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주의
02_우리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사랑이 모든 선택에 있어 시작이자 개연성이 되었다면, 우리는 과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사랑해야 할까. 너무 어려운 이야기지. 가족, 애인, 친구... 생각나는 것은 많지만 그 시작이 어디이며 끝이 어디인지는 가늠할 수가 없다. 애초에 사랑에 범위를 둔다는 생각을 해본 적조차 없는 것 같은데. 그러니 이 영화가 신기하다는 거지. 우리는 스스로부터 우리가 사는 이 세상까지, 그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해- 라며 정답을 내려주고 있으니.
그런 내용은 없었지 않나- 생각한다면 같이 떠올려 보자. 코믹하게 그려내기는 했으나 결국 사랑해야만 해결할 수 있었던 문제들. 제일 먼저 살펴볼 것은, 그래. 디어드리와의 격투 씬. 쿵푸를 연마한 다른 세계의 에블린을 동기화해내기 위해 수없이 외쳤던 말만 봐도 알 수 있다. '사랑해요.' 당장의 공포로 조급하게 외칠 때는 되지 않던 게 진심을 다하니 해결되었지. 그럼 우리가 이 장면에서 무슨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원수를-혹은 원수마저- 사랑하라? 뭐, 이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서라면 그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겠지만.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디어드리라는 캐릭터를 통해 표현되는 사랑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에블린, 본인 스스로를 향한 것이거든.
말도 안 돼-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초반까지만 해도 치고받고 싸우던 캐릭터를 통해 스스로를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얻는다니. 차라리 정말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더 와닿을지도. 하지만 아래 내용을 읽고 나면 그 장면이 조금 다르게 보일걸.
디어드리는 사랑스럽다. 손가락이 핫도그인 황당한 우주이더라도. 그도 그럴 게 손 대신 발을 능숙하게 쓰게 되니까. 이유조차 황당하지. 하지만 생각해 봐, 손가락이 핫도그인 우주에서 발을 능숙하게 쓰기 위해 그녀가 흘렸을 땀방울을. 최선을 다했겠지. 피아노 건반 하나를 누르기 위해 아마 수도 없이 노력했겠지. 물론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을 테다. 그럼에도 그녀의 세상은 돌아간다. 손가락이 핫도그라는 황당한 현실에 결코 좌절 않았기에. 그렇다면 이 우주에서 성실한 세무조사관으로서 노력해 인정받은 것 또한 같은 맥락이지 않겠어? 그리고 그 어느 우주에서든 그녀는 최선을 다해 살아갈 테다. 또 그렇게 살아감으로써 다른 우주 속 그녀의 세상은 돌아갈 테고. 정확히는 그녀 스스로가 돌아가게 하겠지. 그러니 세상을 돌아가게 만드는 그녀는 당연히 언제나 사랑스러울 것이다.
그렇다면 에블린 또한 매한가지. 고향을 과감히 버리고 뛰쳐나와 미국에서 간신히 버티고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이 어찌 아름답지 않을 수 있겠어. 세탁방 하나를 운영하며 소중한 딸에, 낭만에 젖은 남편에, 한참을 등지고 살다 치매가 오고 나서야 찾아온 아버지까지. 이 모든 걸 책임지느라 버거운 그녀의 모습이 말야. 사랑스럽지 않은 년들? 글쎄, 그런 그녀의 모습이 억척스러워 보일 수는 있겠다만 그것이 사랑스럽지 않다는 의미가 될 수는 없지. 그녀의 최선이 그녀의 세상을 돌아가게 만드는데. 그런 삶의 주인공이 바로 그녀일 텐데. 그 사실 하나만으로 그녀는 충분히 사랑스럽지 않나.
그러니 디어드리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그녀의 모습은 스스로가 사랑스럽다는 사실을 비로소 인정하는 데에 의미가 있을 테다. 사랑스럽지 않은 년들로 정의되었던 그들 스스로를 사랑스럽다 혼신의 힘을 다해 외치는 순간, 마침내 그녀는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었을 테다. 디어드리와 에블린, 손가락이 핫도그인 또 다른 평행우주에서 그들이 함께였던 데에는 분명 그러한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분명히.
스스로를 사랑하도록 해, 누구나 사랑스러운 점들은 언제나 있으니- 앞에서 살펴본 메시지는 이렇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사랑하라는 건 도대체 어떤 장면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사실 그 이후부터는 간단하다. 수류탄이 향수가 되고, 가위가 입마개로 변하고(그 용도에 대한 것은 이것이 바로 할리우드식 유머인가 싶었으나...), 너구리를 구하러 어깨에 올라타 달리는 장면들. 폭력에 폭력으로 대항할 수도 있었지만 에블린은 다르게 싸우는 방식을 택했다. 바로 웨이먼드처럼.
서로에게 조금 더 다정해지는 방향으로. 이 세상을 조금 더 사랑하면서. 그리고 마침내 총알이 돌멩이의 눈알로 바뀌는 그 어이없는 때에, 에블린은 싸우기로 했다. 모두에게 존재하는 사랑스러움을 찾아, 다정하게. 마치 그녀의 남편 웨이먼드가 싸우듯이. 그러한 선택을 한 까닭에는 실상 별것 없다. 그야 우리 모두 혼자서는 쓸모없지만 다행히도 우린 혼자가 아니므로. 에블린의 말대로 엉망이라도 괜찮으니. 왜냐면 분명 그 부족함을 메워줄 다정하고 인내심 많고 너그러운 사람을 우주가 보내줄 테니까.
정리하자면 이런 이야기지. 우리는 비록 엉망이지만 언제나 사랑스러울 것이다. 엉망진창이지만 그럼에도 사랑스럽기에. 누군가는 반드시 우리를 다정함으로 품어주겠지.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다정하게 바라볼 의무를 가지게 될 테다. 또 다른 사랑스러운 누군가에게 다정히 말해주기 위해. 엉망이라도 괜찮아- 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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