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축장에서 일합니다

도축장에 아이들_도축장에서 일합니다_오이

2022.06.14 | 조회 736 |
0
|

세상의 모든 문화

총 20여명의 작가들이 세상의 모든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매일 전해드립니다.

 

무릎 위까지 오는 하얀 위생 가운을 입고 무릎 아래까지 오는 하얀 위생장화를 신으면 가끔 무대의상을 입은 아이돌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멋진 재킷과 롱부츠를 신은 느낌이랄까. 하이바라는 하얀색 안전모를 쓰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얀색으로 맞춰 깔맞춤을 노린 멋쟁이 같기도 하다. 당장이라도 퍼포먼스를 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위생모자를 대체하여 나온 캡 모자를 코까지 눌러쓰면 파파라치한테 찍히는 연예인이 된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그렇게 매일 아침 도축장으로 입성했다.

도체에서 분리된 내장이 턱-하고 내장 바구니에 담길 때, 그 옆을 지나가면 내장 국물이 철퍽하고 튀어 위생 가운이 흠뻑 젖기도 한다. 그리고 바구니를 넘어 바닥으로 떨어진 내장을 밟아 넘어질뻔하기도 했다. 군대를 막 전역하고 일을 시작한 22살 남자아이가 넘치는 힘으로 내장을 시원시원하게 던지는 바람에 식겁하고는 했는데, 나중에는 죄송하다고 따로 인사를 왔다. 그 친구는 고졸로 대학 진학을 고민하고 있었고 도축장에서 일하다 보니 축산학과에 관심이 생긴다며 틈틈이 상담을 요청해왔다. 그 친구는 결국 상담 끝에 일을 그만두고 대학을 진학하기로 했다. 

도축장에는 생각보다 농업고등학교의 출신에 고졸인 젊은 친구들이 학교 연계 프로그램으로 입사하여 도부가 된 친구들이 꽤 많았다. 한 번은 다른 작업장에 휴가자 대신으로 업무지원을 갔을 때였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것같이 어려 보이고 키가 멀대같이 큰 남자아이가 나를 보더니 화들짝 놀랐다. 뒷걸음질도 치며 놀랄 정도였으니 여간 놀란 게 아닌가 싶었다.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하고 지나갔고 그다음부터 지나갈 때마다 흘긋흘긋 눈알을 굴려가며 나를 몰래 쳐다보았다. 차마 내 얼굴을 마주하지도 못하고, 내 앞을 지나갈 때면 까치발을 들고 잔뜩 수그리고는 조심조심 지나갔다. 할 말이 있나, 내가 뭐 잘못했나, 쟤 어디 아픈가, 싶었다. 

며칠 뒤, 현장에서 판정을 하려고 가만히 서있는데 그 친구가 또 화들짝 놀랐다. 그러더니 잠시 고민을 하는 듯 서있다가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평가사님, 업무지원 오셨어요?"

안 물어봐도 빤히 아는 이야기를 그 친구는 굳이 내 앞에 까지 와서 물어봤다. 맞다고 하니 이름이 어떻게 되냐고 물었다. 그러고는 손을 번쩍 들며 하이파이브를 하자고 하는 게 아닌가. 나는 돼지를 볼 수 있는 높이인, 바닥에서 50cm 위에 위치한 판정대에 올라가 있었는데, 그 남자아이는 바닥에서 손을 번쩍 들어 올렸을 때 그 위치는 내 키보다도 높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살짝 쫄았지만, 절대 쫄았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 쿨한 척 하이파이브를 해주었다.

그때부터 그 친구는 내가 그 작업장에 업무지원을 갈 때마다 계속 왔다 갔다 하며 한두 마디씩 덧붙였다. 어느 날은 나이가 어떻게 되냐고 물었다. 27이라고 말해주니 그 친구는 또 뒷걸음질 치며 놀랐다. 놀리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티 나게 놀랄 수 있나 나도 놀랄 정도였다. 그러고는 갑자기 누나!라고 환호성을 지르더니 본인은 20살이라며 또 하이파이브를 하자고 했다. 이 친구가 왜 이러지, 생각하다 작업장에 다른 평가사한테 말했다. 그 뒤로 그 친구는 나만 보면 꽁지 빠지게 줄행랑을 쳤다. 

"과장님, 그 친구 이제 저 보면 도망가요."

"아, 제가 그렇게 쫓아다니면 경찰에 신고당한다고 으름장을 놨거든요. 오이씨가 예뻐서 연예인 같다나 뭐라나."

내심 기분이 좋았다. 20살한테도 아직 예뻐 보이는구나, 마스크를 안 벗어서 다행이다-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요즘애들 답지 않게 순수한 것 같아 귀여웠다. 예쁘다고 수줍게 다가오는 모습이나 경찰에 신고한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코빼기도 안 보이게 숨어 다니는 것이 말이다. 언제부턴가는 아예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는데, 군대에 갔다고 건너 듣게 되었다. 

도부가 험상궂은 이미지라는 인식을 깨어준 아이들이었다. 그 친구들은 하하하 사람 좋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띠동갑 도부 아저씨들과 농담 따먹기를 하곤 했다. 그들은 여느 아이들과는 다르게 대학을 가지 않고 바로 도축장으로 취업을 했지만, 여느 아이들처럼 순수했고 꿈과 희망을 좇을 줄 아는 아이들이었다. 그때 그 친구들은 잘 지내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쭉 잘 지냈으면 좋겠는 바람이다.

 

 

매달 14일, 24일 '도축장에서 일합니다' 글쓴이 - 오이(CY Oh)

동물을 좋아해서 축산을 전공했지만, 도축 관련 일을 하는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본업과 좋아하는 것 사이에 괴리감을 느껴 딴짓만 합니다.

페이스북_ https://www.facebook.com/52writer/

인스타그램_ https://www.instagram.com/book_cy_/

브런치_ https://brunch.co.kr/@bookcy52

*

'세상의 모든 문화'는 별도의 정해진 구독료 없이 자율 구독료로 운영됩니다. 혹시 오늘 받은 뉴스레터가 유익했다면, 아래 '댓글 보러가기'를 통해 본문 링크에 접속하여 '커피 보내기' 기능으로 구독료를 지불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보내주신 구독료는 뉴스레터를 보다 풍요롭게 만들고 운영하는 데 활용하도록 하겠습니다.

 

 

*
'세상의 모든 문화'는 각종 협업, 프로모션, 출간 제의 등 어떠한 형태로의 제안에 열려 있습니다. 관련된 문의는 jiwoowriters@gmail.com (공식메일) 또는 작가별 개인 연락망으로 주시면 됩니다.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세상의 모든 문화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 2024 세상의 모든 문화

총 20여명의 작가들이 세상의 모든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매일 전해드립니다.

자주 묻는 질문 서비스 소개서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 서초구 강남대로53길 8, 8층 11-7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