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보다 성격검사가 뜨겁다. 꽃이나 나무, 동물, 유명인 등에 빗대어 성격 유형을 알려주는 심심풀이형 검사가 도처에 널려있고, 데이트 상대를 찾거나 회사 지원자를 선별하는 데 쓰일 정도로 MBTI 검사에 대한 관심도 높다. 나도 MBTI를 거쳐 에니어그램, BIG5, 그리고 비교적 가장 최근의 TCI 검사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성격검사를 만날 때마다 호들갑스럽게 좋아했다. 불확실함의 실체인 나와 타인의 속성에 나름의 정의를 내려주는 통쾌함도 있는데다 ‘너는 몇 점이다’라고 객관적인 점수까지 알려주니 어려운 수학 문제의 답지를 보는 기분이었다.
대학 신입생 시절 처음 MBTI를 접했을 때는 그야말로 용한 점집에 찾아온 듯 했다. ‘맞아, 맞아’를 연발하게 하는 내 유형에 대한 설명도 그렇고 타인의 좋아 보이던 성격부터 못마땅하던 부분까지 유형별 해석 결과에 문장으로 박혀 있었다. 당시 내가 속했던 동아리에서는 서로를 이해하는 열쇠처럼 MBTI를 강박적으로 이야기하곤 했었는데, 우리는 처음 만나 서로를 소개하는 모임 자리에서 “MBTI 유형이 뭐예요?”라고 곧잘 묻곤 했다. 유형을 아는 순간, ‘나와 잘 맞겠군’ 또는 ‘이 사람은 좀 조심해야겠어’ 하며 관계의 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유독 친해지기 어려웠던 사람들은 ‘NT'로 수렴되는 듯 했다. 직관적인 N 성향과 객관적으로 사고하는 T 성향이 만난 ’NT'는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유형이었다. 특히 내가 무서워서 피하던 선배는 ‘NT’ 중의 ‘NT’였다. 늘 통찰력이 넘치고 핵심을 예리하게 파악해내는 능력이 있었지만, 그것이 또 무서웠다. 내 이야기를 언짢은 표정으로 듣고 있다가 “그런데 그건 아니지”하며 논리의 허점이나 정확하지 않은 단어를 잡아내곤 했다. 나는 자주 움찔했다. 말투도 그렇게 무미건조할 수 없었다. ‘꼭 그렇게까지 대놓고 말해야 하나, 그냥 좋게 좋게 넘어가면 안 되나’. 감정적이고 관계를 중시하는 ‘F’ 유형인 나로서는 일부러 분위기를 경색시키는 듯한 말투가 이해되지 않았었다.
MBTI의 좋은 점은 성격이 장점뿐 아니라 단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려준다는데 있었다. MBTI의 각 차원은 기다란 바 그래프로 되어 있는데, 누구나 양 극단의 두 성향 중 하나에만 집중된 강점을 갖게 될 수밖에 없다.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이 중요한 사람일수록 관계에서 따뜻하기 힘들고, 관계가 중요한 사람이 논리적이기 어려운 것이다. 양쪽의 장점을 모두 갖는 사람이란 없다는 것이 위안이 되었다. 스스로 좀 더 예리하고 이성적이었으면 좋겠다고 툴툴되곤 했는데, 그러한 성격 또한 ‘다정함’이라는 동전의 뒷면에 있는 단점으로 여겨졌다.
‘NT’ 선배의 직설적인 말투 역시 나에 대한 공격이나 그 사람의 특별한 모남이 아니었다. 타인과의 관계보다 옳고 그름이 중요한 성향이기 때문에, 내 기분보다 내 말의 ‘오류’가 더 눈에 띈 것뿐이었다. 그리 생각하니 선배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그의 어쩔 수 없는 면이자 내가 이해해줘야 할 한계로 받아들여졌다.
다음 해에는 에니어그램의 세계에 빠졌다. 에니어그램은 성격을 크게 9가지로 구분하여, 각 유형별로 심리적으로 건강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성격 특성을 설명한다. 유형 설명을 먼저 듣고 자기 유형을 스스로 찾아가는 방식으로 검사를 받았는데, 나는 타인을 돕는 것을 중시한다는 ‘2번’ 유형에 가장 가깝게 느껴졌다. ‘2번’은 심리적으로 건강할 때는 타인에게 따뜻하고 자신과 타인을 균형 있게 사랑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타인에게 의존적이게 된다고 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2번’이 때로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픈 욕구 때문에 선행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나의 정체성은 ‘착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가족을 배려하고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딸이었고, 친절하고 이해심 많은 친구, 살뜰히 챙겨주는 선배였다. 나를 희생하고 타인을 위한 선택이 많아질수록 바르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며 지냈다.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고, 좋은 사람이란 이기적이지 않고 순수한 의도로 타인을 위하는 사람이라는 강박 비슷한 것이 있었다.
하지만 ‘2번’의 이러한 타인을 위한다는 의도를 한 꺼풀 벗겨내 보면, 실은 상대에게 좋은 사람으로 여겨지며 사랑받고 싶은 ‘철저히 나를 위한’ 마음이 깔려있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을 위한다고 생각했던 친절, 희생, 봉사와 같은 선행이 실은 스스로를 좋은 사람으로 정체화하고픈 욕구와 맞닿아있을 수 있다니. 며칠 입맛을 잃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같이 자취하던 룸메이트에게 “언니, 나 잘못 산 거 같아.”라며 품에 안겨 울기도 했다.
‘사랑받고 싶은 게 뭐 어때서’ 라고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그제서야 타인을 위한 행동이 100프로 순수하게 이타적인 의도이긴 힘들다는 것, 사람의 의도를 이기적 혹은 이타적인 것으로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없다는 것, 모든 행동은 그 둘이 뒤섞인 욕구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이 차츰 보이기 시작했다. 그만큼 나와 타인의 이기적이고 옹졸한 모습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에니어그램이나 MBTI는 신뢰도나 타당도가 우수한 검사라고 보기 어렵다. 사람을 유형으로 나눈다는 개념부터 이미 과학적으로 검증이 어려울 가능성을 어느 정도 품고 있다. 나 역시 MBTI 검사 결과가 네 번 모두 다르고, 에니어그램 역시 체크리스트로 응답하는 검사로 해봤을 때 전혀 다른 유형이 나오기도 했다. 단순히 검사 결과지에서의 점수가 높은지 낮은지로만 판단해버리면 자신에 대해 잘못된 편견을 갖게 될 수도 있다. 이 두 검사 자체의 한계도 있지만, 모든 자기보고식(설문형) 검사는 스스로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할수록 자신과 동떨어진 결과를 얻게 된다.
하지만 검사의 정확도와는 관계없이 모든 성격검사는 한 개인의 여러 측면을 다양한 시각에서 설명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생각한다. 다시 말해, 검사가 측정하는 개념에 초점을 맞추어보면 유익하다. 검사에서 설명하는 인간관, 성격에 대해 풀이하는 방식을 충분히 이해하고 나를 비추어보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실마리가 보일 때가 있는 것이다. 내가 MBTI를 통해 성향이 다른 타인에게 좀 더 관대해지고 에니어그램을 통해 미처 발견하지 못한 깊은 나의 욕구를 들여다봤듯이 말이다. 그 때 나와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또 확장된다고 믿는다.
(최근에 만난 성격 검사인 TCI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 매달 5일 '어느 심리학자의 고백'
* 글쓴이_기린
여전히 마음 공부가 가장 어려운 심리학자입니다. 캄캄한 마음 속을 헤맬 때 심리학이 이정표가 되어주곤 했습니다. 같은 고민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 닿길 바라며, 심리학을 통과하며 성장한 이야기, 심리학자의 눈으로 본 일상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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