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심리학자의 고백

손이 서툴어 슬픈 자의 변명_어느 심리학자의 고백_이지안

2024.05.20 | 조회 1.02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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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총 20여명의 작가들이 세상의 모든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매일 전해드립니다.

연필로 무언가를 하는 것은 늘 나에게 도전이었다. 그림뿐 아니라 내가 썼던 글씨를 나도 못 알아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한 번은 고등학교 친구들과 방학 동안 어느 농촌 마을의 교회를 방문했다. 우리는 게임, 풍선아트와 같은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잔뜩 준비했는데, 나는 노래를 가르쳐주는 활동을 맡았다. 전지를 칸칸이 접어 그 위에 가지런히 노래 가사를 옮겨 적었다. 최대한 바른 글씨로. 몇 명 되진 않았지만 아이들 앞에서 처음 가르치는 자리라 잘할 수 있을지 긴장이 되기도 했다. 드디어 전지를 앞에 걸고 아이들에게 노래를 따라 부르게 했다. 아이들이 시원찮은 목소리로 부르는 둥 마는 둥 하더니 한 아이가 말했다. “선생님, 저 글자가 뭔지 모르겠어요.” 그제야 다른 아이들도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름 반듯하게 쓴 글자인데 아이들에겐 그 정성도 통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중학교에는 가정 시간이란 것이 있었다. 우리는 교탁 옆으로 길게 줄을 서서 바느질한 스커트를 선생님께 검사받았다. 우리는 한 달 동안 쉬는 시간 틈틈이 원단을 부여잡고 박음질을 열심히 한 터였다. 대부분 A 아니면 B를 받았고, 무려 내 앞의 친구는 선생님께 연거푸 잘했다는 칭찬까지 받았다. 내 차례에서 선생님은 스커트와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게 뭐니라는 한숨과 함께 선명하게 C를 적어 넣는 것이 아닌가. 당시 선생님의 실망스러운 표정이 또렷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을 보면 나에게 꽤나 인상적인 사건이었던 듯하다.

이미지 출처_I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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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은 내가 그렇지 뭐하고서는 체념으로 덮어버렸지만, 속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하는 억울한 마음도 슬며시 있었다. 젓가락질도 미숙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젓가락질을 가정교육의 결과로 보는 어른이나 유독 젓가락질에 대해 훈계하기 좋아하는 선배들과 밥을 먹을 때면 은근히 눈치가 보였다. 무언가를 조립하거나 만드는 일은 언제나 막막했고, 애써 해봐도 야무지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기 일쑤였다. 심지어 과자봉지나 식용유 속마개를 뜯다가도 내 마음과는 어긋난 방향으로 찢어져 버렸다.

남들은 잘만 하는 것을 나는 왜 잘 하지 못할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여실히 드러나 버리는 이 무능을 주워 담지도 못하겠는데 유능하게 바꾸기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나중에 돌아보니 그 모든 서투름이 구슬 꿰듯 꿰어졌다. 손으로 하는 정교한 작업에 나는 유독 부족했다.

 

이는 운동 협응력을 관장하는 뇌의 어느 부분이 미숙하다는 의미다. 운동 협응력(motor coordination)이란 시각, 청각 등의 감각기관을 통해 인지한 정보를 토대로 신체의 다양한 근육을 조정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시각-운동 협응력(visual-motor coordination)은 인식한 시각 정보를 바탕으로 근육의 움직임을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이다. 예를 들어, 굴러오는 공을 눈(시각)으로 감지한 후, 공이 굴러오는 방향이나 속도 등을 예측하여 발을 움직이는 능력이다. 운동협응력이 부족하면 감각 기관으로 받은 정보를 토대로 잘못 예측하거나 근육을 섬세하게 조정하지 못한다. 몸이 마음 가는 대로 따라오지 않는, 그런 경우다.

새로운 운동기술을 배울 때, 어떤 사람들은 뇌의 체성감각(somatosensory) 영역과 운동(motor) 영역이 기능적으로 촘촘히 연결되어 있어 다른 사람의 동작을 보기만 해도 곧잘 배우게 된다. 유전적 수준에서도 도파민 수용체 유전자와 BDNF(뇌 유래 신경 영양 인자)의 발현을 조절하는 어떤 유전자의 차이가 운동기술을 배우는 데 차이를 만들어낸다. 

이미지 출처_I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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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서툰 것을 이렇게까지 파고들 일인가 싶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은 다 잘하는 것을 나는 왜 이렇게 서투른 걸까, 나는 무언가 문제가 있는 사람은 아닐까하는 혼란 속에 있던 내게 말해주고 싶어서다. ‘네가 하는 모든 것이 잘못된 게 아니고, 뇌의 어떤 부분이 덜 촘촘해서 운동 협응력이 특히 필요한 일에서는 서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이다. 유전이든 환경의 영향이든 나의 운동 협응력은 거기까지였던 것이다. 아무리 애써도 도달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는 것은 어린 시절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자책했던 순간,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아서 숱하게 좌절했던 순간을 보듬게 도와주었다.

다행히 시대가 나를 도왔다. 학창 시절이 끝나기 전 젓가락질 잘해야만 밥을 먹나요라는 가사를 담은 노래가 히트를 쳤고, 나는 그 대목에서는 유독 크게 따라 불렀다. 더 이상 손으로 쓴 문서로 상대를 당혹스럽게 만들지 않아도 되고, 취미가 아닌 이상 스커트를 손수 만들어 입지 않아도 된다. 당신이 손이 서툰 사람이라면 스스로를 너무 책하지 말기를 바란다. 최소한 시대는 우리를 돕고 있으니.


 

해외에 나와 지내면서 위기의 순간이 많았지만 그중 하나는 적당한 미용사가 없다는 것이었다. 가족 중 유일한 남자인 남편의 짧은 머리는 순식간에 자라나곤 했다. 남편은 다른 대안이 없다며 어두운 표정으로 바리캉을 사 왔다. 나는 열심히 유튜브를 보며 공부하고 또 공부했다. 대망의 첫 이발 날, 내 마음과 달리 바리캉은 남편 머리를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녔다. 남편의 머리는 그가 가장 싫어하는 이병 스타일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결혼 후 남편과 가장 크게 다퉜던 날이었다.

하지만 남편과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여전히 유튜브 선생님들이 알려주는 방식대로는 할 수 없지만, 나름의 방법을 개발해서 머리를 잘라주고 있다. 마치 정원사가 튀어나온 잔가지를 치듯 바리캉으로 공중에서 조각하듯 자르는, 희한한 방식이다. 남편은 불안에 떨지만 나는 누구보다 진지하게 이발에 임한다. 운동 협응력은 미숙해도 적응력은 괜찮게 타고난 모양이다.

 

때로는 어떤 부분은 아무리 애써도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자책이나 비교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자주 걸려 넘어지고 무능하게 여겨지는 그 부분까지도 나의 일부로 끌어안을 수 있게 된다. 나의 뇌에 있는 작고 귀여운 어느 부위가 남들보다 풀이 죽어있더라도 괜찮다. 다른 어떤 부분은 또 반짝일 테고, 그 한계를 가지고서도 서툴지만 나와 다른 방식으로 또 잘 지내고 있으니 말이다.


* 참고문헌

H.R. McGregor, P.L. Gribble. (2017). Functional connectivity between somatosensory and motor brain areas predicts individual differences in motor learning by observing. Journal of Neurophysiology, 118 (2), pp. 1235-1243.

Seidler, R. D., & Carson, R. G. (2017). Sensorimotor learning: Neurocognitive mechanisms and individual differences. Journal of Neuroengineering and Rehabilitation, 14 (1), 74.


 

* 글쓴이_이지안

여전히 마음 공부가 가장 어려운 심리학자입니다. <나를 돌보는 다정한 시간>, <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를 공저로 출간하였고, 심리학 관련 연구소에서 일하며 상담을 합니다.  

캄캄한 마음 속을 헤맬 때 심리학이 이정표가 되어주곤 했습니다. 같은 고민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 닿길 바라며, 심리학을 통과하며 성장한 이야기, 심리학자의 눈으로 본 일상 이야기를 전합니다.

상담 블로그 https://blog.naver.com/hello_kir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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