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은 아직 이상을 기억하고 있을까

시인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도시를 다시 걷다

2026.06.29 | 조회 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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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님, 한 주간 잘 지내셨나요. 저는 선풍기 바람을 쐬며 지난 여행의 두번째 이야기를 적고 있어요. 오늘 편지로 적을 이야기는 언젠가 제가 도쿄에 가게 된다면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었어요. 

"셈비키야의 멜론이 먹고 싶다."

시인 이상의 마지막 유언으로 알려진 문장입니다.

언젠가 도쿄에 간다면 가장 먼저 그 멜론을 먹어보고 싶었습니다.

도쿄 버킷리스트 1 : 셈비키야의 멜론 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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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 도쿄는 날자 날자꾸나, 시인 이상의 도시였어요. 

«월하의 마음», 김향안 중
«월하의 마음», 김향안 중

이상의 눈으로 보았던 그 시절의 동경, 그가 죽어가면서 찾았던 셈비키야의 멜론을 꼭 먹어보고 싶었습니다. 이상은 1939년 사망하고 없지만 멜론을 파는 셈비키야는 아직 도쿄에 남아있습니다.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미츠코시 백화점 옆에 있는 셈비키야로 향했어요. 그러고 보니, 이상은 이 백화점에 관해서도 한줄평을 남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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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츠코시(三越), 마츠자카야(松坂屋), 이토야(伊東屋), 시로키야(白木屋), 마츠야(松屋) 이 7층 집들이 요새는 밤에 자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속에 들어가면 안 된다. 왜? 속은 칠 층이 아니요 한 층인 데다가 산적한 상품과 무성한 숍걸 때문에 길을 잃어버리기 쉽다. '동경', 이상 1937년 '문장' 중

미츠코시, 마츠자카야, 이토야, 시로키야 마츠야는 모두 백화점의 이름입니다. 그 시절엔 가장 앞선 소비문화장으로 인기를 끌었을 장소인데 2026년엔 유적이 되어 100년 넘은 역사를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멜론을 파는 셈비키야는 미츠코시에서 지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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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고급스러운 과일 가게 본 적 있으세요? 1834년 문을 연 셈비키야는 일본 최초로 과일을 디저트처럼 즐기는 문화를 만든 곳이기도 합니다. 과일 디저트 성지답게 지금도 다양한 메뉴를 선보이는 셈비키야에서 멜론 파르페를 먹었어요. 생과일만 팔았다면 아무래도 여행자 혼자 과일을 깎아 먹기란 쉽지 않았을거예요. 유언으로 감도 높은 디저트 레스토랑을 호명해준 시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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셈비키야에는 디저트 메뉴뿐만 아니라 생과일도 판매하고 있습니다. 가격 보고 순간 원화라고 착각했어요. 80년이 지난 뒤에도 셈비키야는 고급 과일 가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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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멜론 파르페의 가격은 3만 원이 조금 못 되었습니다. 바로 주문했다면 비싼 가격에 놀랐을 것 같은데요. 생과일 가격표를 훑어보고 난 뒤라 좀 무뎌지더라고요. 멜론은 정말 맛있었어요! 같이 올라가 있는 아이스크림도 맛있었고요. 묵직하고 부드러운 질감이 좋아서 괜히 몇 번 휘저어 보기도 했습니다. 평일 오후라 그랬을까요. 옆 테이블에 앉은 분들은 어르신이 많았고 이곳을 오랜 시간 방문해 온 사람처럼 편안해 보였습니다. 80년 전 세상을 떠난 한 시인이 이곳의 멜론을 마지막으로 찾았다는 사실을, 그 이야기에 매료되어 멜론을 먹으러 오는 한국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일상 한 귀퉁이를 달콤하게 즐기는 중인 이들도 알까요? 한편,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셈비키야가 기억하는 이야기는 얼마나 많을까요. 유물과 유적이 귀한 까닭은 그만큼 세상의 많은 이야기를 머금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꿀이 뚝뚝 떨어지는 멜론 과육이 셈비키야의 달큰한 이야기라도 되는 것처럼 한 조각도 남김없이 말끔하게 해치우고 길을 나섭니다. 다음 장소는 이상이 도쿄에 내려 가장 먼저 만났을 건물인 마루노우치 빌딩입니다.

이 도시는 몹시 가솔린 내가 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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셈비키야에서 20분쯤 떨어진 거리에 도쿄역이 있습니다. 나란히 걸린 일장기와 적벽돌이 자아내는 지난날의 '모던'. 제국의 웅장한 일부를 떼어내 박제해 둔 것 같았어요. 동경역에 막 내린 시인 이상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건물은 맞은 편에 있던 마루노우치 빌딩이었을 거예요. 건물에 대한 이상의 감상평이 남아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던 마루노우치 빌딩―속칭 '마루비루'―은 적어도 이 '마루비루'의 네 갑절은 되는 굉장한 것이었다. 뉴욕 브로드웨이에 가서도 나는 똑같은 환멸을 당할는지―어쨌든 '이 도시는 몹시 가솔린 내가 나는구나!'가 동경의 첫인상이었다.

우리 같이 폐가 칠칠치 못한 인간은 우선 이 도시에 살 자격이 없다. 입을 다물어도 벌려도 척 가솔린 내가 침투되어 버렸으니 무슨 음식이고 간에 얼마간의 가솔린 맛을 면할 수 없다. 그러면 동경 시민의 체취는 자동차와 비슷해 가리로다.

이 '마루노우치'라는 빌딩 동리에는 빌딩 외에 주민이 없다. 자동차가 구두 노릇을 한다. 도보하는 사람이라고는 세기말과 현대 자본주의를 비예(脾睨)하는 거룩한 철학인, 그 외에는 하다못해 자동차라도 신고 드나든다.

그런데 내가 어림없이 이 동리를 5분 동안이나 걸었다. 그러면 나도 현명하게 '택시'를 잡아타는 수 밖에― '동경', 이상, 1937년 <문장> 중

동경에 막 도착한 이상은 기대했던 마루비루 빌딩엔 실망하고 예상치 못한 가솔린 냄새에 아찔해진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그 시절 마루비루 빌딩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1920년대의 마루노우치 빌딩 [출처 : 웹사이트 <old tokyo>]
1920년대의 마루노우치 빌딩 [출처 : 웹사이트 <old tokyo>]

건축가이기도 했던 이상에게 이 정도 건물은 김새는 것이었나 봅니다. 2026년 마루노우치 빌딩은 이보다 한참은 더 높아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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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건물 위로 한참이나 목이 길어진 이 기린 같은 건물을 본다면 이상은 어떤 코멘트를 남길까요. 왠지 좋은 평을 남기지 않았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어요.

시인의 마지막 순간, 도쿄대학교 병원

떠나기 전 확인한 일기예보에 비 소식이 있었습니다. 비껴 가나 싶었는데 다음날 도쿄대학교에 들어섰을 때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어요. 비내리는 도쿄대학교 풍경은 아름다웠습니다. 그 시절 이상이 맡았던 가솔린 냄새는 사라지고 없지만 비에 젖은 동경의 냄새는 지금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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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대학교의 중앙에는 꿈속에나 나올 법한 연못이 있습니다. 연못에 비가 내리자, 빗방울이 둥글게 퍼져나가는 모습이 수천 마리 개구리가 헤엄을 치는 것 같았어요. 아름드리나무로 둘러싸인 연못 어귀엔 겹겹으로 쌓인 나뭇잎이 많아 비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연못을 한 바퀴 돌다가 맞은편 건물을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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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대학교 의대 병원은 이상이 마지막 숨을 거둔 장소입니다. 그의 마지막 순간을 지키기 위해 달려온 사람은 김향안이었습니다. 오래전에 뉴스레터로 소개했던 두 사람의 이야기가 낯선 도시 한복판에서 다시 떠올랐습니다.

그러고 보니, 사연 많은 장소하면 도쿄대학교의 이 연못을 빼고 말하기도 어렵겠네요. 소설 <산시로>의 주인공 산시로가 사랑에 빠지는 운명적인 장소도 이곳이니 말입니다. 좀 더 살을 붙여보자면 이 편지와도 관련이 깊죠. <낭만 장아찌 주문배송>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인 '낭만'의 출처가 이곳이라고 봐도 무방하니까요.

다음번 마지막 도쿄 기행문에서는 낭만을 좇는 여정으로 인사드릴게요! 무더운 찝찝함을 견디기 위해서인지, 기나긴 햇볕이 작당모의할 시간을 벌어주기 때문인지 유독 여름은 낭만의 계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상 반대편으로 고개를 쭉- 빼고 이 계절의 낭만을 포착하시길 바라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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