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내는 게 어떻다고? 왜 그렇게 화내는 게 싫어?” 남자친구는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평소 나는 화를 잘 내는 사람이 싫다는 말을 자주 했었다. 화를 내고 싶을 때 이 말이 걸려 화를 내지 못하고 참았던 것이 쌓였던 것이다.
나는 분노가 두려웠다. 분노를 순식간에 폭력으로 뒤바꾸는 어른들을 보며 자라서인지도 모르겠다. 분노라는 감정은 주변 사람들의 마음에 매서운 흉터를 남기고 오랫동안 쌓은 관계를 무너뜨리며 스스로를 파괴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분노는 사회적으로도 경계의 대상이 되어왔다. 분노는 가톨릭에서 꼽는 일곱 가지 대표적인 죄 중 하나이다. ‘노하기를 더디하라’는 성경 외에도 ‘한때의 분함을 참으라’는 명심보감, ‘분노는 무모함에서 시작하여 후회로 끝난다’는 금언에 이르기까지 분노에 대해 경고하는 메시지가 가득하다. 분노를 함부로 표출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만큼 사회를 유지해나가는 것이 힘겨워지므로, 사람들은 분노라는 감정을 그토록 꺼려왔는지도 모른다.
분노를 폭발적으로 드러내는 것 뿐 아니라 분노를 금기시하는 것 또한 문제를 낳기는 마찬가지다. 화가 나는 상태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화를 터부시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엄격한 부모의 기대까지 얹어지면 화가 날 때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억누르게 되기 쉽다. 이 때 분노는 ‘화’라는 감정으로 드러나지 못하고 여러 다른 가면을 쓰게 된다. 화를 내는 대신 슬퍼하거나 두려워하는 감정, 또는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화났다’고 말하는 대신 ‘속상하다’고 말하거나 자책하는 편이 사람들에게 보다 편하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토록 불편하게 여기는 화는 실은 다른 감정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상태를 알려주는 나침반과 같은 존재이다. 특히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빼앗기거나 침범당했을 때, 분노는 선명하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 방향을 가리킨다. 가족이나 성과, 프라이버시와 같이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누군가 흔들어댈 때, 우리는 분노를 느낀다. ‘지금 가만히 있으면 안돼, 소중한 것을 지켜’라는 사인을 보내는 것이다.
연인이 약속 시간에 연거푸 늦을 때, 거절 의사를 밝혔음에도 상대가 계속 연락을 해올 때, 운전 중에 누군가가 급하게 끼어들 때 우리는 화가 난다. 화가 나야만 한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나의 시간과 안전, 나의 경계를 누가 침범했기 때문이다. 그 때 분노라는 신호가 작동하는 것이 정상이다. ‘지금 경계를 넘어왔다’, ‘네가 한 행동이 잘못됐다’, ‘다시는 그러면 안된다’는 메시지를 주어야 나를 보호할 수 있다.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화가 나지 않으면 상대가 우리를 계속 함부로 대하도록 두게 될 수 있다.
또한 어린 아이가 학대로 고통 받은 사건을 접할 때, 외국인노동자가 착취당하는 것을 볼 때, 동물들이 살처분될 때 우리는 화가 난다. 나의 소중한 무언가를 넘어 타인의 소중한 존엄성, 생명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 편에 서서 그들을 보호하지 못해 화가 나고, 이는 불의에 맞서는 용기를 내게 해주기도 한다. 분노가 ‘문제’에 초점을 맞추게 만들고 사회적 약자들이 집단적인 행동을 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우리가 분노를 느낄 때 몸은 곧바로 전투 채비를 한다. 비상 상황임을 감지한 편도체 덕분에 심장박동이 증가하고 호흡이 빨라지면서 근육에 힘이 들어간다. 닥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준비 모드가 되는 것이다. 분노에 대해 오래 연구한 라이어 마틴(Ryan Martin) 심리학 교수는 분노를 ‘연료’라고도 표현했다. 분노는 우리에게 정당하지 못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힘과 에너지가 되어준다.
나는 평소 거의 큰소리를 내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내가 리더로 있던 소모임 구성원에 대해 부당하게 비난했을 때, 없던 용기가 생겨 목청껏 항의하기도 했다. 가게에서 만난 아이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어른을 볼 때 낯모르는 이더라도 ‘그러시면 안되죠’하고 간섭을 해버린다.
부적합한 감정이라는 것은 없다.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분노는 예측 불가한 폭탄이 아니라 행동의 방향을 가리키는 강렬한 에너지가 된다. 나 또는 이웃을 보호해야 하는 상황에서 없던 용기가 생기게 되기도 하고, 미투 운동이나 촛불 시위와 같이 공유된 분노는 사회를 바꾸는 힘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틱낫한은 ‘주의 깊게 관찰하고 돌보지 않을 때만 분노가 파괴적인 힘을 가진다’고 했다. 분노는 그 자체보다 이를 마주하려 하지 않고 밀어내거나 누를 때 문제가 된다. 오히려 곰곰이 관찰할 때 분노는 나에 대한 충실한 정보원이 된다.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상대의 행동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려주기 때문이다. 유독 화가 많이 나는 상황이 있다면 그것에 대한 내 욕구가 강하다는 의미이고, 분노가 거셀수록 나의 바람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분노조절장애를 치료할 때 인지행동치료에서는 기록하는 기법을 쓰면서 분노의 의미를 탐색하기도 한다. 분노를 느꼈을 때 들었던 생각과 나의 반응을 기록하면서 감정에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법,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법을 훈련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내가 화가 난 이유, 내가 보호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나의 근원적인 바람에 닿을수록 파르르 끓어올랐던 분노도 조금씩 가라앉을 수 있다.
나도 이제는 ‘도인’처럼 화를 덜 내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오랫동안 오해해 온 분노라는 감정은 긍정적인 감정도 부정적인 감정도 아니었다. 화가 솟구칠 때 내가 그토록 지키고 싶은 소중한 것을 응시하고, 그 분노를 어디에 사용할지 결정하면 될 일이었다. 여전히 분노 자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 밀어내거나 무작정 뛰어들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판단이나 두려움 없이 분노의 메시지를 응시하는 시간이 쌓이다보면, ‘왜 이렇게 화가 많이 나는지 모르겠다’는 혼란스러운 순간들이 점차 줄어들지 모른다. 그만큼 나에 대한 이해도 깊어질 수 있을 것이다.
* 글쓴이_이지안
여전히 마음 공부가 가장 어려운 심리학자입니다. <나를 돌보는 다정한 시간>을 공저로 출간하였고, 심리학 관련 연구소에서 일하며 상담을 합니다.
캄캄한 마음 속을 헤맬 때 심리학이 이정표가 되어주곤 했습니다. 같은 고민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 닿길 바라며, 심리학을 통과하며 성장한 이야기, 심리학자의 눈으로 본 일상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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