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다녀오면 몇몇 단상이 남는다. 특별히 여행의 초입 부분이 그렇다. 나에게는 로마 공항이 그랬다. 공식 명칭은 "레오나르도 다빈치 국제공항”으로 비행기표에 FCO라고 표기된다. 로마 중심부에서 약 32km 떨어진 피우미치노에 위치하고 있고 로마로의 교통편도 잘 되어 있어서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로마에 들어가기 위해 이용하는 공항이다.
우리의 첫 일정은 로마 공항에서 베니스를 가는 국내선 비행기로 환승하는 것이었다. 자타 공인하는 멀미 체질이라 비행기 안에서는 그냥 주는 음식 먹고 누워 잠이나 자야 했는데 마지막에 참지 못하고 본 ‘헤어질 결심’ 때문에 꼼짝없이 멀미를 한 직후였다. (덕분에 막판 반전을 확인하지 못했다.) 아래로 로마 시내 불빛이 보이는데 빙빙 돌며 쉽게 착륙하지 않던 막판 비행시간의 괴로움도 기억이 난다.
대한항공 비행기에는 당연히 한국 승객들이 가득 차 있었고 한국 승무원들이 바삐 움직였다.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 영화를 보다가 공항에 내린 순간 이태리였다. 우르르 나와 수속을 하러 같이 몰려다니던 사람들은 대부분 로마로 가기 위해 공항을 빠져나가고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이 환승을 하기 위해 복도를 따라 이동했다. 이정표를 확인하며 넓고 밝은 환승 통로로 다음 비행기 게이트가 보이는 곳까지 걸어갔다. 곧 바삐 움직이는 많은 사람들이 주위를 에워쌌다.
비행기 게이트가 보이는 벤치에 앉았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공항 한켠 벤치에서 ‘이 시간 이 공간’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머리에 담으려고 애썼다. 앉아서 고개를 길게 뽑고 이곳저곳을 살피다가 일기장을 펴서 첫 감상을 적었다. ‘이제 머리 색깔이 제각각인 사람들이 주위에 가득하다!’ 아프리카에서 온 어린 친구에게 한국 와서 뭐가 가장 인상 깊은지를 물어보니 대답이 “한국 사람이 너무 많아요.”였다던 생각이 났다. 내 주위가 나와는 다른 사람들인 그런 기분. 그 아이도 그런 기분을 느꼈던 것이었구나.
이태리였다. 한국은 전형적인 가을 날씨였는데 로마 날씨는 오후 9시임에도 20도가 넘는 꽤 더운 날씨여서 옷차림도 가죽 재켓에서 탱크톱까지 다양했다. 미국인들과 일본인들 중국인들 관광객들도 많이 보였다. 미국인들은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 많았고 일본인들은 단체 관광인 듯 모여있었다. 벤치에 있는 콘센트에 연결해서 충전을 하며 노트북을 이용하던 젊은이도 기억이 난다. 관광객들의 들뜬 표정이 없는 무심한 표정이라서 이태리 젊은이일 것이라 확신했다. 전광판에 빛나는 Vennice 가 아닌 Venezia, Rome 이 아닌 Roma. 그리고 또그르륵 또그르륵 구르는 것 같은 이탈리어… 여행의 초입이라서 그런지 그 낯설음이 모두 흥미로왔다.
무사히 국내선 비행기로 베니스에 도착. 아무 생각 없이 사람들 따라 공항 밖으로 나왔는데 주차장까지 와서 사람들이 확 흩어져 버렸다. 더운 베니스 밤공기를 마시며 어떻게 메스트레 지역에 있는 호텔까지 가야 하는지 생각하고 있는데 어떤 아저씨가 우리 가족에게 은밀히 다가와 조용히 말을 걸었다. (메스트레?) 기분에는 뒤쪽에서 나타나신 것 같았다. 이렇게 적어놓으니 위험스러워 보이지만 사실 조용한 성격의 동유럽에서 오신 운전수 아저씨였다. 자가용으로 관광객들을 호텔까지 데려다주고 돈을 버시는 모양이었다. 적당한 가격에 흥정을 하고 (택시가 보이지 않아 다른 대안이 없는 것치고는 괜찮은 가격이었다) 예약한 호텔로 출발했는데 조용한 성격과는 달리 어찌나 험하게 과속으로 운전을 하시는지... 빨리 우리를 내려주고 다시 공항으로 가서 새로운 승객을 태우고 싶으셨던 것이다. (고단한 이민자 삶의 한 단면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일까?)
깜깜한 밤에 캐리어를 달달거리며 작은 프런트에만 불을 밝힌 호텔로 들어갔다. 베니스 본섬은 높은 가격에 낙후된 숙소로 유명하다. 그래서 많은 관광객들이 본섬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메스트레 지역에 있는 호텔을 예약한다. 우리가 묵은 볼로냐 호텔 (Best Western Plus Hotel Bologna) 역시 메스트레 지역에 있는 호텔로, 밤에는 잘 몰랐는데 한 블록을 다 차지하고 있는 굉장히 큰 호텔이었다.
반 시간이면 베니스까지 가는 버스 정류장과 기차역이 바로 앞에 있고 주변에 큰 마트도 있고 또 무엇보다 10유로에 근사한 조식을 먹을 수 있어서 매우 만족스러운 선택이었다. (베니스의 식음료 물가는 이보다 훨씬 비쌌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베니스 근처 호텔에 짐을 풀었다. 솔직히 여행 다음날부터는 기억이 뒤엉키는데 첫날의 기억은 이렇게 필름처럼 시간 순서대로 기억이 난다. 아마도 낯설음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온몸이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 글을 쓰며 그 일정을 머릿속으로 되풀이하니 다시 그 낯설음과 설레임이 찾아온다. 낯설음은 두려움이기도 한데, 여행이라는 기회는 그 낯설음을 오롯이 즐길 수 있는 시간이라 특별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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