러져 시선과 동선이 막히지 않는 공간.

첨부 이미지
  • 앤트러사이트(서교점)

  3층 주택을 개조한 공간으로, 중앙을 크게 비우고 넓은 통창을 내어 들어서자마자 내부와 마당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

첨부 이미지
  • 도쿄 카시카 (CASICA)

  13m에 달하는 높은 층고의 옛 목재 창고 구조를 그대로 살려, 물건과 공간이 서로 경쟁하지 않고 한 장면처럼 보이는 라이프스타일 스페이스.

첨부 이미지
  • 교토시 코세라 미술관

  고전적인 벽돌 건물에 곡선의 유리 구조를 덧입혀, 외부 거리와 정원, 내부의 빛과 동선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미술관.

첨부 이미지

 제가 좋아하는 공간들은 들어서는 순간 공간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들이었습니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굳이 찾아다니지 않아도 대략적인 모습이 보이고, 시선이 막히지 않습니다. 공간이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무언가를 계속 보여주지 않아도 그 안에 있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옵니다. 그런 공간들은 모든 벽을 채우지도, 자신의 색깔을 강하게 주장하지도 않죠.

 그저 조용히 공간을 비워두고, 그 빈자리를 방문한 사람이 스스로 채울 수 있도록 남겨둡니다.

 좋은 공간은 무언가를 더 많이 보여주는 곳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자기 방식으로 공간을 바라볼 여지를 남겨두는 곳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하루, 당신에게 유독 기억에 남는 공간은 어디인가요?

 그곳에는 무엇이 있었고, 또 무엇이 비워져 있었나요?

🎙️부기장의 한마디

 기장님의 공간들은 대부분 크네요!

 수수한듯하지만 규모만으로도 스펙터클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곳입니다. 아마도 그저 한 공간에 점이 되고 싶은 기장님 마음이 아닐까 싶은데요. 맞나요?

 저는 반대로 작은 규모로 내가 다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을 좋아합니다. 멀리 가지 않아도 저는 제 방을 가장 좋아하죠.

 그곳에는 몇 번 레터에서 소개한 적 있는 책과 카메라, 스피커 등이 저보다 많은 자리를 이미 차지하고 있습니다. 작은 공간을 더 작게 만들어야지!

 저에게 공간은 내가 있고 싶은 것보다 나를 말해주는 장소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꼭 제 방이 아니더라도 나를 대변할 수 있는 자리를 찾게 되죠. 버스를 타건 식당에 가건 저는 매번 비슷한 자리를 찾습니다. 작아 보인다고요?

 하지만 그 공간은 온전히 저의 것입니다.

첨부 이미지

🔭 보란더의 시선

 그러고 보니 제 방에는 취향이라고 할 만한 게 별로 없네요. 책상과 옷장이 전부입니다.

 저는 물건을 소유해서 취향을 드러내는 사람이라기보다,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취향을 느끼는 사람인가 봅니다. 그래서 부기장님도 '스펙터클'을 떠올렸겠죠. 

 최근에 회사 캔미팅을 준비하며 이곳저곳을 추천하는 중 팀원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보란더님의 감도를 믿어요”

 뿌듯하면서 기분 좋은 칭찬이었습니다.  

 어떤 공간을 좋아하는지 하나씩 이야기하다 보면,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도 조금씩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공간을 발견하면 가끔 소개해 드릴께요. 

첨부 이미지

💌 '보란더' 구독하기 : https://maily.so/volander

📧 '보란더' 관련문의 : rrpptkd@naver.com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VOLANDER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1개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 CINEMA B의 프로필 이미지

    CINEMA B

    0
    약 11시간 전

    오늘은 홍대 데스커 라운지에 왔습니다. 아침 10시에 오픈런을 했어요, 이곳이 그렇게 사람이 붐비는 곳은 아니지만 오늘은 작업실을 떠나 새로운 공간에서 여유롭게 하고 싶은 일들을 하고 싶었거든요, 얼마전 생일이었는데, 앞뒤로 일주일간은 이공간을 하루동안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가끔 들리는 공간이지만 굳이 오늘 오고 싶었던 것은 이 공간을 너무 '애정'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많아도 적당한 발걸음소리와 라운지의 문이 열리고 닫힐때 바깥공기가 안으로 들어오면 환기가 되고, 통창 밖으로 지나는 다양한 사람들이 안을 쳐다볼때 눈이 마주치면 괜시리 재밌습니다. 기장님이 소개해주신 공간들을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저는 2017년부터 홍대에서 영화공간 'CINEMA B'를 운영하면서 저의 공간에 오시는 분들이 집으로 돌아가실때 "여기 언제 또 오자, 다음에 그 친구들이랑 오자" 라는 말을 멀리서 듣고 있으면 제가 왜 이 공간을 운영하고 있는지 '처음의 마음'을 떠올리게 됩니다. 오늘도 바쁘고 피곤한 하루였지만 그래도 데스커 라운지에서 보낸 아늑한 시간과 다시 정리하러 갈 저의 공간이 있다는 사실이 오늘의 기분을 더 좋게 만들어 주는 것 같습니다. 오늘 데스커 라운지는 기억에 또 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 :) 좋은 밤 되세요

    ㄴ 답글

다른 뉴스레터

© 2026 VOLANDER

지상의 소음이 지겨울 때, 잠시 고도를 높여 바라본 것들

메일리 로고

도움말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채팅으로 문의하기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특별시 송파구 위례광장로 199, 5층 501-2-31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