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축장에서 일합니다

도축장에 아이들_도축장에서 일합니다_오이

2022.06.14 | 조회 7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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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총 20여명의 작가들이 세상의 모든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매일 전해드립니다.

 

무릎 위까지 오는 하얀 위생 가운을 입고 무릎 아래까지 오는 하얀 위생장화를 신으면 가끔 무대의상을 입은 아이돌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멋진 재킷과 롱부츠를 신은 느낌이랄까. 하이바라는 하얀색 안전모를 쓰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얀색으로 맞춰 깔맞춤을 노린 멋쟁이 같기도 하다. 당장이라도 퍼포먼스를 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위생모자를 대체하여 나온 캡 모자를 코까지 눌러쓰면 파파라치한테 찍히는 연예인이 된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그렇게 매일 아침 도축장으로 입성했다.

도체에서 분리된 내장이 턱-하고 내장 바구니에 담길 때, 그 옆을 지나가면 내장 국물이 철퍽하고 튀어 위생 가운이 흠뻑 젖기도 한다. 그리고 바구니를 넘어 바닥으로 떨어진 내장을 밟아 넘어질뻔하기도 했다. 군대를 막 전역하고 일을 시작한 22살 남자아이가 넘치는 힘으로 내장을 시원시원하게 던지는 바람에 식겁하고는 했는데, 나중에는 죄송하다고 따로 인사를 왔다. 그 친구는 고졸로 대학 진학을 고민하고 있었고 도축장에서 일하다 보니 축산학과에 관심이 생긴다며 틈틈이 상담을 요청해왔다. 그 친구는 결국 상담 끝에 일을 그만두고 대학을 진학하기로 했다. 

도축장에는 생각보다 농업고등학교의 출신에 고졸인 젊은 친구들이 학교 연계 프로그램으로 입사하여 도부가 된 친구들이 꽤 많았다. 한 번은 다른 작업장에 휴가자 대신으로 업무지원을 갔을 때였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것같이 어려 보이고 키가 멀대같이 큰 남자아이가 나를 보더니 화들짝 놀랐다. 뒷걸음질도 치며 놀랄 정도였으니 여간 놀란 게 아닌가 싶었다.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하고 지나갔고 그다음부터 지나갈 때마다 흘긋흘긋 눈알을 굴려가며 나를 몰래 쳐다보았다. 차마 내 얼굴을 마주하지도 못하고, 내 앞을 지나갈 때면 까치발을 들고 잔뜩 수그리고는 조심조심 지나갔다. 할 말이 있나, 내가 뭐 잘못했나, 쟤 어디 아픈가, 싶었다. 

며칠 뒤, 현장에서 판정을 하려고 가만히 서있는데 그 친구가 또 화들짝 놀랐다. 그러더니 잠시 고민을 하는 듯 서있다가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평가사님, 업무지원 오셨어요?"

안 물어봐도 빤히 아는 이야기를 그 친구는 굳이 내 앞에 까지 와서 물어봤다. 맞다고 하니 이름이 어떻게 되냐고 물었다. 그러고는 손을 번쩍 들며 하이파이브를 하자고 하는 게 아닌가. 나는 돼지를 볼 수 있는 높이인, 바닥에서 50cm 위에 위치한 판정대에 올라가 있었는데, 그 남자아이는 바닥에서 손을 번쩍 들어 올렸을 때 그 위치는 내 키보다도 높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살짝 쫄았지만, 절대 쫄았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 쿨한 척 하이파이브를 해주었다.

그때부터 그 친구는 내가 그 작업장에 업무지원을 갈 때마다 계속 왔다 갔다 하며 한두 마디씩 덧붙였다. 어느 날은 나이가 어떻게 되냐고 물었다. 27이라고 말해주니 그 친구는 또 뒷걸음질 치며 놀랐다. 놀리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티 나게 놀랄 수 있나 나도 놀랄 정도였다. 그러고는 갑자기 누나!라고 환호성을 지르더니 본인은 20살이라며 또 하이파이브를 하자고 했다. 이 친구가 왜 이러지, 생각하다 작업장에 다른 평가사한테 말했다. 그 뒤로 그 친구는 나만 보면 꽁지 빠지게 줄행랑을 쳤다. 

"과장님, 그 친구 이제 저 보면 도망가요."

"아, 제가 그렇게 쫓아다니면 경찰에 신고당한다고 으름장을 놨거든요. 오이씨가 예뻐서 연예인 같다나 뭐라나."

내심 기분이 좋았다. 20살한테도 아직 예뻐 보이는구나, 마스크를 안 벗어서 다행이다-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요즘애들 답지 않게 순수한 것 같아 귀여웠다. 예쁘다고 수줍게 다가오는 모습이나 경찰에 신고한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코빼기도 안 보이게 숨어 다니는 것이 말이다. 언제부턴가는 아예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는데, 군대에 갔다고 건너 듣게 되었다. 

도부가 험상궂은 이미지라는 인식을 깨어준 아이들이었다. 그 친구들은 하하하 사람 좋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띠동갑 도부 아저씨들과 농담 따먹기를 하곤 했다. 그들은 여느 아이들과는 다르게 대학을 가지 않고 바로 도축장으로 취업을 했지만, 여느 아이들처럼 순수했고 꿈과 희망을 좇을 줄 아는 아이들이었다. 그때 그 친구들은 잘 지내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쭉 잘 지냈으면 좋겠는 바람이다.

 

 

매달 14일, 24일 '도축장에서 일합니다' 글쓴이 - 오이(CY Oh)

동물을 좋아해서 축산을 전공했지만, 도축 관련 일을 하는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본업과 좋아하는 것 사이에 괴리감을 느껴 딴짓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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