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에도 대가(大家)가 있다

한국의 1세대 조경가, 정영선

2024.10.01 | 조회 5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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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여성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익명이었던 여성들 - 우리의 불만을 기록합니다

정영선 조경가 © 동아일보
정영선 조경가 © 동아일보

도시 속에서 우리는 종종 푸른 나무가 가득한 공원, 조용한 산책로, 자연과 조화를 이룬 건축물을 마주합니다. 이러한 공간은 인간과 자연이 함께 숨 쉬는 삶의 일부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조경이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이며, 더 나아가 도시 환경의 일부분이라는 인식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도시와 자연을 잇는 조경의 개념을 처음으로 정립하고, 조경을 하나의 독립적인 학문이자 예술로 끌어올린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정영선'인데요. 그는 한국의 1세대 조경가로, 삭막한 도시 속에 자연의 숨결을 불어 넣기 위해 평생을 바친 인물입니다. 정영선의 손끝에서 탄생한 공간들은 자연과 인간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로서 오늘날까지 그 의미를 더하고 있습니다.

이번 뉴스레터에서는 정영선의 삶과 철학, 그리고 그가 남긴 업적들을 돌아보며 한국 조경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국내 1세대 조경가가 되기까지

정영선 조경가 © 동아일보
정영선 조경가 © 동아일보

1941년생인 정영선은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의 1호 졸업생입니다. 1980년에는 국토개발 기술사를 획득해 최초의 여성 기술사라는 수식어를 갖고 있습니다. 물론 그는 여전히 현역에서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조경가입니다. 조경 설계사무소 서안의 대표이기도 하고요.

경북 경산 출생인 정영선은 16살부터 국어 교사였던 부친과 집 앞 정원을 가꿨습니다. 대구 기독교 학교 사택에 살며 외국 선교사들이 학교 정원에 꽃과 나무를 심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었고, 고등학교 때는 학교 온실을 맡아 관리했습니다. 학창 시절 남다른 글솜씨로 백일장을 휩쓸었지만, 그는 펜으로 시를 쓰는 대신 흙과 나무, 풀과 꽃을 가꾸는 삽을 골랐습니다.

<예술의 전당> 모형 사진(1985년경) © 서안 
<예술의 전당> 모형 사진(1985년경) © 서안 

자연스럽게 가족들은 그가 문학을 전공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정영선은 서울대학교 농학과를 선택했습니다. 이후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 환경조경학과가 생기자 1회 입학생으로 들어갔으며, 대학원을 졸업한 뒤에는 1975년 청주대학교 조경학과 교수로 부임했습니다. 그의 조경 인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1984년부터였습니다. 아시안게임 기념 공원과 아시아선수촌 아파트, 예술의 전당 현상설계 공모에 당선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한국의 조경이 강력한 정부 주도로 이뤄졌기 때문에 정영선은 한동안 나랏일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아시아선수촌 조경을 맡아 도로의 선형을 설계할 때 공무원들이 그의 사무실에 앉아 채근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설계 도면 대신 나무는 언제 심느냐고요. 조경은 그저 나무 심는 일로 치부하던 때, 그는 50여 년 동안 이런 인식에 맞서면서 굵직한 공공/기업 프로젝트를 통해 한국을 대표하는 풍경을 만들어냈습니다. 

 

정영선이 만든 공간과 철학

이처럼 국내 조경학계와 업계의 거목인 정영선은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목표로 한 여러 혁신적인 공간을 설계했습니다. 그의 주요 프로젝트들은 한국 조경의 새로운 장을 열었으며, 도시 속 자연의 가치를 강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정영선이 진행한 프로젝트를 살펴보면 대한민국 조경의 역사를 알 수 있습니다. 

❶ 선유도 공원

선유도공원 © 동아일보
선유도공원 © 동아일보

산업 유산을 재활용하여 조성된 생태 공원인 선유도 공원은 서울의 한강에 위치한 선유도라는 섬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과거 정수 처리장이 있던 장소를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생태 공원으로 탈바꿈시켰죠. 정영선의 조경 철학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프로젝트 중 하나로 생태 복원과 자연의 재탄생을 강조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선유도 공원의 녹색기둥의 정원 © 권연주, 내 손안에 서울
선유도 공원의 녹색기둥의 정원 © 권연주, 내 손안에 서울

한강 중심부에 자리한 작은 봉우리섬 선유도는 예로부터 빼어난 풍광을 지닌 곳으로 예술가와 묵객시인들의 사랑을 받은 곳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선유봉의 옛 모습은 사라졌고, 1978년부터 2000년까지 서울 서남부 지역에 수돗물을 공급하는 정수장으로 사용되었습니다. 1978년 이후 정수장의 기능이 중단되면서 그 기능을 잃은 공간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서울시는 이 지역을 자연 친화적이면서도 도시와 연결된 공간으로 재활용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정영선이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정영선은 기존의 산업 시설을 철거하지 않고, '자연 복원'과 '산업 유산 보존'을 융합하는 방식으로 접근했습니다. 단순히 파괴하고 새로 조성하는 것이 아니라, 정수 시설을 재활용하여 자연이 회복되는 과정을 돕는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를 통해 그의 생태적 조경 철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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